태진이 꼭 쥐고 있던 그녀의 손을 올려 제 목덜미에 걸쳤다. 그가 수영의 허리를 감싸자 자연스럽게 둘은 가까이 밀착했다.
틈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어졌을 즈음, 태진이 그녀를 안은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수영은 태진 위에 올라타 다리를 벌려 그의 몸에 바짝 붙었다.
“자, 잠깐…….”
그러자 곧장 다리 사이로 단단한 무언가가 닿는 게 느껴졌다.
분명 스치기만 했는데도 느껴지는 묵직함에 뒤늦게 정신이 든 수영이 그를 살짝 밀어 멀어졌다.
“지금은…….”
집에 저들끼리만 있는 것도 아니고, 언니가 잠들어 있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시켜 먹자던 피자가 언제 배달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했다간 정말로 큰일이었다.
태진은 좀처럼 쉬이 끝내 주질 않으니까.
“쉿.”
“흣……!”
“목소리 줄여.”
그는 꽤나 짓궂었다. 제아무리 어두워도 고개를 내저으면 형체라도 보일 터. 그럼에도 모르는 척 그녀의 헐렁한 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손길이 허리께를 스치자 돋는 소름에 수영이 몸을 들썩였다. 태진은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러다 들킨다?”
그의 음성엔 수영을 향한 장난기가 가득했다.* * *
번쩍, 아침부터 눈이 떠졌다.
“아…….”
몸은 갑작스러운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다고 했던가. 회사에 갈 이유도 없는데 일찍이 눈이 떠졌다.
수영은 외마디 탄식과 함께 휴대폰을 살폈다. 아직 9시가 되려면 한참 남은 시각에 그녀는 다시 이불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렇게 두어 시간 후. 완전히 잠에서 깬 수영이 이불을 걷고 침대 밖으로 몸을 일으켰다.
“으윽!”
뚝뚝거리는 위험한 소리와 함께 걸음을 옮겨 방을 나선 그녀는 순간 마저 내디디려던 발을 멈추었다.
“……어?”
방문 앞에는 쇼핑백이 놓여 있었다. 그것도 한두 개가 아닌, 여러 개였다.
“뭐지?”
분명 어제 태진이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만 해도 없던 것들인데.
‘언니가 산 건가?’
그렇다기에는 수진이 어딜 나가는 걸 보지도, 그러는 소리를 듣지도 못했다. 아침부터 이걸 사 왔을 리도 없고.
어떠한 가정도 들어맞질 않자 수영이 자꾸만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뭘 샀대.’
그러면서도 궁금은 한 탓에 슬그머니 상체를 기울여 쇼핑백을 들여다보았다.
“헤엑…….”
그와 동시에 잔뜩 소리를 죽인 비명을 내질렀다.
“이게 다 뭐야?”
수영이 눈을 연신 깜박이며 내용물을 꺼내었다.
쇼핑백 안에는 평소 보지도 못한 명품 백과 액세서리가 각각의 쇼핑백에 채워져 있었다.
아직 날은 따듯해질 기미조차 없는데 언뜻 보인 상품 태그에는 벌써 ‘S/S’가 붙어 있기까지 했다.
“이 언니가 미쳤나…….”
요즘 돈 좀 벌었다고 하더니 이런 걸 이렇게나 많이 살 줄이야.
수진을 향한 한심함에 수영의 고개가 좌우로 흔들렸다.
“야, 최수영.”
그때, 제 이야기를 하는 줄 알았는지 수진이 방문을 열어 모습을 드러냈다.
수영은 곧장 몸을 돌려 제 언니를 올려다보았다.
“언니, 웬 쇼핑을 이렇게 많이 했어?”
“쇼핑? 무슨 쇼핑…… 아, 그거? 그게 왜 내 거야? 네 거잖아.”
“뭐?”
뭔 소리야.
“내가 이걸 사러 갈 시간이 어디 있어?”
“아닌데? 아까 여럿이 와서 너 찾더니 너 잔다고 하니까 네 거라고 하고 갔는데?”
수영이 어이가 없다는 듯 되물었으나 수진의 표정에는 좀처럼 웃음이 비치질 않았다.
오히려 그럴 리가 없다는 얼굴이었다. 그에 수영도 이상함을 느꼈는지 재차 물었다.
“누가? 몇 명인데?”
“세 명인가? 몰라.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어. 다들 정장 입고 있었다는 거 말고는 특별할 것도 없었고. 태진이가 보낸 거 아냐?”
“뭐? 걔가 왜?”
“아님 말고. 쇼핑백이 죄다 강성백화점이라 혹시나 했지.”
‘강성백화점?’
넌지시 뱉은 말에 수영이 홱 눈을 돌려 쇼핑백을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쇼핑백에 그려진 로고가 죄다 강성백화점이다.
일부러 ‘강성백화점’임을 티 내려 쇼핑백으로 한 번 더 강조한 듯했다.
‘진태진이?’
정말 진태진인가?
‘걔가 이럴 애는 아닌데.’
태진이 이런 걸 줄 리도 없을뿐더러 이런 선물을 하려면 어제 했을 것이다.
설령 오늘 줄 셈이었대도, 그럼 벌써부터 휴대폰에 불이 났을 텐데. 칭찬받고 싶어서.
수영의 다른 주변 사람이라면 수진도 얼굴을 알 테고, 이 시간에 이걸 주고 갔을 리는 없다.
그럼 누구지?
‘설마…….’
그렇게 한참 머리를 굴리다 문득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스치는 한 명이 있었다.
태진의 아버지, 진 회장이었다. 모르는 사람 여럿이 정장을 입었다고 하니 어제 제 앞에 나타났던 이들이 떠오른 탓이었다.
‘정말로 내가 마음에 안 드시나 보네.’
드라마에서나 보던 헤어지라는 말과 함께 주는 현금 봉투를 이런 식으로 받다니.
수영은 쓰게 웃었다.
“…….”
그녀는 곧 입을 꾹 다물곤 물건을 도로 쇼핑백에 넣었다. 그리고 전부 집어 들어 창고로 사용하는 선반 위에 올려 두었다.
“뭐야. 왜 거기다 놔?”
“…….”
“안 쓰게?”
이를 이상하게 본 언니의 물음에 수영이 잠깐 멈칫하는 듯하더니 이내 담담히 대꾸했다.
“내 거 아니야.”
“그럼 누구 건데?”
“몰라. 아무튼 내 거 아냐. 혹시나 해서 하는 얘긴데 언니도 이거 쓰지 마. 알겠지?”
종종 말없이 수영의 물건을 가져다 쓰는 수진이 이것까지 쓸까 신신당부를 했다.
“알겠냐고.”
그런 수영의 우려가 일치할 예정이었는지 수진의 입이 삐죽 튀어나왔다.
그녀는 적잖이 아쉬워하는 목소리로 알겠다며 대답하곤 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다시금 혼자가 된 수영은 그제야 꾹 참았던 한숨을 토해 냈다. 아까부터 터져 나오려던 한숨이었다.
“…….”
수영의 인상이 서서히 일그러져 갔다.
“아, 몰라.”
그러다 이내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드러누웠다.
‘진태진은 아직 모르는 거 같던데.’
왠지 태진이 이 일을 알고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어떡하지.’
알았으면 벌써 전화를 했을지도 모른다는, 나름의 합리적 의심이었다.
‘말을 해야 되나…….’
괜히 말했다가 일만 키우는 꼴이 되면? 그래서 혹시나, 정말로 혹시나 헤어지거나 하는 문제로 이어지면?
‘그건 싫은데.’
“아…….”
급기야 수영이 탄식했다.
‘모르겠다.’
선물 같은 걸 주면서 회유한다고 헤어질 마음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그냥 계속 신경만 쓰일 뿐이지.
설마 고작 헤어지기를 거절했다고 해서 저를 죽이기라도 하겠는가.
“…….”
그래. 설마 그럴 리가.
수영은 침을 억지로 삼키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 *
얼마나 더 지났을까. 아무도 만나지 않고 지낸 지 며칠이었다.
그간 태진이 갑자기 바빠지는 탓에 연락이라곤 메신저나 전화가 고작이었다.
쓰레기봉투를 들고 집 밖으로 나온 수영은 갑자기 몰아친 찬 바람에 몸을 움츠렸다.
‘으, 추워. 빨리 버리고 와야겠다.’
“최수영 씨?”
“아, 깜짝이야!”
그러다 갑작스레 옆에서 들린 목소리에 놀라 어깨를 들썩였다. 손에서는 힘이 확 풀어졌고, 들고 있던 쓰레기봉투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녀를 부른 남자는 놀라는 모습에 움찔하더니 아스팔트 바닥과 조우한 쓰레기봉투를 한번 힐끔 보곤 큼, 헛기침 소리를 내었다.
“놀라셨다면 죄송합니다.”
“누구…… 세요?”
“장병민입니다. 며칠 전에 한번 뵀었는데.”
슬금슬금.
“강성그룹 비서실의…….”
“아, 네에…….”
남자의 말이 이어질 때마다 수영의 걸음이 뒤로 움직였다. 대답은 하는데 시선은 다른 곳으로 향했고 말은 죽 늘어지기 바빴다.
“…….”
전혀 달갑지 않다는 티가 꽤나 난 덕일까. 영문도 모르고 그녀가 한 발자국 물러설 때마다 같이 나아갔던 남자가 더는 다가오지 않고 멈춰 섰다.
그렇게 2분여를 가만히 있고 나서야 수영이 재빨리 쓰레기봉투를 집어 들곤 조심스레 물었다.
“무슨 일로…….”
혹시 회장님이 또 부르시나? 왜? 무슨 이야기를 하시려고?
수영이 괜한 긴장감에 말라 버린 침을 애써 삼켰다. 그러나 그녀의 속을 알 리 없는 남자는 그저 그녀가 먼저 궁금해한 것에 흡족해하며 대답했다.
“다른 건 아니…….”
“거기!”
아니. 대답하려 했었다. 입을 엶과 동시에 발이 그녀에게 향하려 하자 수영이 저도 모르게 다급히 소리쳐 그의 말을 끊었다.
남자는 곧바로 움직임을 멈추었고, 멍청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수영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뒤늦게 민망한 낯을 띠었다.
“거, 거기서 대답해 주시면 될 것 같아요.”
“……아, 네. 여기요.”
“네. 거기서.”
“…….”
그런 와중에도 거리를 두기 위한 그녀의 의지는 확고했다.
단호한 말에 남자가 엉거주춤 자리를 잡고 섰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무얼 잘못했는지 고민하는 눈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