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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없이 정면만을 응시한 채 10여 분. 그녀의 집 앞에 다다른 차가 멈추었다.
수영이 안전벨트를 풀었다.
“그만 갈게.”
“데려다줄게.”
“됐어. 아침부터 여태까지 쉬지도 못했잖아.”
“그럼 뽀뽀.”
“어?”
이렇게 훅?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으나 태진은 말을 번복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미 입술은 저를 마중 나온 후였고, 눈은 게슴츠레 감은 상태였다.
“나, 참…….”
수영이 어이없어 헛웃음을 친 뒤, 짧게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쪽, 하는 소리가 둘 사이로 나지막이 흘렀다.
급속도로 조용해진 차 내부에 괜스레 두근거렸다. 수영은 애써 태연한 척 목을 가다듬었다.
“됐지? 간다.”
“어디 가. 아직 안 끝났어.”
조명도 그다지 밝지 않겠다, 어두운 틈을 타 붉어진 낯을 숨길 셈이었다.
재빨리 밖으로 나가 열을 한 김 식힌 뒤 집으로 가서 그와 있던 일들을 마저 곱씹을 셈이었는데.
태진은 그런 것조차 제 앞에서 하지 않음이 아쉬운 듯 그녀를 붙잡았다.
둘 사이를 확실하게 가로막은 콘솔박스가 애석했다.
수영이 반응할 새도 없이 그가 단번에 집어삼킨 입술은 본드라도 붙여 놓은 것처럼 서로에게 엉겨 붙었다.
뺨을 감싼 손끝이 점차 뜨거워졌고, 피부로 느낀 그의 체온이 곧이곧대로 전달되었다.
수영은 몸 전체에 퍼지는 간지러움에 부러 힘을 주었다.
“힘 빼.”
그러자 태진이 슬그머니 그녀에게서 멀어지더니 실소를 터트렸다.
“안 잡아먹으니까.”
“뭐……. 야!”
“아.”
“자, 잡아먹기는!”
수영이 그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밀어 내며 침도 제대로 삼키지 못해 잠긴 목소리로 버럭 소리쳤다.
“얘가 진짜 못 하는 말이 없어! 시도 때도 없이……!”
“시도 때도 없이라니. 난 그냥 네가 괜히 긴장한 것 같아서 한 소린데.”
“…….”
“너야말로 무슨 생각 하냐.”
정말 별 뜻 없는 ‘안 잡아먹는다’였다. 누구나 가볍게 말할 수 있는 그런 의미의.
한데 수영에게는 그마저도 남다른 의미로 다가왔던 모양이었다.
뒤늦게 그의 의도 없는 의도를 알아챈 수영은 상체를 급하게 뒤로 뺐다.
태진이 눈을 가늘게 떴고, 수영은 억지로 침을 삼켰다.
“왜…… 왜 그렇게 봐.”
“그렇게 하고 싶으면 그냥 대놓고 말하지 그랬어.”
“뭐를……!”
“난 여기서 하는 것도 괜찮아.”
“…….”
“미…… 미…….”
미친놈! 수영은 목 끝까지 차오른 욕지거리를 뱉고 싶었다. 그런데 그럴 겨를도 없이 태진이 상체를 점점 제게로 기울였다.
그는 히죽 웃으며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뒷자리는 더 넓은데.”
달칵.
“간다.”
말을 말아야지. 또 진태진 장난에 넘어갔다.
수영은 낯에 무표정을 그리곤 문을 열어젖혔다.
“가져가.”
태진은 그녀의 반응이 익숙하다는 듯 여전한 웃음을 유지한 채 뒷좌석에 놓았던 쇼핑백 더미를 건네었다.
“…….”
“받아도 된다니까.”
“그렇지만…….”
“얼른. 네가 이거 살 줄 몰라서 받는 것도 아니잖아. 순수한 호의야. 아버지가 너 마음에 들어서 주는 호의.”
마지막까지도 망설이는 수영에게 태진은 전보다 더 단호하게 말했다.
그제야 그녀도 더는 거절할 방도가 없다는 듯 받아들었다.
“그래. 감사하다고 전해 드려.”
“이미 받은 것만으로도 좋아하실 건데 뭐.”
“그래도.”
“알았어.”
“그럼…… 갈게.”
양손이 무거웠다. 한두 개 수준이 아닌지라 열 손가락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해맑게 웃으며 제게 손을 흔드는 태진을 뒤로하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후우…….”
고개를 돌려 거울을 바라보자 새빨갛게 잘 익은 홍당무가 목에 힘을 주고 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진짜 이게 무슨 일이야…….’
지금까지 살면서 이 정도로 어지러웠던 하루가 또 있었을까. 감히 장담컨대, 없었다.
‘그걸 어떻게 눈치를 못 채냐……. 최수영 이 눈치 없는 멍청아.’
알고 나서 돌이켜 보니, 진 회장은 제게 거절에 가까운 말들을 했어도 기분 나쁜 기색이 없었다. 아쉬워했을 뿐.
그래. 어느 누가 이제 막 퇴사한 사람을 불러다가 아들과 헤어지라는 이야기를 하겠는가. 그것도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까지 지어 가면서.
‘으……!’
아무리 생각해 봐도 민망해 죽겠다.
10년은 무슨, 평생 이불 차면서 두고두고 몸부림칠 급이었다.
그녀는 연달아 숨을 내쉬며 잠시나마 잊고 있던 부끄러움이 스멀스멀 올라오려는 것을 억눌렀다.
이윽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었다.
곧장 집으로 향한 수영은 안에 들어서자마자 쇼핑백을 아래로 떨구었다.
“나 왔어.”
“왔냐?”
그와 동시에 수진이 방문을 열어 빼꼼 고개만 내밀었다.
“어? 뭐야.”
오늘 오전까지만 해도 돌려줄 거라며 바리바리 집어 들던 쇼핑백을 다시 가져온 제 동생의 모습에 수진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녀는 몸을 조금 더 빼 수영에게 다가왔다.
“너 이거 안 갖다 줬어?”
“갖다 줬었지…….”
“근데? 그걸 왜 도로 가져와?”
“…….”
“설마, 진짜 태진이야?”
수진의 합리적 의심에 수영은 입에 본드를 붙인 듯 떼지 못하였다.
이걸 태진이 줬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태진의 아버지가 주셨다고 해야 하나.
누가 줬다고 해도 평범한 반응이 돌아올 것 같진 않았다.
“맞네. 맞아.”
하여 가만히 입 다물고 있으려니까 수진은 의심이 확신이 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걘 진짜 돈도 많은가 보다.”
그걸 보고서도 수영은 반응하는 대신 그저 “쉴래.” 이 한 마디만을 남긴 뒤 방으로 쏙 들어왔다.
뒤에서 들리는 의문문들은 깡그리 귓등으로 넘긴 채였다.
“후…….”
수영은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엎어졌다.
그렇게 5분 정도 침묵이 이어졌다.
퍽! 퍽퍽!
이후 꽉 쥔 주먹이 하늘 높이 솟더니 침대를 마구 내리치기 시작했다.
파묻은 얼굴빛을 다 알 수는 없지만, 머리카락 사이로 보인 목뒤가 새빨갰다.
손가락이 자꾸만 오그라드는지 어쩔 줄을 몰라 꼼지락거렸고, 입에선 탄식과 비명이 번갈아 가며 쏟아졌다.
“으으으으!”

* * *

한 달 남짓의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이게 뭐라고 떨리냐.’
회사 생활이 처음도 아니고, 이 회사에 처음 보는 얼굴들만 있는 것도 아닐 텐데.
뮤즈넷 사무실 앞. 수영이 깊게 심호흡했다.
“수영 씨!”
그때, 회사 건물에서 나온 선우가 수영을 부르며 다가왔다.
“일찍 오셨네요?”
“네. 일찍 와야죠.”
“하하. 잘하셨어요. 안 그래도 직원들이 다들 수영 씨 기다리고 있어서요.”
“저를요?”
“네.”
깜박깜박. 영문을 몰라 눈만 깜박이며 묻자 선우가 냉큼 대답했다.
“새로 오실 분이 엄청난 능력자라고 소문이 다 났거든요. 아주 어렵게 강성그룹에서 스카우트했다고요.”
“아……. 에이. 아니에요.”
“진짜예요.”
그녀의 손사래 치며 하는 부정에도 선우는 문을 열어 주며 싱긋 웃었다.
“다들 새로 온 사람이 수영 씨라고 기대하고 있어요.”
“감…… 사합니다.”
“사실인데요, 뭐. 아, 이쪽입니다.”
수영이 꾸벅, 고개를 숙이며 들어섰다.
선우는 가볍게 대답하곤 그녀를 안내했고, 둘은 즉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올라가자마자 인사부터 드리는 게 낫겠어요. 사장님이 아직 출근을 안 하셔서.”
“네. 좋아요.”
띠링!
아직 엘리베이터 안이었다.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에서 진동과 함께 알림이 울리자 수영이 휴대폰을 살폈다.

[도착했어?]

태진이었다.
아침부터 데려다주겠다는 그를 말리느라 엄청 고생했다.
결국 태진은 적잖이 아쉬워하는 티를 내며 한 걸음 물러섰고, 수영은 혼자 출근할 수 있었다.
한데 아직까지도 그는 섭섭한 모양이었다.
도착할 시간에 정확하게 보낸 태진의 메시지를 보니 눈앞에 그가 아른거리는 듯했다.
수영이 픽 웃음을 터트렸다.

[응 방금. 올라가자마자 직원들이랑 인사할 것 같아.]
[너라면 거기서도 잘할 거야. 끝나고 데이트할까? 이따가 데리러 갈게.]
[그래! 좋아.]

“수영 씨 이직하는 바람에 본부장님이 아쉬워했겠네요.”
“네?”
선우의 물음에 수영이 되묻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요.”
실은 아주 많이. 저와 이야기를 하다가도 서운함에 몸을 축 늘이며 낑낑대질 않나, 칭얼거리기도 했다.
귀와 꼬리만 없다 뿐이지, 영락없는 강아지였다.
수영은 머릿속을 스쳐 간 그간 태진의 모습에 헤헤, 실없는 웃음을 내뱉었다.
“그래도 다행이네요. 두 분 회사가 달라도 완전히 멀어질 일은 없잖아요.”
“……제가 본부장님이랑 사귄다는 이야기를 했던가요?”
“하얀이한테 들었어요.”
“아. 하얀이.”
맞다. 그랬지.
‘깜박 잊고 있었네.’
수영이 놀라는 기색을 거두고 급히 수긍했다.
“네. 굳이 하얀이한테 듣지 않아도 그럴 것 같았지만요.”
“그런가요? 저는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하하하. 원래 당사자들은 모른다잖아요. 본부장님이 수영 씨 좋아하는 거 엄청 티 났는걸요.”
“아……. 큼!”
선우의 말투는 더할 나위 없이 가벼웠다. 마치 ‘점심 뭐 먹을까요?’ 하고 묻는 정도의 무게.
하나 수영은 마냥 태연하게 있지를 못하고 헛기침 소리를 내었다.
“도착했네요. 내리시죠.”
“넵.”
다행이다. 엘리베이터가 눈치가 있구나.
그녀는 때를 맞춘 엘리베이터에 안도하며 그를 따라 내렸다.

밀당하는 사이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