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이라니까요.”
“…….”
시선의 끝자락, 그녀의 눈에 선명히 비친 건 다름 아닌 태진이었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타이밍이었다.
지금 왜 하필 그가 보였을까.
그는 왜 저기에 있는 걸까.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생각해 보려 해도 그게 마음처럼 되기란 쉽지 않았다.
“짜증 나…….”
수영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 댔다.
‘누구는 가만히 있다가도 욕을 먹고 스트레스를 받는데.’
다른 누구는 저렇게 즐거울 수가 있나.
그것도 자기가 저질러 놓은 일에 아무렇지도 않게 제게 욕을 한 당사자들이랑.
‘내가 누구 때문에 이러고 있는데!’
맨날 다 아는 것처럼 굴어 놓고, 정작 저에 대해 아는 게 뭐가 있다고.
‘남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조차 관심이 없으니 저렇게 시시덕거리고 있는 거겠지.’
“하…….”
진태진은 10여 년 전에도, 지금도 한결같이 저를 궁지에 몰아 놓고 자기는 혼자 빠져나가는 놈이었다.
아는 사이로 남아서는 안 됐었다.
피했어야 했고, 어떻게든 엮이지 말았어야 할 사이였다.
그런 그를 믿지 않겠다고 그렇게 다짐해 놓고 믿을 뻔한 제 잘못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럼 처음부터 잘해 주는 척이라도 하지 말던가.’
그가 처음 와서 보인 언행을 배신감의 이유로 삼는 제 스스로가 쪽팔렸다.
‘차라리 진심이었으면 진심이었다고?’
웃기지도 않는다.
“나쁜 새끼.”
수영은 숨길 수 없는 화에 기어이 입 밖으로 욕을 읊조렸다.* * *
“수영 씨.”
그로부터 얼마나 더 시간이 지났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즈음의 저녁이었다.
수영의 회사 근처도 선우의 회사 근처도 아닌, 결코 각자의 회사 어느 누구와도 접점이 없을 법한 곳.
그러한 곳에서 선우가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이쪽이에요.”
그를 발견한 수영은 묵례로 인사를 대신한 후 그에게 다가갔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네, 뭐…….”
“아. ……하하. 미안해요. 이건 좀 아닌가.”
잘 지냈냐고 하기에는 애매한, 썩 좋아 보이지 않는 낯빛에 선우가 멋쩍게 웃었다.
볼을 긁적이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는 게 수영의 눈치를 보는 듯했다.
그걸 알아챈 그녀는 맞은편에 앉으며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저 아무렇지도 않아요.”
“아……. 음. 뭐 마실래요? 원래는 저녁 사 드리려고 했는데.”
“괜찮아요. 물 마실게요.”
“기다리세요. 달달한 거라도 사 올게요.”
“아, 저기, 괜찮은…… 데. 이미 가셨네.”
쩝. 의견을 묵살당한 수영은 입맛 다시는 시늉을 하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하려고…….’
일은 다행히 순조롭게 진행 중이라 하반기까지 직접적인 만남은 없을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일까. 갑자기 할 말이 있다며 선우 쪽에서 먼저 연락을 해 왔다.
강요는 아닌데 왠지 선우를 보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은.
“수영 씨 덕분에 이번 프로젝트, 정말 수월해졌어요.”
얼마나 생각을 했을까. 사색에 잠겨 있던 수영을 일깨우듯 선우가 음료를 건네며 말했다.
“저희 팀에서도 수영 씨 얘기 많이 해요. 되게 유능하시다고.”
“그…… 런가요? 아, 감사합니다.”
하도 오랜만에 들은 칭찬이라 그런가. 몸이 간질거리는 기분이었다.
“그럼요.”
그런데도 선우는 제 말을 번복할 생각이 없는지 한결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
수영은 낯간지러운 말에 괜스레 목덜미를 벅벅 긁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근데 오늘 왜 보자고 하신 거예요?”
“아, 그게.”
그러자 선우가 뒤늦게 제 용건이 생각났는지 “음…….” 하고 말끝을 흐리다 말고 대답해 주었다.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될지 모르겠네요.”
“무슨…….”
“요즘 회사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시는 것 같아서요.”
“무슨……. 아.”
뜬금없는 그의 말에 이해가 되지 않는단 표정을 짓던 수영이 무언가를 깨달은 듯 탄식을 내뱉었다.
선우가 재차 입을 열었다.
“아, 그, 별다른 건 아니고요. 그냥 하얀이한테 이야기하셨던 걸 들었거든요.”
“…….”
“그리고 저도 수영 씨 사정, 종종 수영 씨 입으로 들어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부분이고요.”
“하하…….”
“그래서 말인데요, 수영 씨.”
무어라 답할지를 몰라 마냥 웃고만 있자 선우의 말이 이어졌다.
“혹시, 우리 회사로 이직할 생각 없어요?”
“이직…… 요?”
이직? 갑자기?
생각을 안 해 본 것도 아니고, 오히려 요즘 진지하게 고려하던 문제였다.
그런데 이렇게 불쑥 이직을 권유받을 줄은 몰랐다.
“네.”
하여 당혹감에 되물은 수영과 달리 선우는 이미 여러 차례 고민을 거친 듯싶었다.
“사실 이건…… 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부분이고, 꼭 한번 여쭤보고 싶었거든요. 그동안은 수영 씨가 지금 회사에 만족해하시는 것 같아서 꺼낼 생각도 못 했지만요.”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사적인 감정을 떠나서, 저는 수영 씨 같은 능력 있는 사람 찾기 힘들다고 생각해요.”
“아…….”
“굳이 거기서 힘들게 스트레스 받으면서 일할 필요 없다고 봐요. 아실지 모르겠지만 우리 회사, 강성만큼은 아니더라도 꽤 잘나가요.”
“아, 알죠. 당연히…….”
이쪽 업계에서 선우의 회사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터.
웬만한 대기업보다 더 잘나가는 중견 기업이라며 소문이 자자한 곳이다.
그걸 몰라서 머뭇거리는 게 아니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거지.
“그냥 좀, 갑작스러워서요.”
하루아침에 결정하기에는 이직이란 생각보다 복잡한 문제였으니까.
그런 그녀의 속을 아는 걸까. 선우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이어 했다.
“수영 씨 정도면 연봉도 원하는 대로 맞춰 줄 거예요. 이건 비밀인데, 요즘 저희 이사님이 수영 씨 궁금해하시거든요.”
“저를요? 왜요?”
“저희 팀이 하도 이사님 계실 때 수영 씨 이야기를 많이 했더니……. 하하하.”
“…….”
“새로 사업 하나를 추진하려는데, 사람이 필요한가 봐요. 잘하는 사람이요. 수영 씨처럼.”
그는 수영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이었다.
거슬리는 것 하나 없이 그가 하는 말들이 전부 그녀의 마음을 흔들었다.
수영이 입술을 꾹 다물곤 힘주어 짓이겼다.
하얗게 질려 눌린 입술은 한참 후에야 떨어졌다.
“……조금만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네. 당연하죠. 이건 어디까지나 제안이고, 결정은 수영 씨가 하시는 겁니다. 그 부분은 누구도 터치할 수 없으니까요.”
“…….”
“전 그저 수영 씨가 고생도 하고 있다고 들었고, 때마침 우리도 수영 씨가 필요하니까 한 말이에요. 어떤 선택을 하든 응원할게요. 하얀이 친구분이시니까.”
“……네.”
끝까지 나긋한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수영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선우가 빙긋 웃음을 짓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만 돌아갈까요? 바쁘신데 시간 내 줘서 고마워요.”
“아니에요.”
그녀도 그를 따라 일어서 카페를 빠져나왔다.
수영이 먼저 나가게끔 배려한 선우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거듭 말을 걸었다.
“집까지 어떻게 가세요? 가는 길에 태워 드릴까요?”
“지하철 타면 금방이라서요. 그냥 갈게요.”
“음……. 그래요, 그럼.”
“들어가세요.”
“다음에 봬요.”
간단한 인사가 오간 뒤, 선우가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
애써 웃음을 유지하고 있던 수영은 그가 가고 나서야 원래의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하아.”
편히 지은 표정 덕분에 한숨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집에 가자.’
수영은 선우가 간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터벅터벅. 힘없이 움직이는 다리가 당장이라도 풀릴 지경이었다.
〈우리 회사로 이직할 생각 없어요?〉
조금도, 눈곱만큼도 생각 못 했다. 그런 말을 들을 거라고는.
‘그래. 이직, 좋긴 하지.’
돈도 돈이고, 욕 안 먹어도 되니까.
무엇보다 진태진과 더는 엮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게 좋았다.
“…….”
우뚝. 곧잘 가던 수영의 발이 멈추었다.
태진이 온 지 어언 6개월째.
지금에서야 문득 지난날이 머릿속을 스쳤다.
‘……근데 왜 좋았던 일이 하나도 없는 것 같냐.’
분명 마냥 안 좋은 일들만 있었던 건 아니었을 텐데.
정말로 그와 있었던 일들이 다 괴롭기만 했던 건지, 아니면 그저 지금 제가 좋았던 일이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힘든 건지.
‘아무렴 어때.’
다 부질없는 짓이다.
애를 써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게 현실인 만큼, 노력했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래 봤자 머릿속을 스쳐 가는 건 며칠 전 태진의 모습이었다.
시시덕거리는 꼴로 그들과 어울리고 있던 진태진의 모습.
〈오랜만이다?〉
“…….”
그래. 결국은 제 입맛대로의 반가움이었던 거겠지.
〈이 정도면 운명 아냐?〉
운명은 개뿔. 악연이다.
〈이제 너 못 가. 내가 안 놔줄 거거든.〉
갈 거다. 영영, 진태진 눈에 안 띄는 곳으로.
〈10년?〉
10년이나 지났으니까.
10년 만에 만났으니까.
그러니까 이해해 주겠지, 진태진도.
〈그게 뭐 어쨌는데. 나는 너 잊은 적 없었어.〉
〈그럼 너는. 왜 나 안 잊었는데.〉
“…….”
‘그러게.’
왜 안 잊었을까. 더는 엮이기 싫은 너를. 네가 뭐라고.
“내 인생에 너만큼 싫은 애가 어디 있다고.”
수영은 결심에 찬 낯으로 발걸음을 마저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