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윽고 태진이 대답했다.
“어, 그, 그냥 지나가다가 봤는데 네가 보이길래.”
“뭔 소리야. 그걸 물어본 게 아니잖아. 얘가 이상한 소리 하네, 자꾸. 진짜 술주정하는 거 아니야?”
“술은. 나 오늘 야근했다?”
“아. 그러셔?”
수영은 정말 조금도 궁금하지 않다는 어조였다.
눈을 가늘게 뜨곤 상종하기 싫다는 듯 걸음을 옮겼다.
평소의 태진이라면 서운할 법도 했지만 당장은 그럴 정신도 없는지 그녀를 따라 걸으며 화두를 돌렸다.
“근데, 아까 그 남…… 아니, 이선우 과장님은 네 친구 남자 친구, 인 거지?”
“네가 언제부터 과장님이 과장님이었냐. 맨날 이름만 부를 땐 언제고.”
이선우 아니면 그 사람, 그 남자.
선우 앞을 제외하곤 한 번을 제대로 부른 적 없으면서. 진짜 약을 먹었나.
수영은 그가 너무도 이상했다.
“내가 그랬냐? 기억이 잘…… 안 나네.”
한데 그걸 따지고 들기엔 귀찮았다. 그 정도로 못마땅한 행동도 아니었고.
수영은 말 대신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봐 준 뒤 대꾸했다.
“내 대학교 친구 남친이더라고. 나도 뮤즈넷 가서 알았어. 먼저 아는 척하시더라. 하얀이한테 나 여기 다니는 거 들었다고.”
“……둘이 친해?”
“누구랑. 하얀이랑? 야, 당연히 친하지. 그래서 가끔 둘이 데이트한다고 하면 하얀이한테 식당도 추천해 주고 그랬는데.”
“아.”
태진이 무언가 깨달은 듯 외마디 탄식을 내뱉었다.
지금껏 알 수 없었던 언행들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어제 알려 준 거기, 괜찮던데요?〉
주말에 주고받았던 것 같은 연락은 선우가 아닌 제 친구와 한 거였다.
선우가 아닌 제 친구를 위해서.
그래. 확실히 수영은 선우에게 일말의 관심도 없어 보이기는 했다.
‘나도 참.’
다 바보 같은 망상이었다는 걸 깨달은 태진의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갑자기 왜 웃어, 무섭게.”
그런 그를 고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을 리 없는 수영이 상체를 뒤로 빼었다.
“아니 그냥. 좋아서 웃지.”
그러나 태진의 입은 더 헤벌쭉 벌어질 뿐이었다.
“이 시간에 우연히 너랑 마주치니까 기분이 좋네.”
“…….”
“벌써 집에 가게?”
“가야지. 볼일도 다 끝났는데.”
“내가 차로 데려다줄…….”
“미안한데, 이 횡단보도만 건너면 아파트 입구거든?”
그러니까 괜히 설레발치지 말라며 수영이 앞서가다 말고 멈춰 서서 단호히 말했다.
“괜찮으니까 제발 그냥 가라. 응?”
“아……. 그래. 그래야지.”
그에 태진이 입을 급히 오므렸다.
비록 어깨가 움츠러들어 축 처지긴 하지만.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얼굴로 입맛 다시는 시늉을 하기는 하지만.
만일 입까지 삐죽 내밀었으면 영락없는 어린애의 모습이지만.
어찌 되었든 그는 그녀의 의견을 수긍하는 듯했다.
“아, 맞다.”
그러다 문득 태진은 무언가 생각났는지 급히 재킷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이내 꺼낸 건 아까 낯선 피에로에게 받은 막대 사탕 2개였다.
태진이 수영의 손을 잡아 올리더니 그 위에 2개를 모두 놓아 주었다.
“가져가. 아까 주더라.”
“이걸 왜 날 줘.”
뜬금없이 웬 사탕. 그녀의 눈썹이 비틀려 올라갔으나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너 사탕 좋아하잖아.”
“그러니까 이걸 왜…….”
“그러니까 너 먹으라고. 어차피 나 단 거 안 먹으니까.”
“…….”
“간다. 내일 보자.”
그리고 막무가내였다.
제 할 말만을 하고는 팔뚝을 툭툭, 아프지 않게 친 뒤 곧장 자리를 떠났다.
“뭐야…….”
그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수영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단 거 안 좋아하는 거 맞잖아.”
〈아직도 단 거 좋아하나?〉
〈네……. 뭐, 그렇죠.〉
〈저도 같은 거로 먹죠.〉
처음 카페에 갔던 날, 그땐 잘 먹는 척하더니 그의 취향은 여전했다.
단 건 어지간해선 입에 대지 않는 점이.
나중에 들통날 거짓말은 왜 하는지.
“됐다. 내 알 바냐.”
여기서 우연히 만난 것만큼이나 그때의 사정이 있겠지.
희한하다는 눈빛이던 그녀는 얼마 안 가 대수롭지도 않게 여기기로 했다.
이윽고 횡단보도 신호등에 초록색 불이 켜졌다.
수영은 걸음을 옮겼고, 그 자리에는 태진과 수영 둘 중 누구도 남지 않았다.
“…….”
하나 멀찍이서 두 사람을 지켜보던 이가 존재했다.
그 누군가는 숨을 죽이고 쳐다보다 금세 발길을 돌려 제 갈 길로 향했다.* * *
아침부터 정신없이 몰아친 덕에 어떻게 버텼는지도 모르겠다.
오로지 카페인에 의존한 기억밖에는 없었다.
‘커피…….’
그럼에도 아직 멀쩡해지지 않은 정신에 수영은 탕비실을 찾았다.
“제…….”
“박 주임.”
“아. 흠흠.”
분명 들어가기 전까지는 시끌벅적하던 곳이었다.
한데 무슨 이유인지 수영이 들어가니 찬물 끼얹듯 조용해졌다.
‘……뭐지?’
“안녕하세요. 팀장님.”
그때, 박 주임이 반갑게 인사했다.
찰나의 이상함을 느낄 새도 없었다.
“네. 안녕하세요.”
수영은 어색하게 웃으며 꾸벅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박 주임이 넌지시 말을 걸어왔다.
“저 어제 봤는데.”
“네? 뭐를요?”
“본부장님이랑 같이 계신 거요.”
박 주임은 무언가 대단한 거라도 발견했다는 양 의기양양했다.
수영의 한쪽 입꼬리가 실룩였다.
“그게 왜요?”
“아니 뭐. 근데 왜 거기 계셨던 거예요?”
“우연히 만났어요.”
“아…… 우연히요?”
“네. 우연히.”
딱히 저로선 걸릴 만한 것도 없었다.
우연히 만나서 짧게 대화하고 헤어졌다.
그게 왜?
수영의 머릿속엔 연신 의아함만 가득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그냥요. 본부장님이랑 아무 사이도 아닌데 무슨 사이인 것 같기도 하고.”
“하고 싶은 말이 뭐예요?”
“팀장님 부러워서요.”
“…….”
“커피 맛있게 드세요.”
순전히 궁금해서 던진 물음에 돌아온 건 뒤끝이 지저분한 대답이었다.
박 주임을 포함한 여타 직원들은 탕비실을 빠져나갔다.
“좋겠다. 누군 매몰차게 거절당해서 울기까지 했는데, 누구는 간도 보네.”
그러면서 속닥거리는 소리가 부러 들으라는 듯 꽤나 컸다.
‘저 인간들이!’
그들의 바람대로 정확히 들어 버린 수영이 곧장 뒤를 돌아보았으나 그 자리엔 앞뒤로 움직이는 유리문이 전부였다.
“후우…….”
홀로 남은 탕비실엔 그녀의 한숨 소리가 가득했다.
수영이 자신의 머리를 한 번 쓸어 넘기며 인상을 팍 구겼다.
‘진짜 웃겨. 내가 뭘 했다고? 김 대리님이 진태진한테 차인 걸 왜 나한테 뭐라 그래?’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었다.
‘내가 받아 주지 말라고 했냐고! 거절은 진태진이 했는데 왜 나한테!’
“으휴!”
신경 쓰지 말자.
신경 쓰지 말자.
그렇게 몇 번을 되뇌었다.
“신경…….”
신경, 쓰지 말아야 하는데.
‘어떻게 안 써.’
안 쓰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들리는 게 제 이야기고 보이는 게 그들의 표정이다.
정말 인생 혼자 살 거 아니면 마음먹은 대로 하지도 못하였다.
‘에이 씨.’
커피 머신의 버튼을 누르기 직전, 멈칫하던 그녀는 결심에 찬 듯 버튼을 꾹 짓이기다시피 했다.
‘그게 그렇게 잘못이야?’
위잉.
‘걔랑 나랑 같이 있었던 게 뭐. 그렇다고 자기들 일에 지장을 주기를 했어, 뭘 했어? 안 그래?’
탕비실 내에 커피 내리는 소리가 가득 찼다.
더불어 수영의 머릿속에도 커피 머신 소리만큼이나 요란한 생각이 가득 찼다.
‘진짜 별것도 아닌 거로 사람 기분 나쁘게…….’
그녀는 하, 하고 기가 찬다는 웃음을 내뱉었다.
그러더니 얼마 안 가 정색하며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아주 되는 게 하나도 없어!”
급기야 감정이 격앙되었는지 버럭 소리쳤다.
하필이면 커피 머신이 제 할 일을 끝마쳐 그 소리가 뚝 끊긴 찰나에. 때마침 들어온 2팀장이 놀라 숨을 ‘헉!’ 하고 들이켰다.
그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수영을 다그쳤다.
“최 팀장. 뭐 화나는 일 있어?”
“아, 아뇨. 죄송합니다…….”
“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지. 여기가 집도 아니고, 소리를 지르면 어떡해?”
“죄송합니다.”
수영은 재빨리 고개 숙여 사과한 뒤 컵을 들고 탕비실을 나왔다.
‘으, 쪽팔려.’
2팀장이 거기서 딱 들어올 게 뭐람.
‘일진이 안 좋아.’
오늘따라 이상했다. 사실 오늘만이 아니라 어느 날인가부터 꾸준히 좋지가 않았다.
‘김 대리님 때부턴가…….’
태진이 1팀을 도와주었던 그날부터.
‘엄연히 따지자면 진태진이 우리 부서에 왔을 때부터이기는 하지만.’
수영은 터덜터덜 제자리로 돌아와 털썩 주저앉았다.
‘됐어. 신경 쓰지 말자.’
남들이 뭐라든 제가 당당하면 되는 일 아닌가.
‘내가 잘못 없다는데 자기들이 어쩔 거야.’
그녀는 흥, 하고 콧바람을 세게 불어 생각을 날려 버렸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래 왔던 걸까, 아니면 이번 일이 방아쇠였던 걸까.
상황은 그녀의 맘처럼 쉬이 흘러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