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선우 과장인가 하는 사람은 뭔데 아무렇지도 않게 최 팀장한테 점심 약속을 잡아요?”
“못 잡을 이유도 없지 않나요?”
“뭐…….”
그의 물음에 수영이 되레 반문했다. 덕분에 태진이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벙긋거렸다.
그러더니 이내 하, 하고 기가 찬다는 웃음을 토했다.
“아니, 그렇다고 아무 남자가 웃으면서 잘해 준다고 덥석 약속을 잡아요? 요즘 세상에, 남자를 특히나 더 조심해야 하는 거 모르나? 응?”
“본부장님도 남자 아니세요?”
“그거랑 이거랑 어떻게 같아요?”
“제 눈엔 같아 보이던걸요. 본부장님이나 이 과장님이나.”
어느덧 도착한 사내 식당 입구.
배식을 받기 위해 식판을 들고 대열에 합류한 수영이 홱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특히나 조심해야 하는 건 제가 아니라,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겠죠. 본인들이 행동을 이상하게 하는데 제가 조심한다고 되겠어요?”
“…….”
수영의 말에 태진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다 입맛 다시는 시늉을 하더니 슬그머니 입술을 벌렸다.
“……그렇긴 한데. 아니, 그걸 말하려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나 나나 같아 보인다면서요. 근데 왜 나는 안 되는데요?”
“뭘요?”
“둘이 같아 보인다면서 태도는 다르잖아요. 심지어 내가 더 가깝고, 오래 알고 지냈고, 상사인데.”
진심으로 짓는 함박웃음은커녕 미소조차 본 적이 없다.
업무적인 용무 이외엔 접근도 하지 말라면서 선부터 그었다.
그렇다고 태진이 그녀의 말을 지키는 건 아니지만 시작부터 다른 그녀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그는 퍽 기분 상한 티를 내었다.
“나는 최 팀장이 그렇게 잘 웃는 사람인 거 이번에 처음 알았네.”
“…….”
“평소에는 웃지도 않더니만.”
‘……평소 아닌데.’
‘평소’가 아니라 ‘태진의 앞에서만’이다.
다른 직원들 앞에선 업무용 미소일지언정 잘 웃어 주었다.
그 대상이 태진이라 웃고 싶지 않았던 거지, 선우에게만 웃은 건 아니었다.
그걸 알 리 없는 그는 여전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설마, 그 사람이 마음에 들고 그런 건 아니죠?”
그러면 안 된다는 속내가 아주 잘 담겨 있는 말투였다.
표정을 보지 않아도 보이는 것 같은 어조.
그에 수영은 하, 하고 한쪽 입꼬리를 올려 한껏 비웃어 준 뒤 빈자리를 찾아갔다.
“왜 대답이…….”
“어? 팀장님.”
대답 대신 비웃음만 당한 태진이 그녀를 바짝 따라붙어 앞에 앉으려는 찰나.
앞에서 수영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가 돌아갔다.
“같이 앉아도…… 되죠? 자리가 없어서요.”
3팀의 또 다른 직원이었다.
“네. 당연하죠.”
슬쩍 태진과 수영을 번갈아 가며 눈치를 보던 그는 흔쾌히 떨어진 승낙에 태진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화두를 잡았다.
“뮤즈넷은 언제 또 온대요?”
“…….”
그 말에 귀를 쫑긋 세운 건 태진이었다.
손과 눈은 오롯이 밥에 집중하고 있으나 온 신경은 그들의 대화에 치우쳐 있었다.
직원의 물음에 수영은 가벼운 투로 대꾸해 주었다.
“다음 주에요.”
“아, 진짜요? 그때는 저희 밥 얻어먹을 수 있는 거죠?”
“아마도요? 오늘은 다들 바빠서…….”
“밥?”
태진이 눈을 깜박이며 직원을 쳐다보자, 직원의 입에선 만족스러운 대답이 되돌아왔다.
“네. 이선우 과장님이라고, 아까 회의 오신 분인데 저희 다 같이 식사 한번 하자고 하셨거든요. 몇 번 왔다 갔다 하면서 팀장님이 도움을 주셨나 봐요.”
“단둘이…… 가 아니었네?”
“네?”
“아뇨. 아무것도.”
둘의 대화 도중 중얼거리듯 읊조리는 그의 혼잣말에 안도감이 담겼다.
‘그래. 단둘이 먹을 리가 없지.’
앞서 서운했던 것들은 머릿속에서 지워 버린 지 오래였다.
‘오해할 뻔했네.’
태진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최수영 일도 잘해.’
그 와중에 기특하다는 생각은 꼭 빼놓지 않았다.
‘……멍청이.’
수영이 눈을 가늘게 뜨곤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중얼거림을 직원은 듣지 못한 듯했으나 수영의 귀엔 정확히 꽂혔다.
‘저렇게 뻔해서야.’
나 이상한 생각 했어요. 얼굴에 쓰여 있다.
‘얘는 가끔 이상한 오해를 한단 말이야.’
제가 그럼 이선우 과장이랑 단둘이 밥이라도 먹을 줄 알았나.
설령 그렇다 한들 그게 뭐 그렇게 큰일이라고 사람을 닦달하는지.
‘은근히 끈질기단 말이야.’
태진은 자기가 궁금한 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알아야 하는 놈이었다.
그 궁금증의 대상이 사람이라면 더더욱.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어쩜 이렇게 한결같은지.
‘내가 어쩌다가 쟤를…….’
〈너 괜찮아?〉
비가 세차게 내리던 날. 그때 그 우산을 건네는 게 아니었다.
‘길 가다 비 맞고 있던 애 우산 한번 잘못 씌워 줬다가 이게 무슨 날벼락이람.’
그날의 그가 불쌍해 보였던 제 눈이 문제다.
이렇게 끈질긴 연으로 이어질 줄 알았으면 씌워 주지 않았을 텐데.
‘내가 알았냐고.’
수영은 한숨을 푹 내쉬곤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됐다. 내 오지랖이 잘못했지, 뭐.’
누굴 탓하랴. 업보다, 업보.
‘에휴.’
제 속도 모르고 히죽거리며 쳐다보는 태진의 속 편함에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 *
“자기.”
주희가 일하다 말고 수영을 툭 건드렸다.
“네?”
수영은 눈을 모니터에 고정한 채 대답했다.
“저기 봐 봐.”
그러나 주희는 그걸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수영의 팔을 살살 흔들었다.
“뭔데요?”
하여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려 주희가 가리키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주희의 손끝에는 김 대리가 서 있었다.
김 대리는 1팀장과 이야기하는 태진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 눈빛은 옆에서 보아도 티가 날 정도로 강렬했다.
주희가 슬그머니 수영의 귓가에 속닥거렸다.
“내가 말했지? 김 대리가 본부장님 좋아한다니까?”
“아……. 그러네요.”
“아주 뚫리겠어.”
사실 이렇게 직접 보지 않아도 이미 회식 때부터 느끼고 있었다.
태진과 나란히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살벌하게 쳐다보았으니 어느 정도 눈치가 있다면 모를 수가 없지.
수영은 하하, 하고 빈 웃음을 보였다. 그러자 주희의 말이 거듭 이어졌다.
“근데 그거 알아? 요즘 김 대리, 은근히 자기가 본부장님한테 마음 있는 거 흘리고 다닌대.”
“네?”
수영이 되물었다.
“흘리고 다닌다고요?”
“그래. 일부러 그러는 거야. 행여나 남이 채 갈까 봐. 자기도 알지? 다른 부서에서도 본부장님 지나갈 때마다 일부러 눈도장 찍고 가는 거.”
“……그래요?”
“어머나. 몰랐어?”
그녀의 반응에 주희가 더욱 놀라워했다.
“아니, 자기는 같이 다니면서 정말 몰랐다고?”
“…….”
알 리가 있나. 애초에 관심도 없었을뿐더러 학생 때부터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라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10여 년이 흐른 지금도 그런다는 사실이 조금 놀라운 게 다였다.
끄덕끄덕. 수영의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주희의 말이 이어졌다.
“아무튼, 조만간 김 대리 사고 한번 칠 것 같지 않아?”
“사고요?”
“예를 들면…… 고백이라든가?”
“헙……. 그거 괜찮은 거예요?”
진태진은 안 받아 줄 텐데.
〈그럼, 김 대리랑 평생 이어질 일 없게 되면 나 안 피할 겁니까?〉
〈당연한 소리지만 거절할 겁니다.〉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거절할 예정이라고.
“그러다 괜히 회사 다니기만 민망해지는 거 아니에요?”
“응?”
수영은 제가 한 말이 어딘가 조금 많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상태였다.
하여 그 미묘함을 알아챈 주희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뭐야. 본부장님이 당연히 거절할 거라는 것처럼 말하네?”
“네?”
“둘이 진짜 우리 몰래 뭐 있는 거 아니야?”
‘이런!’
그제야 제가 한 말의 문제를 깨달은 수영이 급히 손사래 쳤다.
“아이, 아니에요.”
“수상한데……. 자기 나한테는 꼭 말해 줘야 돼. 알지?”
“정말 아니에요. 그냥 저는 혹시나 그러면 어쩌냐는 뜻이었어요. 사람 일이라는 게…… 꼭 긍정적으로만 흘러가진 않으니까. 하하. 하하하.”
“뭐. 그렇긴 하지.”
‘휴우…….’
다행히 무사히 넘어간 듯싶었다. 수영이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그사이 주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되면 김 대리만 쪽팔리는 거지. 그리고 다들 자기처럼 눈치는 채고 있어. 본부장님이 김 대리 안 받아 줄 거라는 거. 본인이 피해 보는 거 아니니까 다들 그냥 들어 주는 거지.”
“아아…….”
“아무튼 김 대리도 대단하다. 본부장님이 오자마자 자기 좋아했다고 대놓고 얘기했는데도 저렇게 포기 안 하는 거 보면.”
“그야…….”
당연히 그건 거짓말일 테니까. 그저 첫날 이목을 끌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10년 만에 만나 샘솟은 장난기에 뱉은 말일 게 뻔했다.
수영은 말끝을 흐리며 눈동자를 또르르 굴렸다.
“지금 본부장님이랑 제가 사귀거나 하는 게 아니니까요.”
“그럼 만약에, 본부장님이 김 대리 받아 주면 어떡할 거야?”
“……에?”
“그래도 상관없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