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혁 씨, 맞으시죠?”
“아, 네에.”
‘응? 뭐지?’
수영은 남자의 노골적인 시선에 당황했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일어서 눈을 마주친 것까지는 괜찮았다. 한데 왜 대답을 하는 과정에서 눈동자가 차림새를 훑어보듯 아래로 내려갔다 오는 건지.
그것도 꽤나 적나라하게.
“안녕하세요. 최수영 씨죠? 김준혁입니다.”
‘잘못 본 건가?’
하지만 곧 언제 그랬냐는 듯 활짝 웃는 낯을 보고 그녀의 의심은 조금 사그라들었다.
“앉으세요.”
“아, 네.”
이어지는 남자의 친절함에 수영은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커피는 제가 수영 씨 거 미리 시켜 놨어요. 아메리카노 괜찮으시죠?”
“네에……. 하하…….”
수영은 저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어색한 웃음에 어쩔 줄을 몰랐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릿속이 쉼 없이 움직였다.
그때,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사진으로 봤던 것보다 훨씬 더 예쁘시네요. 사진에서도 예쁘셨는데.”
“아……. 감사합니다.”
어쩜 저렇게 낯간지러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지. 사진만 보고도 만나고 싶어 했다는 엄마의 얘기가 진짜이긴 한 듯싶었다.
수영은 대답과 함께 멋쩍게 웃으며 커피를 홀짝였다.
“앗, 뜨!”
식어 있지는 못해도 미지근할 거라 생각했던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커피는 너무도 뜨거웠다.
수영이 화들짝 놀라 급하게 내려놓자 남자가 피식 웃어 보였다.
“수영 씨는 여성적인 편은 아니신가 봐요.”
“네?”
이 사람이 지금 뭐라는 거야?
제가 잘못 들은 건 아니겠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그에 남자가 장난이라는 듯 손사래를 치며 말을 고쳤다.
“아뇨. 되게 털털하신 것 같다고요.”
“아……. 그런가요?”
“네. 사진으론 엄청 여성적이신 것 같았거든요. 여리여리하고……. 아니, 그렇다고 수영 씨가 뚱뚱하다는 소리는 아니고요.”
“…….”
“소개팅에 바지 입고 오신 것도 그렇고. 되게 사람들이랑 서슴없이 잘 지내실 것 같다는 소리였어요. 요즘, 적극적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진보적인 여성이 트렌드잖아요.”
“하하…….”
처음엔 순수한 의도의 말이겠지 싶었다. 그러나 제 생각이 처음부터 끝까지 잘못되었음을 확인시켜 주듯 남자는 불쾌한 말들만 내뱉었다.
그뿐만 아니라 제가 좋아서 웃는 줄 아는 모양인지 거듭 말을 이어 했다.
“근데 수영 씨도 아실지 모르겠지만, 트렌드라는 건 짧은 시대만 반짝이고 마는 거잖아요. 저는 그런 부분이 참 안타깝더라고요.”
“…….”
“여성들이 자신의 진짜 생각이나 사상에 상관없이 금방 지나갈 트렌드만 좇아가는 게요. 결국은 다수가 인정하는 예전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는데. ‘복고 열풍’처럼요. 그렇지 않아요? 수영 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
남자는 눈을 마주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언행이 다 무례했다.
“수영 씨?”
그런 남자의 말에 대꾸하고 싶지도 않아 꾹 다문 입술에, 남자는 작게 웃어 보였다.
“아, 혹시 제 말이 조금 어려웠나요? 쉽게 설명해 드리자면…….”
“저기 죄송한데.”
“네?”
급기야 듣다 못한 수영은 남자의 말을 자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전히 웃는 낯짝으로 되묻는 모습에 수영이 짤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저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아……. 네. 다녀오세요.”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화장실로 향하였다.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이 퍽 재수가 없었지만 당장 저 남자의 얼굴을 마주하지 않는 게 더 우선이었다.
홱!
화장실로 들어온 수영은 잔뜩 인상을 찡그렸다.
“미친놈!”
‘뭐? 여성적인 편은 아니신가 봐요? 트렌드으?’
하여간 별 미친 인간을 다 보았다.
보자마자 사람 입은 걸 스캔하질 않나, 옷이 어떻다느니, 트렌드 운운은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건지.
“진짜 뚫린 입이라고…….”
이래서 소개팅이 싫은 거였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마주해야 한다는 그 사실이. 그리고 마찬가지로 저에 대해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나불거리는 걸 듣고만 있어야 하는 상황이.
‘최악이야.’
끼릭, 수도꼭지를 비틀어 쏟아지는 물줄기를 손으로 갈랐다.
미지근한 물이 열을 식혀 주려 애쓰지만 제 화에는 턱도 없는 온도였다.
‘집에나 가야겠다.’
피차 서로 안 맞는 사이다. 시간을 끌 이유가 없음을 깨달은 수영은 물을 잠근 후 고개를 들었다.
거울에 비친 얼굴은 그녀가 지을 수 있는 최대한으로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감정 소모하지 말자.’
“긍정적으로…….”
긍정적으로 생각해야지. 차라리 잘되었다.
이걸 그대로 집에 가서 미주알고주알 전하면 다시는 제게 소개팅이니 뭐니 이야기하지 않으리라.
‘시간 버리기 전에 빨리 알아서 다행이지.’
수영은 이제 무사히 집에만 가면 더 바랄 것도 없었다.
이내 화장실 밖으로 나온 그녀는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이만 가 보겠다며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면 되는 일인데도 그 찰나에 얼굴을 봐야 한다는 게 썩 유쾌하지 않았다.
“저기, 제가 급한…….”
짧은 거리에 비해 한참 걸려 자리에 다다른 수영은 일단 의자에 걸어 두었던 가방부터 집어 들었다.
맞은편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말부터 꺼냈던 그녀의 목소리가 끊긴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야, 너…….”
수영이 채 말을 다 잇지도 못하고 눈을 크게 떴다.
그토록 돌아오기 싫었던 자리에는, 아까 본 남자가 아닌 태진이 앉아 있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대체 그 남자는 어디 가고.
“여기 있던 사람은?”
그 짧은 새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도통 그녀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수영이 거듭 묻자 줄곧 무표정이던 태진이 눈썹을 비틀었다.
“갔어. 엄청 바쁜 일이 있다던데.”
“……바쁜 일?”
그럴 리가.
‘아무리 봐도 바쁜 사람 같지는 않았는데.’
수영이 영 미심쩍어하는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바른대로 말하라.’는 뉘앙스였지만 태진은 시치미를 뚝 떼려는 속셈인지 대꾸 대신 어깨만 으쓱일 뿐이었다.
수영이 재차 물었다.
“무슨 바쁜 일인데?”
“글쎄다. 나야 모르지.”
“그럼 넌 왜 여기 있는데?”
“우연히 지나가다가?”
창과 방패의 싸움이었다. 어떻게든 알아내려는 수영에게 태진은 남자에 대한 일말의 정보도 주지 않으려는 듯했다.
그는 절대 말해 줄 생각이 없었다.
건너 건너 수영의 소개팅 장소를 알게 되었고, 고민 끝에 우연을 가장하여 근처를 배회했으며, 마침 입을 꾹 다문 수영을 발견했다는 것을.
제아무리 그녀의 소개팅남을 제가 쫓아냈다는 사실을 그녀가 이미 은연중에 눈치챘더라도.
하필이면 그녀가 일어설 때 짓던 표정을 제가 봐 버려, 자신도 모르게 들어와 버렸다는 것만큼은.
결코.* * *
처음부터 들이닥칠 생각은 아니었다.
물론 수영이 소개팅을 한다는 소리를 들은 그 시점부터 그의 머릿속은 새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 자리를 직접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지켜보기만이라도 하고 싶었을 뿐.
〈거기 자리 있는데, 요?〉
그러나 그의 홀로 한 다짐은 수영의 표정이 굳은 걸 본 순간 사라졌고, 결국 남자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뭐, 뭡니까? 거기 자리 있다니까? 요?〉
남자가 당황하여 묻자 태진이 등을 뒤로 기대곤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냥요. 궁금해서 와 봤어요.〉
〈그냥…… 이라니?〉
〈그쪽이 얼마나 대단한 개소리를 했길래 최수영이 저런 표정을 짓나 해서.〉
〈무슨…… 아, 최수영 씨랑 아는 사이예요?〉
그렇게 물은 남자가 어이없다는 듯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한쪽 입꼬리를 실룩였다.
〈진짜 별…….〉
〈우리 수영이는 아메리카노 안 좋아하는데.〉
〈뭐, 뭐요?〉
〈그쪽이 진짜 매너가 없네. 이런 것도 하나 안 물어보고 마음대로 사나?〉
태진은 못마땅해하는 눈빛으로 남자를 쏘아보며 수영이 마시다 만 아메리카노를 홀짝였다.
〈하, 이것 봐라?〉
남자는 기가 차 연신 헛웃음을 짓더니 이내 알 것 같다는 듯 등받이에 등을 기대었다.
〈너 저 여자 좋아하지?〉
〈응.〉
〈뭐?〉
〈좋아하냐며. 그렇다고.〉
남자는 나름대로 공격하기 위한 질문이었다. 이렇게 경우 없는 멍청이들은 뻔했고, 허를 찌르는 질문에 하나같이 당황할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기에.
한데 웬걸. 태진은 당당했다. 되레 질문한 남자가 당황하여 멍청한 표정으로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그러다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벌떡 일어서 소리쳤다.
〈아니 근데 몇 살인데 자꾸 반말을!〉
〈진짜 이상하네.〉
〈뭐…… 뭐가.〉
〈내가 수백 번을 양보해도 그쪽보단 잘생겼고. 몇만 번을 양보해도 그쪽보단 돈이 많을 텐데. 우리 수영이는 대체 내가 왜 마음에 안 들어서 이딴 놈을 만나러 나온 걸까.〉
나처럼 지고지순한 남자가 또 어디 있다고, 라며 태진은 턱까지 괴곤 잔뜩 성이 난 남자를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마치 남자와 비교를 당하는 것조차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했다.
태진의 적나라한 표정에 기분이 나빠진 남자가 인상을 팍 일그러트리더니 비릿하게 웃어 보였다.
〈몰라서 물어? 남자가 하나만 붙어 있는 거로는 성에 안 차는 거지.〉
〈그래도 이딴 놈을 만나러 오는 건 좀…… 많이 그렇지 않나?〉
〈뭐야, 이 새끼야? 나도 저런 여자 같지도 않은 여자랑 더 오래 있을 생각 없어!〉
〈잘됐네. 그럼 빨리 꺼져 줘. 그딴 같잖은 소리 그만 지껄이고. 그쪽 지금 엄청 추하니까.〉
이번에도 남자는 태진의 속을 살살 긁을 셈이었다. 이런 놈은 뻔하다는 생각과 함께.
하나 남자의 생각을 정확하게 빗나가듯 태진은 조금의 타격도 없어 보였고, 끝에는 환하게 웃기까지 했다.
오히려 화르륵 불이 붙은 것처럼 얼굴이 달아오른 건 남자 본인이었다.
태진의 말 뒤로 이어지는 몇몇 시선들에 결국 남자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신랄하게 욕을 지껄이며 사라졌으나 태진은 굳이 제대로 듣지 않았다.
그는 곧 남자의 자리로 옮겨 수영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