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은 정말 열심히 태진을 피해 다녔다.
단체 회의를 제외하곤 같은 자리에 있을 기회 자체를 만들지 않았고, 늘 바쁜 모습을 보였다.
이미 고정 멤버가 되어 버린 점심시간이 문제이기는 했으나 원래도 그에게 반응을 하지 않았으니 괜찮았다.
그렇게 며칠을 열심히 피해 다녔을까.
“최수영 팀장.”
급기야 태진이 그녀의 자리까지 손수 찾아왔다. 그것도 퇴근 시간에.
다행히 아직까지 남은 직원들은 몇 없었고, 그가 낸 목소리는 수영과 옆자리에 앉은 주희에게만 들릴 크기였다.
“잠깐 나 좀 봅시다.”
“네? 무슨…….”
“할 말, 있습니다.”
미세하게 좁아진 미간은 적잖이 불쾌감을 드러내고 있었고, 수영을 못마땅해하는 얼굴이었다.
얼핏 화가 난 사람 같았다.
“……네.”
그의 칼 같은 음성에 수영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태진은 곧장 뒤돌아 회의실로 들어갔고, 둘을 번갈아 가며 보던 주희가 수영의 팔을 툭 건들며 말했다.
“본부장님 화나셨나? 요즘 무슨 일 있어?”
그가 풍기는 기류를 주희 역시 느낀 모양이었다.
수영이 눈동자를 또르르 굴려 댔다.
“일은요.”
“근데 왜 저렇게 살벌해? 단단히 화난 거 같은데? 싸웠어?”
“아뇨? 그래도 상산데 어떻게 싸워요.”
“왜, 친구라며. 밖에선 싸울 수도 있지.”
수영이 담담하게 내뱉는 대답에 주희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리고 요즘 자기 본부장님 피해 다니잖아. 난 그래서 싸운 줄 알았지.”
“……제가요?”
“응. 아니야?”
티가 많이 났는가 보다. 그래도 나름대로 순수하게 바쁜 척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대놓고 피했나.’
설마 그래서 화가 났나.
‘화를 낼 정돈가?’
뭐, 짜증을 낼 수는 있겠지만.
그렇지만 제 딴에도 이유가 있었다.
정말 오죽하면 피하겠는가. 오죽하면.
옛날과 같은 일을 또 겪지 않으려는 최선의 행동이었다.
“아니에요.”
수영은 어색하게 웃음 지었다.
차마 소문이 신경 쓰여서요, 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먼저 퇴근하세요.”
“그래. 알았어. 내일 봐.”
주희까지 사무실에서 나가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태진이 있을 회의실로 걸음을 옮겼다.
달칵.
열려 있는 문을 마저 열고 들어간 후, 행여 대화가 새어 나갈까 문을 굳게 닫았다.
“최수영.”
그 즉시 태진이 입술을 뗐다. 그의 음성이 날카롭게 귓속을 파고들었다.
수영은 한 번 숨을 깊게 뱉어 낸 뒤 대꾸했다.
“회사에서는 말 놓지 않아 주셨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는데요.”
“……그래, 요.”
와중에 그녀와 한 약속을 안 지킬 수는 없었던 듯 태진이 멈칫거렸다.
“최수영 팀장.”
“네. 말씀하세요.”
“왜 나 피해요?”
그러나 말을 멈추는 건 아니었고, 처음부터 묻고 싶었던 건 그거 하나였던 모양이다.
그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죠.”
‘……역시.’
수영은 최대한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답했다.
“그럴 리가요.”
“그럴 리가 있는데.”
그에 태진의 즉답이 이어졌다.
“며칠째 나 쳐다도 안 보고 있잖아요. 지금, 이 순간에도.”
“…….”
“설마 정말로 모를 줄 알고 그런 건 아닐 테고.”
이글거리는 눈빛에 얼굴이 뚫릴 기세였다.
수영이 슬쩍 고개를 돌려 그를 마주하곤 입술을 뗐다.
“……몰랐는데. 눈치가 빠르신가 봐요.”
태진의 입이 다물어졌다.
“모를 수가 없죠, 내가. ……최 팀장만 보고 있었는데.”
그러더니 곧 바람 소리를 내며 말을 이었다.
“이유나 좀 압시다. 날 왜 그렇게 피하는지.”
지금 상황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한 그는 무섭도록 그녀를 주시했다.
수영이 말을 않자 침묵이 흘렀다.
“말을 해 봐요.”
그 정적이 싫었던 태진은 거듭 그녀에게 대답을 요구했다.
“최수영 팀장.”
“제가 처음부터 말씀드렸잖아요. 우리 서로 아는 척하지 말자고요.”
그러자 수영이 본드를 붙여 놓은 양 다물기만 했던 입을 벌려 따지듯 물었다.
“본부장님 때문에 자꾸 다들 오해하는 거 모르세요?”
“오해?”
“네. 오해.”
아, 진짜 내가 이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억울해서 안 되겠다.
수영이 인상을 팍 쓰곤 콧바람을 흥, 불었다.
“본부장님이 여기 처음 부임하시자마자 하신 말 때문에 지금 모두가 오해 중이라고요.”
“그러니까 무슨 오해?”
“무…….”
모르쇠로 일관하는 듯한 그의 태도에 수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일부러 저러는 건가?’
뻔히 다 알면서?
그녀는 기가 찬다는 웃음을 내뱉은 뒤 눈을 부릅뜨고 말을 이었다.
“본부장님이랑 저랑 무슨 이상한 사이라도 되는 줄 알잖아요, 지금.”
“…….”
“그러니까 왜 첫사랑이니 뭐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 가지고는.”
중얼중얼. 차마 이것까지 큰 소리로 할 만큼 철면피는 아니었다.
절대 태진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중얼거리던 그녀는 이윽고 잠시 숙였던 고개를 쳐들었다.
“아, 그냥 회사에서 아는 척하지 말라는 게 그렇게 어려워요?”
한 번 터진 봇물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흘러나왔다.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욕을 먹고 있는지는 알아요? 네?”
태진과 마주 보고 선 상태지만 그녀의 거리 두기에 둘 사이가 그다지 가깝지는 않았는데 따져 묻느라 흥분한 나머지 수영이 자꾸만 그에게 다가갔다.
덕분에 당황한 건 태진이었다.
조금씩 뒤로 물러서던 그는 더 갈 곳이 없어진 탓에 벽에 기대어 섰다.
“그, 알았으니까 좀 떨어져요. 너무 가까운데.”
“가깝긴 뭐가……!”
‘뭐가 가까워!’ 하고 소리라도 치려던 찰나. 이상할 정도로 붉게 물든 태진의 뺨이 눈에 띄었다.
벽에 기대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시선 둘 곳을 찾아 헤맬 만큼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양새였다.
뒤늦게 이성을 찾은 수영은 억지로 목을 가다듬는 소리를 내며 두어 발자국 멀어졌다.
“……아무튼.”
“…….”
“그런 것도 있고.”
또, 사실은 그것만이 아니라.
수영은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다 이내 결심한 듯 마저 입을 열었다.
“누가 본부장님 좋다고 한 걸 들었어요.”
“…….”
“이런 일로 같은 회사 사람끼리 괜히 얼굴 붉히고 싶지 않아요.”
“김 대리죠? 나 좋다는 사람.”
“네. ……네?”
아니, 그걸 알고 있었단 말이야?
무심코 대답하던 수영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놀란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으나 태진은 생각보다 무덤덤한 낯이었다.
“알고 있었어?”
“같은 공간에서 누군가가 자기를 좋아하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어.”
“…….”
“그거 때문이에요? 나 피한 이유가.”
태진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진 게 느껴졌다. 원인을 알게 되어 의문이 해소된 탓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수영은 뜬금없이 궁금했다.
“후우…….”
그러한 그녀의 호기심 어린 눈빛조차 읽어 냈는지 태진이 숨을 푹 내쉬더니 다시금 올곧은 시선을 유지했다.
그가 말했다.
“그럼, 김 대리랑 평생 이어질 일 없게 되면 나 안 피할 겁니까?”
“……그게 무슨 소리세요?”
“당연한 소리지만 거절할 겁니다.”
“왜요?”
“왜……. 왜라니.”
태진은 그녀의 반응이 이해되질 않는 듯했다.
순간 할 말을 잃어 말끝을 흐리던 그는 하, 하는 소리를 내어 답답한 속을 내비쳤다.
그러면서도 그의 말은 죽 이어졌다.
“김 대리한테 관심 없으니까.”
“…….”
“애초에 너 말곤 보이지도 않았다고, 나는.”
태진의 말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그는 자신의 입으로 직접 말했듯 누군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모를 만큼 눈치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익히 알고 있었고, 처음부터 거절할 생각이었다. 수영이 아니라는 이유가 전부였다.
충분히 설명이 되었다고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수영이 제게 마음이 없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녀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기회가 생길 때마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내비쳤다.
“그러니까 나 그만 피해요, 최 팀장.”
“…….”
태진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잘게 떨리는 손에 힘이 들어갔으나 다행히 수영의 시야에는 닿지 못하였다.
대신 그가 한 말은 정확하게 수영에게 닿았는지 한동안 입을 열지 못하였다.
수영은 마른침을 삼켰다.
‘거짓말.’
저게 진짜일 리 없다.
언제는 저런 소리 안 들어 본 줄 아는가?
아니. 자주 들었다. 몇 번이고, 몇십 번이고.
10여 년 전부터. 태진은 그때도 이렇게 모두에게 달콤한 말과 행동을 잘해 왔다.
그걸 믿어서 돌아온 건 상처뿐이었고, 그때 생긴 미움은 아직도 건재했다.
‘내가 너한테 또 당하면 사람이 아니다.’
그녀는 그를 믿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