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수영이 다시 나타난 지금.
무슨 상황이 벌어졌는지 알 리 없는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면서도 구겨진 인상을 풀 줄을 몰랐다.
절대 알려 주지 않을 것 같은 태진의 태도에 수영은 더 생각하기를 포기한 채 가방을 어깨에 걸쳤다.
“아무튼, 먼저 갔다니 잘됐네. 그럼 나도 그만 가 볼게.”
“뭐?”
“너도 잘 들어가.”
“잠깐. 잠깐만.”
갑작스러운 전개에 태진이 급히 손을 뻗었다.
가려던 방향이 막힌 수영은 그를 내려다보았다.
“왜?”
“왜 그냥 가?”
“왜 그냥 가냐니? 아까 그 남자도 집에 갔다며.”
“그러니까. 이제 방해꾼도 없는데 왜 그냥 집에 가냐고. 시간도 많은데 나랑 놀자.”
태진은 뻔뻔했다. 적어도 수영의 눈엔 그랬다.
갑자기 이렇게 나타난 것도 말이 안 되는데, 자기랑 놀자고?
물론 소개팅남이 사라진 건 아주 다행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태진과 남은 시간을 같이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뭐가 예쁘다고 진태진한테 시간을 써 주나.
수영이 심드렁한 눈으로 그를 마주했다.
그녀는 몇 초 생각하는 듯하더니 휙, 몸을 반대로 틀었다.
“간다.”
“야……. 야!”
머그잔을 회수 창구에 올려놓곤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카페를 나섰다.
급하게 뒤따라오는 태진의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으나 수영은 일부러라도 못 들은 척 걸었다.
“같이 좀 가자니까.”
그런데 이게 뭐람. 빠른 걸음으로 갔다고 생각했는데 그새 태진이 바짝 붙어 걷고 있다.
수영은 포기가 빨랐다.
어느새 원래의 걸음걸이로 돌아온 그녀는 콧등에 주름을 그었다.
“나 집에 갈 거니까 따라오지 마.”
“같이 가자니까.”
“내 집을 왜 너랑 같이 가냐?”
“처음도 아닌데 뭐 어때.”
“그게 무슨 말…….”
처음이 아니라니. 수작을 부려도 정도껏이지, 하며 기가 차 웃음을 지으려 했다.
거의 다 지은 비웃음에 이제 성질만 내면 되는데 문득 얼마 전 회식이 떠올랐다.
〈너 데려다주고 자기 집까지 다시 간 태진이도 있는데 네가 뭐가 힘들어?〉
동시에 다음 날도 생각이 나 버렸다.
아. 그때 우리 집에 온 적이 있구나.
‘아, 씨…….’
수영은 절망에 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 얼굴이 어찌나 적나라한지 태진이 실소를 터트렸다.
“그래도 그때 기억은 나나 보네.”
“안 나. 그러니까 그만…….”
“어?”
그러니까, 더는 귀찮게 하지 말고 그만 갔으면.
수영은 진심을 다해 말할 참이었다.
“이게 아직도 있네?”
하지만 역시나랄 것도 없이 태진은 그녀의 마음처럼 움직여 주는 놈이 아니었고, 그는 무언가에 홀린 듯 반가워하는 목소리로 수영의 손을 잡아끌었다.
“야……!”
대뜸 그의 큰 손에 붙잡힌 그녀는 완전히 제 손을 감싼 촉감에 무심코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되게 크네.’
전에도 이렇게 컸던가.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아마도 그렇지 않았을까.
‘으…….’
태진은 예전부터 이렇듯 불쑥 스킨십을 하곤 했다.
예나 지금이나 스킨십이 아무렇지 않은 놈. 그다지 사람들과 손길이 닿을 일 없는 그녀로선 적응이 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수영은 깜짝 놀라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하려 깊게 숨을 내쉬었다.
“이거 기억나냐? 예전에 우리 내기했던 거.”
그러는 사이, 수영의 마음을 알 리 없는 태진은 여전히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그녀는 슬그머니 손을 빼며 대답했다.
“기억나.”
그가 가리킨 건 뽑기 기계였다.
인형 말고 장난감이 경품으로 담긴 기계. 피규어도 있지만 당시에 내기했던 건 꽤 큰 상자였다.
“하나 뽑아 줄까?”
“뭐? 됐…….”
띠링!
태진은 무슨 자신감인지 말리기도 전에 투입구에 돈을 찔러 넣었다.
“…….”
그러고 나니 수영도 내심 궁금하기는 했다. 눈을 반짝이며 그의 옆에 나란히 서서 정면에 있는 장난감 상자 중 하나를 쳐다보았다.
“가운데 저거?”
“어? ……어.”
빠르게 알아챈 태진의 물음에 수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귀엽긴.’
방금까진 싫어하는 티를 내더니 막상 하려 하니 관심을 보이는 게 꼭 고양이 같았다.
태진은 차마 입 밖으로는 내지 못할 말을 삼키며 조이스틱을 움직였다.
둘은 이따금 지나가는 이들이 쳐다봄에도 민망해할 겨를 없이 집중한 상태였다.
노랫소리에 맞추어 기계가 얼마쯤 움직였을까. 태진의 손이 조이스틱에서 멀어졌다.
꿀꺽. 수영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이윽고 그가 버튼을 누르자 이동만 하던 기계가 본격적으로 경품을 집어 올리기 시작했다.
“어?”
결과는…… 성공.
“어어?”
덕분에 그렇잖아도 컸던 수영의 눈이 더 동그랗게 뜨였다.
“이게 되…… 네?”
말도 안 돼. 어떻게 한 번에 이걸 성공할 수가 있지?
수영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태진은 의기양양한 낯으로 커다란 상자를 꺼내어 내밀었다.
“봤냐?”
“너 예전엔 되게 못하지 않았어?”
“…….”
그와 동시에 좋아하는 반응보다는 신기하다는 반응을 보이는 수영 탓에 그의 입이 다물어졌다.
“이상하다. 너랑 나랑 둘이 똑같이 못했던 거 같은데…….”
“발전이 없으면 그게 사람이냐? 이거나 받아.”
“그건 그렇지만.”
열 번 시도하면 한 번 성공하던 애가 한 방에 성공하니 안 신기할 수가 있나.
“이거 내가 열어 봐도 돼?”
“……너 가지라고 준 거야.”
“오오.”
돌아오는 그의 대답에 수영은 부푼 마음으로 내용물을 볼 수 없도록 포장된 포장지를 풀어 헤쳤다.
“…….”
“…….”
안에 든 건 요술봉이었다.
차라리 옆에 있던 피규어가 더 나았을 만큼 난해한 디자인의 요술봉.
손잡이 근처에 달린 버튼을 누르니 나오는 화려한 사운드와 불빛이 지나가는 이들의 시선까지 빼앗았다.
“풉.”
순간 흐르던 정적 사이로 수영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하! 진짜 웃겨. 뽑아도 어떻게 이런 걸 뽑아?”
수영은 이보다 더 이상하기는 힘든 디자인이라며 깔깔댔다.
어느덧 소개팅에서 느낀 불쾌한 감정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수영이 겨우 웃음을 참아 내며 말했다.
“완전 바보 같아.”
“내가 뭐 그런 거 나올 줄 알았겠냐.”
그의 딴엔 수영이 원하는 걸 뽑아 주고 싶었을 뿐이다.
그게 하필이면 애들도 가지고 놀지 않을 것 같은 이런 장난감일 줄은. 수영이 웃어서 기분은 좋은데 말로 표현하기 힘든 애석함이 있었다.
태진이 퍽 심통 난 어조로 대꾸하자 수영이 가볍게 툭 그의 팔을 쳤다.
“누가 뭐래? 마음에 든다고.”
“…….”
“근데 너 진짜 뽑기 연습이라도 했어? 왜 이렇게 잘해?”
“원래 잘했어.”
“거짓말한다.”
“진짜야.”
“아아, 네. 그러세요?”
말을 말자. 수영은 전혀 그의 말을 믿을 생각이 없다는 듯 대답하곤 앞서 걸었다.
요술봉을 휘적이며 가는 수영의 뒤를 따라가며 태진이 작게 웃었다.
‘연습…… 했지.’
그녀에겐 말 못 할 노력의 결실이었다.
수영이 뽑기를 얼마나 좋아했던가. 2만 원을 쓰고도 뽑지 못한 장난감에 미련을 놓지 못하던 그녀의 모습을 본 이후 집에 기계까지 들였다.
비록 다음 날부터 수영이 흥미를 잃어 뽑아 주지 못한 건 아쉬웠지만 언젠가는 기회가 있겠거니 싶어 혼자 하다가 는 실력이었다.
“네가 좋아하니까 나도 좋다.”
태진은 실없이 웃음을 내비쳤다.* * *
그렇게 소개팅이 끝나고 주말이 지나갔다.
“최 팀장!”
월요일 아침, 출근하기 무섭게 주희가 눈을 반짝이며 수영에게 다가왔다.
주희는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음에도 지난 주말 소개팅 후기를 듣고 싶어 하는 것이 느껴졌다.
“안녕하세요.”
“응. 어떻게 됐어? 소개팅은 잘했어?”
“아……. 하하.”
역시 그녀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수영은 멋쩍게 웃다 이내 짤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뇨. 완전 최악이었어요.”
“어머. 그래? 왜?”
“소개팅에 바지 입고 온 걸 뭐라 하질 않나, 여성적이지가 못하다느니…….”
“세상에. 미친 거 아니야? 그래서?”
“그래서 화장실로 도망갔다가 파투 내려고 나왔는데, 진…….”
아, 아니지.
‘하마터면 진태진 이름 꺼낼 뻔했네.’
거기서 태진을 만났다고 했다간 또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몰랐다.
특히나 이미 머릿속에 저와 태진을 엮기 바쁜 주희라면 더더욱.
“진?”
“진즉! 사라져 있더라고요. 말도 없이요.”
수영은 재빨리 말을 바꿨다. 그래도 나름 자연스러웠다고 여기며 안도하는 웃음을 내비쳤다.
“뭐야. 별 이상한 놈이 다 있네. 근데 최 팀장은 뭐가 좋다고 웃어?”
“네? 아녜요. 그냥…… 다행이다 싶어서요.”
“참 성격도 좋아, 진짜.”
“하하. 하하하…….”
의도와는 살짝 달라졌지만 어쩐지 잘 넘어간 듯했다.
수영은 연신 웃으며 눈동자를 또르르 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