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긴장하는지 모를 일이지만 그들은 진지했다. 수영은 물론, 이 상황의 시발점인 1팀장까지도.
이윽고 태진이 흐리던 말끝을 붙잡아 이었다.
“팀장님들끼리 가죠.”
‘뭐?’
“친목을 위해서.”
‘미친!’
친목은 얼어 죽을 친목!
수영이 일그러트린 얼굴을 펼 생각도 없이 태진을 쏘아보았다. 그럼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웃어 보였다.
“아, 그러고 보니 최 팀장님이 특히 등산을 좋아하셨던 거로 기억하는데.”
“네?”
“꼭 함께 가야겠네요. 같이 산 오르면서 건강해지면 좋죠.”
“아니…….”
말하기도 전에 공표해 버린 탓에 반박은커녕 입 한 번을 제대로 벙긋거리지 못했다.
이미 직원들은 제가 등산을 좋아하는 게 신기하다는 눈빛들이었고, 그 와중에 태진은 저를 보면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팀장님들과 친목을 다질 좋은 기회이기도 하고.”
그러잖아도 얄미워서 팔뚝이라도 때려 주고 싶은데 애써 웃음을 참는 게 보이니 더 짜증이 솟구쳤다.
“아…….”
하나 그녀가 터뜨릴 수 있는 건 외마디 탄식뿐이었다.
‘말도 안 돼.’
등산이라니. 학교 다닐 때 등산 가기 싫어 빼는 태진의 옆에 있던 게 자신이었다.
그만큼 등산은 극도로 혐오했는데 태진의 말 한마디에 등산이라니?
‘진태진 이……! 이……!’
수영이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할 욕들을 속으로나마 외쳐 댔다. 한숨은 말할 것도 없이 계속 흘러나왔다.
수영은 곧 체념하고 머리를 아래로 푹 떨구었다.
‘그래……. 누굴 탓하냐.’
진태진이 진태진인 거 모르고 웃어 댄 저 자신을 탓해야지.
한 마디를 하면 열 마디로 갚아 주는 놈인 것을. 그래서 어릴 때도 그와 함께 있을 때마다 늘 짜증이 가득했던 것을.
그 시절을 기억하지 못하고 당한 제가 멍청했다.
“최 팀장…….”
수영이 자책하며 몸을 축 늘이고 있노라니 주희가 슬그머니 팔을 뻗어 수영의 어깨를 토닥였다.
미처 다 하지 못한 말과 표정에는 안쓰러움이 가득했다.
“힘내.”
그러나 대신 가 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최 팀장, 등산 좋아했어? 아이, 말을 하지! 같은 팀이 아닌 게 아쉽네! 앞으로 자주 등산하러 가자고. 응?”
뒤통수 너머에서는 1팀장의 발음이 그리 좋지 못한 외침이 들려왔다.
“하하…….”
수영이 급기야 넋 나간 웃음소리를 내었다.* * *
다시, 주말인 오늘.
“젠장…….”
수영이 눈을 가늘게 뜨고 중얼거렸다. 차라리 그가 제일 먼저 왔으면.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에선 왜 그랬냐며 따져 물을 수 없으니 둘이 있을 때 따져야 했다.
며칠 내내 보고할 일도 없어 단둘이 있던 적도 없었다.
〈본부장님.〉
〈아, 최 팀장. 이따가 이야기해요. 바쁜 일이 있어서요.〉
〈…….〉
그런데 이번 주는 희한하게 꼭 ‘보고서’가 없다는 이유가 아니더라도 저를 피하는 듯했다.
〈본부장님?〉
말을 걸어도 바쁘다고 가 버리질 않나, 메신저는 아예 답도 없었다.
제가 따질 것을 알았는지 그렇게 피해 대는 통에 결국 그녀는 태진에게 고작 한 번을 묻지 못하고 주말을 맞이했다.
“그나저나 왜 아무도 안 와?”
하여 얼굴을 좀 봐야겠는데 무슨 일인지 익숙한 얼굴들은 코빼기도 보이질 않았다.
시계를 보니 약속에 가까운 시각. 수영이 손목시계와 제 주변을 바꾸어 가며 쳐다보았다.
“최수영 팀장님.”
그때 마침, 어느샌가 나타난 태진이 밝게 웃으며 걸어왔다. 동시에 수영이 인상을 찡그렸다.
“왜 그렇게 봐요?”
그러자 그가 순수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요?”
“……아뇨. 아무것도. 눈이 좀 부셔서요.”
“내가요?”
“해요, 해. 정말 안타깝게도 해가 본부장님 뒤에 떠 있네요.”
‘내가요?’는 무슨. 자신감도 너무 넘치면 병이랬다.
당치도 않다는 듯 수영이 콧등에 주름을 잡자 태진이 실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요. 햇볕이 왼쪽에서 느껴지기는 하는데 그렇다고 해 줄게요.”
“…….”
진짜 한 마디도 안 지는 것 봐.
그의 능청스러운 대답에 수영이 못마땅하다는 기색을 내비쳤다.
“다른 분들은요? 아직 연락 없으세요?”
“아, 다른 분들.”
화두라도 돌리자는 생각으로 다른 두 팀의 팀장들을 언급했다.
그랬더니 어째서인지 그는 대답하기를 꺼리는 얼굴로 제 목덜미만 매만졌다.
“그게…….”
후득, 후드득!
태진이 뭐라고 말해야 할지 망설이는 찰나. 갑자기 큰 물방울이 하늘에서 떨어졌다.
거센 물줄기가 쏟아지는 건 즉시였다.
“엄마야!”
인지할 새도 없이 퍼붓는 빗물에 수영이 당황하여 급히 메고 있던 가방으로 머리를 가렸다.
펑!
그러다 앞에서 천 같은 것이 활짝 펴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얼마 안 가 제 머리 위에 들이붓던 비가 그친 게 느껴졌다.
다른 곳은 여전히 비가 쏟아졌으나 제 주변만 그치었다.
수영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자 우산을 들고 멋쩍게 서 있는 태진이 보였다.
그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안 온대. 두 분 다.”
“뭐?”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수영의 인상이 팍 찌푸려졌다.
“나한텐 그런 소리 없었는데?”
“나한텐 그러던데. 오늘 급하게 일이 생겼다고. 둘 다.”
아주 공교롭게도.
태진이 태연한 얼굴로 제 휴대폰을 들어 보였다.
두 팀장의 메시지가 짜증 날 정도로 선명했다. 덕분에 급격히 눅눅해진 날씨와 달리 그녀의 속은 바싹 말라 갔다.
‘이 인간들은 왜 나한테만 말을 안 해 줘?’
진즉 말해 줬으면 헛걸음을 할 일은 없었을 텐데.
‘으! 진짜.’
몇 번을 생각해도 화만 늘 뿐이었다.
수영이 애써 속을 다스린 뒤, 힘없이 머리를 가렸던 가방을 떨구었다.
“그럼 너는 왜 왔냐? 그냥 연락하면 되잖아.”
쓰디쓰린 속으로 눈만 흘기며 묻자 곧바로 태진이 맞받아쳤다.
“내가 이미 출발했을 때 연락이 왔거든.”
“그래서?”
“너도 이미 나왔을 것 같아서?”
“뭐?”
대답하는 태진이 눈길을 돌리자 수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거랑 무슨 상관인데?”
“너랑 단둘이 있을 좋은 기횐데 놓칠 수가 없었다는 거지.”
뭐 얼마나 대단한 변명을 늘어놓기에 제 시선까지 피하나 했더니.
평소와 다름없는 태진의 낯이 그녀를 마주했다.
때마침 사그라진 빗줄기에 힘입어 태진이 더욱더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 그래?”
수영은 곧장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대꾸하고 싶지도 않다는 얼굴로 바꾼 그녀는 그대로 몸을 틀어 우산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래. 갈게.”
“뭐? 야, 잠깐…….”
“아, 맞다. 너.”
“어? 어.”
갑자기 떠나려는 수영을 붙잡으려던 그는 그녀의 도통 종잡을 수 없는 행동에 멈칫거렸다.
그럼에도 수영은 그런 그가 조금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지 혼자 팔짱을 낀 채 따져 묻기 시작했다.
“너 회사에서 왜 나 피했냐? 내가 그렇게 말 걸지 말라고 할 때는 말 걸면서, 왜 내가 얘기 좀 하자는데 피해?”
다른 건 몰라도 이건 꼭 따져야겠다며, 벼르고 별렀다.
어디 한번 대답해 보라는 의미로 턱을 바짝 세우자 눈만 깜박이던 태진이 이내 실소를 터트렸다.
“네가 나랑 안 엮이고 싶어 하는 거 같아서.”
“그…….”
그러긴 했지.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이 이야기를 하자고 했으면 듣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 그럼 등산은!”
잠시나마 눈을 아래로 내리깔던 수영이 번뜩 떠오른 기억에 다시금 힘을 주어 그를 노려보았다.
“너 다른 사람들은 안 불러 놓고, 왜 굳이 팀장들은 부른 건데? 너도 등산 싫어하잖아!”
“그땐 네가 먼저 날 놀렸잖아.”
“…….”
“솔직히 그건 좀 약 올라서. 나도 모르게.”
너무 그럴듯했다. 그의 입에선 변명이라기엔 그럴싸한 대답이 들려왔다.
“아 씨…….”
수영은 차마 부정할 수 없는 반박에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끝만 흐렸다. 와중에 펴지 못한 인상은 그녀의 한 줌 남은 자존심이었다.
그 모습을 전부 지켜보던 태진이 작은 웃음을 내비쳤다.
“서운했나 보네.”
그러더니 슬그머니 다가와 살짝 상체를 기울여 수영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정면으로 마주한 얼굴이 살포시 눈웃음을 그려 냈다.
“네가 원하면 평생 너만 볼 자신 있는데. 나.”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에 윙윙거렸다.
일부러 다가온 게 아닌가 싶을 만큼 가까워도 너무 가까운 거리였다.
자칫하면 숨결이 닿을까 괜스레 숨을 참게 되는 탓에 수영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됐거든.”
그러면서 뱉는 말은 꿈도 꾸지 말라는 듯 한없이 단호했다.
‘내가 지금 너 때문에 또 살해당할 지경이라고.’
아직도 잊질 못한다. 회식 때 자신을 노려보던 김 대리의 눈빛을. 정말 사람 하나 가만두지 않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볼일 다 봤으니까 진짜 간다.”
“내 차 타고 가.”
“됐다니까.”
수영은 눈썹 한 번 움직이지 않은 채 그에게서 멀어졌다.
최대한 멀리, 빠르게 벗어나려 큰 보폭으로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