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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진이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몰라서 물어요? 아버지가 얘한테 헤어지라고 했다면서.”
“뭐?”
“헤어질 생각, 눈곱만큼도 없다고 직접 얘기하러 왔습니다. 그러니까 다시는 따로 불러서 그런 짓 하지 말라고요.”
“뭐야?”
나름 단호히 말한 거였다. 실제로도 그의 말이 이어질수록 분위기가 가라앉기도 했고.
그런데 이상했다. 그의 말에 화를 내거나 서운해하거나 하는 반응이 돌아와야 하는데 이상하리만치 진 회장은 아리송해하는 눈치였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내가 뭐 하러 너희를 갈라놔? 붙여 놔도 시원찮을 판에.”
“……네?”
“뭔가 오해가 있었던 것 같구먼.”
쯧쯧. 진 회장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얼굴로 혀를 찼다. 그 모습을 본 태진이 답답함에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제대로 알아듣게 설명해 봐요, 아버지. 대체 무슨 일을 벌인 건데요?”
“이놈의 자식이 말버릇하고는! 아, 저 애가 네 그 더러운 성질머리 고쳐 준 거 아니냐. 그래서 좀 딱 붙어 있게 해 보려고 수 좀 써 봤다.”
눈을 똑바로 뜨고 추궁하는 제 아들이 한참이나 못마땅해 보이는 와중에도 진 회장의 대답은 이어졌다.
다만 그 대답이, 되레 이 둘을 당황케 한다는 것까지는 염두에 두지 못한 듯했다.
마음처럼 되지 않는 상황에 영 기분이 좋지 못한 진 회장이 고개를 홱 돌려 버리자 세 명 사이에서 눈치를 보고 있던 남자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회장님께서 최수영 씨를 마음에 들어 하셔서, 두 분이 잘되셨으면 하는 마음에 따로 부르셨습니다. 근데 그 당시에 최수영 씨가 교제 중인 분이 있다고 하셔서……. 그때 제가 더 알아봤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제 불찰입니다.”
남자는 보는 사람이 다 미안할 정도로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
그의 말을 잠자코 듣던 태진은 수영을 이끌어 함께 소파에 앉으며 진 회장을 마주했다.
“헤어지라고 했다면서요?”
“아, 그야 다른 놈인 줄 알고 그런 거지.”
“그럼…… 그, 뭐, 선물. 선물은요.”
“그건…….”
“혹시나 선물을 받으시고 마음을 돌리지 않을까 해서…….”
“거 글쎄 입 좀 다물지 그래. 굳이 그런 말까지 해서 사람을 민망하게 하나?”
“죄송합니다, 회장님.”
대답을 꺼리며 말끝을 흐리던 진 회장은 불쑥 치고 들어온 남자를 타박했다. 남자는 거듭 고개를 숙였고, 그 뒤로는 정적만이 흘렀다.
‘세상에!’
수영은 비명이 터지려는 것을 막으려 숨을 들이켰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게 느껴져 더더욱 부끄러워졌다. 그녀는 당장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 지금까지 뭘 한 거야……?’
처음에 제가 너무 긴장했던 모양이었다.
진 회장은 말 그대로 수영에게 ‘누군가’와 교제하고 있는지를 물었던 것이다.
다만, 그 ‘누군가’로 태진을 지칭하지 않았을 뿐.
헤어질 생각이 없냐고 물은 건 그 ‘다른 사람’과 헤어지고 진태진과 만나 볼 생각이 없냐는 거였고.
선물은 물론, 오늘 갑자기 찾아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지 바꾸어 준다는 것도 순수하게 말 그대로의 의미였다는 뜻이다.
어떻게든 그녀의 마음이 태진에게로 향했으면 싶어서.
‘미치겠다, 진짜.’
그런 것도 모르고 괜히 겁먹어서는.
‘어쩜 이렇게 제대로 어긋날 수가 있지?’
먼저 얘기할걸. 그동안 단 한 번이라도 ‘진태진’을 입에 담았다면 애초에 생기지도 않았을 해프닝이다.
수영은 너무도 쪽팔렸다. 단순히 부끄러운 수준이 아니라 이건 한참 더한 수치심이었다.
절로 떨구어지는 고개를 푹 숙이고 태진의 팔꿈치를 툭 건드렸다.
제발 어떻게든 이 상황을 무마해 줬으면. 도저히 하얗게 질려 버린 그녀의 머리로는 수습할 방도가 생각나지 않았다.
“큽…….”
하지만 그녀가 보낸 신호가 미처 그에겐 닿지 못한 모양이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고개는 숙이고 있는데 어깨가 들썩이는 게 보였다.
이따금 억지로 숨을 누르는 듯한 소리까지 들리는 것으로 보아, 그는 애써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는 모양이었다.
‘웃어?’
누구는 쪽팔려서 고개도 못 들고 있는데!
태진의 웃음이 얄미워 수영은 조금 더 세게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윽…….”
그는 곧장 반응하며 짤막하게 신음을 흘렸다.
“크흠!”
하나 다행히 둘의 비밀스러운 행각을 보지는 못했는지 진 회장이 헛기침 소리를 내며 말했다.
“어쨌든, 둘이 잘 만나고 있다는 거지?”
“네에…….”
수영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제가 오해를…….”
“아이고,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지.”
민망함에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수영에 반해 진 회장은 이미 오해 따위는 머릿속에서 지워 버린 듯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우리 아들놈 사람 만들어 준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이렇게 둘이 잘 만나 주기까지 하니 얼마나 좋은지 몰라.”
“하하……. 네에…….”
“저놈이 사람답지 못하면 나한테 말해. 교육을 다시 해서 보낼 테니까. 응?”
사람을 만들었다니.
‘대체 전에는 어땠길래.’
그녀가 아는 태진이라곤 그저 고등학생 때의 모습이 전부인데.
수영이 대답은 하지 못한 채 침을 꿀꺽 삼켰다.
가만히 듣던 태진이 눈썹을 일그러트리며 입을 열었다.
“당사자 앞에서 말을 막 하시네요, 아버지.”
10여 년 전 수영이 좋아서 쫓아다닌 것도 맞다.
매일 수영을 볼 수 있다는 생각 하나로 학교도 꼬박꼬박 다닌 것 또한, 맞다.
하지만 그걸 수영의 앞에서 제 아비 입을 통해 들려주고 싶지는 않았다. 하여 나름대로 기분 나쁨을 표현한 건데 진 회장은 눈 한 번을 깜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잔뜩 서운한 티를 내기 시작했다.
“그래. 너 말 잘했다. 아니, 여자 친구가 생겼으면 아비한테 바로바로 보고를 해야 될 거 아니야. 내가 네 뒤꽁무니 조사까지 해야겠어?”
“그렇다고 사람을 따로 불러서 얘기까지 해요? 그냥 저한테 물어보셨으면 됐잖아요.”
“네가 어디 제대로 대답해 줄 놈이야? 내가 너 한국으로 갑자기 들어온 이유도 네 입으로 못 들은 사람이야. 알아?”
“…….”
“그나마 10년 동안 말썽 안 피웠으니까 들어줬지. 아니었으면 너 어림도 없었어, 이놈아!”
꼬박꼬박 돌아오는 태진의 대꾸에 진 회장이 언성을 높였다.
그때, 수영이 슬쩍 태진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그의 고개가 돌아가 마주하자 그녀가 콧등을 찡그렸다.
“그냥 얌전히 있어.”
“내가 무…….”
‘무슨 잘못이 있다고?’라며 따지고 싶어 하는 표정이었다. 차마 목소리는 크게 내지 못하니 억울함 가득한 낯으로 반박하려 했다.
그러나 수영을 이길 수는 없는지 끝내 입술을 딱 붙이곤 다시금 진 회장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알았어?”
진 회장은 여전히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태진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고, 그제야 만족한 듯 사그라들었다.

* * *

“…….”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 수영이 감당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뒷좌석을 자꾸만 흘겨보았다.
그렇게 거절했던 선물 더미를 기어이 받아 버렸다.
한사코 사양했지만 어차피 그녀에게 줄 거였다며 껄껄 웃던 진 회장과 제발 받아 달라고 말하던 남자 비서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수영은 검지로 이마를 긁적이면서도 자꾸만 돌아가는 시선을 어쩌지 못하였다.
그러자 태진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부담돼?”
“당연하지. 저런 걸 아무렇지 않게 받을 사람이 어디 있냐?”
“그래도 받는 게 좋아. 아버진 네가 받는 걸 더 좋아하실 거야. 처음부터 너 주려고 하신 거라서 네가 안 받으면 가질 사람도 없고.”
“…….”
“우리 아버진 한 번 결정한 건 절대 안 바꾸시거든.”
“……그건 너랑 좀 닮은 것 같네.”
수영은 픽 웃었다.
“근데 있잖아.”
“응?”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
“너 중학생 땐 좀 막 나갔어?”
“……뭐?”
최대한 조심스럽게 묻는다고 물은 거였다. 얼마나 엉망진창이었으면 그의 아버지가 그런 소리까지 하실까. 수영의 머릿속에는 상상의 나래가 펼쳐져 있었다.
태진은 그녀의 물음에 얼빠진 표정과 함께 미간을 좁혔다.
“넌 내가 막 나갔을 것처럼 보이냐?”
“조금?”
“…….”
“아니 뭐, 꼭 그렇게 생겼다는 건 아니고.”
농담 한 번 더 했다간 진짜 삐치게 생겼다.
그녀의 대답을 생각지도 못했던 듯 크게 뜬 눈으로 서운한 티를 내는데, 와중에 눈동자가 빛에 발해 반짝거렸다.
수영은 급히 말을 번복했다.
“솔직히 너 고등학생 때도 되게 말 많았잖아. 잘생겼는데 공부도 잘해, 놀기까지 잘한다고.”
“그건…… 내가 워낙 잘났던 거고.”
‘단순하기는.’
그는 꽤나 단순했다. 서운한 낯은 어디 가고 그새 좋아서는 입꼬리가 실룩인다.
그녀가 픽 웃으며 쳐다보자 태진이 시치미를 뚝 떼곤 말을 이었다.
“막 나간 적 없어. 그냥 좀 엄하니까 그땐 그게 싫어서 종종 학교를 안 간 것뿐이지.”
그건 막 나간 게 아닌가?
단 한 번도 일탈이라는 것을 해 본 적이 없는 수영의 눈이 순간적으로 빠르게 깜박거렸다.
그럼에도 태진은 자신이 무얼 잘못 말했는지 인지하지 못한 탓에 정적이 흘렀고, 그것은 한참 후에서나 깨졌다.
“고등학교 땐 한 번도 빠진 적 없었잖아?”
“그야 당연히…… 너 보려고 그랬지.”
그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아버지도 그랬잖아. 네가 나 사람 만들었다고.”
“그건…….”
당연히 수영이 듣기 좋도록 과장해서 하신 소리인 줄 알았는데.
“틀린 말 아니야. 너 아니었으면 내가 굳이 거기로 학교를 옮길 이유도 없었지.”
지난날을 회상하면서도 웃음기 하나 없는 어조 덕에 진심임을 알았다.
“…….”
수영은 그가 이따금 하는 예상 밖의 고백에 당황했다.
그리고 그런 옛일에 대한 고백들을 들을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시큰거리다 이내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멋쩍게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밀당하는 사이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