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는 개뿔.
진짜 개뿔이다.
‘으아아아아악!’
제각기 일을 하느라 정신없는 어느 날의 오후. 수영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속으로나마 비명을 내질렀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 같은 심정에서였다.
‘진태진 얘 진짜 뭐지?’
나머지 기간 동안 마음을 다스리지는 못할지언정 최소한 감출 수는 있을 줄 알았다.
고작 3주니까. 진태진이 싫을 때도 나름 싫은 티를 감췄으니 이 정도는 할 수 있을 줄 알았건만.
제 속셈을 안 건지 근 며칠, 태진이 자꾸만 제 앞에 나타났다.
화장실 갈 때 한 번, 탕비실에 갈 때 한 번. 식당 갈 때는 일어서기도 전부터 주희나 성 대리와 함께 점심 메뉴를 고르고 있기까지 했다.
“아…….”
그러나 진짜 문제는 그렇게 마주칠 때마다 정신 못 차리고 두근거리는 저 자신이었다.
수영이 고개를 처박고 탄식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반칙이지……!’
눈을 마주칠 때마다 웃으면 내 심장은 누가 책임지냐고!
전에는 그저 꼴 보기 싫었던 눈웃음이 어찌나 예뻐 보이던지.
‘내가 그 정도로 좋나?’라고 자신감 있게 생각하다가도 그 생각 자체가 낯 뜨거워서 돌아 버릴 것만 같았다.
‘아. 제발.’
누가 끼어들어도 좋으니까 진태진 좀 말려 줬으면!
수영은 간절했다.
그리고 그 간절함은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변질되어 그녀의 앞에 들이닥쳤다.
똑똑.
정확히 떨어지는 퇴근 시간. 분주하게 짐을 챙기는 이와 그럴 시간조차 없는 직원들 사이를 걸어와 태진이 수영의 앞에 섰다.
가볍게 테이블을 두드리는 그의 제스처에 수영이 가방을 챙기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칼퇴 할 거죠? 다 챙겼어요?”
“네?”
“차 막히기 전에 얼른 가자고요.”
“…….”
태진은 제가 다리를 다친 이후 줄곧 출퇴근 때마다 먼저 와 기다리곤 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는 다가왔고, 왜인지 평소와 다른 미소를 짓고 있었다.
태진의 분위기가 미묘하게 다름을 알아챈 수영이 상체를 살짝 뒤로 뺐다.
“왜 그러세요?”
“뭐가요?”
“아니…….”
분명 더없이 음흉한 웃음인데. 이상하게도 그가 “뭐가요?” 하는 순간 말문이 막혀 버렸다.
아무래도 눈을 똑바로 마주하는 바람에 자신의 사고가 정지한 모양이었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수영은 잽싸게 고개를 돌려 애꿎은 가방만 만지작거렸다.
‘이젠 눈도 못 마주치겠냐고, 왜……!’
차라리 눈을 감아 버릴까? 아니, 그럼 이상하게 볼 텐데.
고작 한마디와 한 번의 눈 맞춤에 수영의 머릿속은 오락가락했고, 그런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던 태진은 실소를 터트렸다.
“얼른 가죠. 진짜로 차 막히겠다.”
“아, 네.”
수영은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벌떡 일어서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 *
“오늘 날이 좀 따듯하더라.”
막히는 도로를 천천히 달리는 차 안. 조용한 공기 중에 태진의 음성이 스며들었다.
“어?”
갑작스레 건네는 말에 수영이 화들짝 놀라며 몸을 들썩였다.
“어어…… 그러게.”
“왜 그렇게 놀라?”
그러자 제가 뭐 이상한 거라도 물었느냐며 웃음기 섞인 물음이 뒤이어 들려왔다.
수영은 아무렇지 않은 척이라도 하려는 양 흠흠, 목을 가다듬은 뒤 재차 대답했다.
“그냥, 잠깐 딴생각 좀 하느라고.”
“바다 갈래?”
“뭐?”
갑자기?
“무슨 바다야. 이 시간에.”
수영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으나 태진은 조금의 주춤하는 기색도 없이 여전한 얼굴로 대꾸했다.
“어차피 내일 토요일이잖아.”
“그래도 그렇지. 무슨 너랑 바, 바다를 가.”
누가 보면 알콩달콩한 사이라도 되는 줄 알겠다. 둘이 여행 가고 막, 그런 사이.
“우, 우리가 언제부터 그런 사이였다고.”
수영이 기겁하다시피 대답하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뭐, 그렇긴 하지.”
그에 태진은 웬일인지 수긍하는 뉘앙스의 말을 내뱉었다. 은근히 서운한 티를 내며 고집부릴 줄 알았던 예상과 다른 모습에 수영이 슬그머니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느낀 걸까. 그가 말을 이어 했다.
“근데 이미 약속이 잡힌 거라 나도 어쩔 수가…….”
“약속? 무슨 약속?”
대체 누구랑? 그 약속 때문에 그렇게 꿍꿍이 가득하고 음흉하게 웃은 거였나?
전혀 생각지도 못한 태진의 반응에 수영의 눈이 크게 떠졌다.
“아, 그…….”
하나 그가 제대로 입을 열기 전, 그녀가 궁금해했던 모든 의문들이 풀리기 시작했다.
차 내부에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려 퍼졌고, 태진은 지체 없이 통화 버튼을 눌러 입을 열었다.
“네, 누나.”
‘누나?’
- 태진아, 끝났어?
‘어? 이 목소리는.’
“언니?”
어디서 많이 들어 봤다 했더니 다름 아닌 수영의 언니였다.
수영은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수진을 불렀고,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수진 역시 반응을 보였다.
- 같이 있는 거 보니 끝났나 보네?
“언니가 왜 얘한테 전화를 걸어?”
- 얘 좀 봐? 내가 태진이한테 전화 거는 게 이상해?
“당연히 이상하지!”
아, 이게 아닌데.
수영은 생각하기도 전에 뱉어 버린 진심에 저 자신도 당황하여 입을 벙긋거렸다.
“아, 아니, 그러니까, 무슨 꿍꿍이가 있을지 모르는 게 이상하다고.”
- 얘 뭐라는 거야. 야, 최수영. 너 바다 갈래? 나랑 태진이랑 가기로 했는데.
“갑자기 무슨 바다야. 안 추워?”
- 겨울 바다의 낭만을 모르네, 얘가. 그래서 싫다고?
“그런 건 아닌데…….”
- 야, 태진아. 그럼 쟤 집에 놓고 우리끼리…….
“아, 누가 안 간대?”
최수진 진짜. 고민하는 척이라도 하는 꼴을 못 본다.
대체 언제 둘이 이런 걸 생각해 냈는지, 그 사이에 연락처는 어떻게 주고받았는지 등등. 물어보고 싶은 게 한가득한데도 괜히 물어봤다가 놀림받을까 봐 묻지도 못하고 있건만.
이래저래 생각 좀 정리하려 했더니 그새를 못 참고 저렇게 홀라당 선 그어 버리는 수진이 너무도 얄미웠다.
“갈 거야, 나도.”
‘아무리 누가 끼어들어도 좋다고 생각했다지만 이런 식일 줄은 몰랐지!’
둘이서 가는 걸 지켜만 보고 싶진 않았다. 굳이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혹시나. 만에 하나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 거니까.
그 ‘무슨 일’이 뭔지는 생각도 하고 싶지 않고.
- 으이그, 갈 거면서 튕기기는. 태진이랑 둘이 집으로 나 좀 데리러 와. 짐도 좀 챙기고 하게.
“네, 누나.”
“짐?”
- 그래, 조심해서 오고.
“네. 이따가 연락드릴게요.”
- 그래, 알았어.
“아니, 잠깐만 언…….”
뚝. 조금 전까지 한없이 다정하던 수진은 그녀에게만 매정했다.
호적 메이트의 특권인가. 어쩜 이렇게 제 말은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끊어 버리는지, 수영은 어이가 없어 기가 찬다는 웃음을 내뱉었다.
“하하.”
이 광경을 빠짐없이 지켜본 태진도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웃어? 웃겨?”
그러나 그걸 용납하지 않는 수영의 날 선 물음에 그는 급히 정색하고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아니. 미안. 안 웃겨. 하나도.”
“아, 씨……. 최수진 진짜. 뜬금없이 무슨 바다야.”
그럼에도 좀처럼 짜증이 풀리지 않아 그녀는 인상을 찡그린 채 중얼거렸다.
“완전 자기 멋대로라니까.”
“……내가 가자고 한 건데. 바다.”
그때, 태진이 조심스레 목소리를 내었다.
“뭐?”
수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그를 돌아보았고, 그의 말이 여전히 조심스럽게 이어졌다.
“네가 바다 좋아하니까.”
“…….”
“근데 내가 가자고 하면 당연히 안 갈 거니까. ……내가 미리 누나한테 부탁했어. 그래도 셋이 가면 혹시나 가지 않을까 해서.”
바다. 좋아하기는 한다. 한데 그걸 직접적으로 말한 적은 없었다. 게다가 그건 아주 오래전, 학창 시절 여름 방학 때나 그랬지.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고?’
“……갈 거지?”
여태껏 할 말 다 해 놓고 뒤늦게 제 눈치는 왜 본담. 바보같이.
수영은 순간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꾹 눌러 담곤 새침한 투로 답했다.
“어차피 이미 정해진 거라며?”
“그렇긴 한데…….”
“오늘은 갈게. 다음엔 나한테 직접 물어봐. 싫은 건 셋이 가도 싫으니까.”
이 정도면 괜찮은 대답이겠지. 수영은 그리 생각했다.
앞서 태진이 한 말에 저 스스로도 낯설게 느껴질 만큼 두근거리지만, 그 티를 내지 않으면서 말은 잘했다며.
“어…… 그래.”
제가 되레 그를 당황케 했음은 생각지도 못한 채였다.* * *
쏴아아.
찬 바람이 매섭게 몰아쳤다. 서울을 가로지르는 강과는 차원이 다른 추위였다.
“와!”
하지만 수영은 이에 아랑곳 않고 어두워서 잘 보이지도 않는 풍경에 심취해 있었다. 지금은 앉아서 구경하는 게 고작인데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은 듯했다.
“오길 잘했지?”
한껏 소리를 지르고 나니 수진이 그녀를 툭 치며 물었다.
“흠흠.”
그럴 줄 알았어, 라는 듯한 그녀의 말에 수영은 급히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뭐, 나쁘진 않은데…….”
“그렇지? 그러니까 그냥 가자 하면 와. 왜 튕기고 그러냐?”
“튕기긴 누가 튕겼다고 그래? 그냥 이렇게 늦은 시간에 간다는 게 이상해서 물어본 거지. 집은 어떻게 돌아가나 싶어서.”
“돌아가긴 뭘 돌아가. 내일 주말이겠다, 방이야 구하면 되지.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그건 그렇지…… 만. 아, 어쨌든 다음부턴 나한테 미리 얘기 좀 하라고.”
“네네. 알았다고.”
“아, 언니!”
전혀 듣는 체도 안 한다. 표정과 행동과 말투에서 느껴졌다. 제 앞에서 귀를 안 파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 만큼.
“됐다, 됐어.”
수영은 차라리 말을 말자며 다시금 고개를 돌려 바다만 주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