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런데 참 이상하지.
본인은 낯설어도 한참이나 낯선 곳인데 태진은 몇 번도 아니고 몇십 번은 와 본 사람같이 굴었다.
한국에서 여행 준비하느라 검색했을 때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입 떡 벌어지는 식당으로 가질 않나. 능숙하게 자리에 앉아서는 직원을 상대로 주문하는 것도 아주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국적 관계없이 태진을 힐끔거리는 시선이야 전부터 봐 왔던 것들이고.
‘뭐야…….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의심 가득한 눈으로만 보던 수영의 표정이 조금은 바뀌었다.
턱을 괴고 테이블을 지지대 삼아 그를 좀 더 노골적으로 관찰하기 시작했다.
학생 때도 체격이 크다는 생각은 했었지만 왠지 더 커진 것 같다.
마냥 철없는 짓만 해 대던 그때의 진태진이라기엔 분위기도 달라진 것 같고.
‘얼굴도 좀 달라진 것 같기도…….’
그저 번지르르하기만 했던 얼굴이 더 또렷해졌다. 10대에 느꼈던 것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기분.
한 마디로, 낯설었다. 진태진이.
‘하긴. 10년이나 지났는데.’
낯설지 않으면 그것도 이상하겠다.
수영은 끝없이 자문자답하며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왜 그렇게 봐?”
그러다 제 시선을 느낀 태진이 실소를 터트렸다. 수영은 재빨리 눈을 돌렸다.
“보, 보긴 뭘 봤다고.”
“봤잖아, 나. 그것도 빤히.”
“…….”
“오랜만에 보니까 더 잘생겼지?”
“미쳤냐?”
정색, 그 자체였다. 수영의 표정은.
해도 되는 말이 있고, 해서는 안 되는 말이 있다.
태진이 한 말은 후자에 속했다. 어떤 이유에서든. 남들은 인정해도 그녀만은 절대 인정하지 않을 말.
하여 수영은 더욱 시니컬한 목소리로 그를 타박했다.
“그냥 보여서 봤다, 왜. 하필이면 네가 내 앞에 앉아 있길래.”
“다행이네, 네 앞에 앉아 있어서. 아니었으면 쳐다도 안 봤을 텐데.”
“당연…….”
‘당연한 소리를!’ 하고 맞받아치려 했건만.
그런 말을 하면서 짓는 태진의 미소가 왜 이리 껄끄러운지 모르겠다.
“야. 당연하지.”
수영은 흐리던 말끝을 급히 이어 붙였다.
“누가 너를…….”
뒤에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중얼거린 건 덤이었다.
“그래. 알아.”
그럼에도 태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먹자.”
때마침 세팅되는 음식으로 화두를 돌릴 뿐이었다.
수영도 더는 말을 얹지 않고 앞에 놓인 2잔 중 투명하지 않은 것이 담긴 쪽을 집어 들었다.
투명한 것은 물일 터.
이건 음료나 차 같은 것이겠지, 하는 생각으로 한 모금 입에 넣은 순간.
“윽!”
곧장 다시 뱉어 버렸다.
“이, 이게 뭐야!”
더는 좁아질 것도 없는 미간이 한 번 더 좁아졌다.
이윽고 눈을 가늘게 뜨고 미동 없는 태진을 노려보며 수영이 말했다.
“이거 술이잖아.”
이어 태진이 대답했다.
“맞아.”
그는 이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태연한 얼굴이었다.
“여긴 원래 음식 시키면 거기 맞게 술을 따라 줘. 같이 먹으면 더 맛있다면서.”
“…….”
“술 싫어해?”
싫어하냐고? 아니. 좋아한다. 특별한 이유가 없어도 집에서 혼자 홀짝거릴 만큼. 게다가 맛있는 것과 어울리는 술이라니. 사실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진태진의 말이 완전한 거짓 같지는 않아서 더 혹했다.
수영은 입가를 냅킨으로 슥슥 닦아 낸 뒤 다시금 술을 홀짝였다.
‘헐. 맛있어.’
아까는 단순히 예상치 못한 알코올이라는 이유로 놀라서 뱉었던 거고, 거부감을 지우니 달콤한 향이 느껴졌다.
“맛있지?”
수영의 표정을 캐치한 태진의 물음이 이어졌다.
“……먹을 만하네.”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차분해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진짜 맛있네.’
처음부터 그냥 얌전히 마실걸. 꼭 이렇게 당황하면 호들갑을 떤다니까.
수영은 머쓱함을 감추려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고 오롯이 음식에만 집중했다.
‘빨리 먹고 가야지.’
그렇게 1잔. 2잔. 3잔. 마지막 4잔.
돈도 태진이 내겠다고 했겠다, 시키면 시키는 족족 채워 주니 거절할 리 만무했다.
수영은 술기운이 슬슬 올라오는 게 딱 기분 좋은 상태라 여기며 술잔을 비워 댔다.
“너 술 되게 잘 마시나 보다?”
그러자 어느샌가부터 먹던 것도 놓고 저를 바라보고 있던 태진이 넌지시 물어 왔다.
수영이 눈에 힘을 주고 그에게 되물었다.
“뭐가?”
“그 술.”
술?
“되게 독한데. 벌써 4잔째야.”
태진은 웃을까 말까 고민하는 듯 애매한 표정을 짓곤 저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
젠장. 수영이 즉시 술잔을 내려놓았다.
“이 술이 맛있긴 하지. 근데 도수가 높아서 한 방에 훅 갈 수도 있어.”
근데 그걸 왜 이제야 말해 주냐고. 네 말대로 벌써 4잔이나 마셨는데.
수영이 차마 입 밖으론 내뱉지 못할 말을 속으로 꿍얼거렸다.
듣고 나니 갑자기 머리가 핑 도는 기분이었다.
“전에도 무작정 행동하고 보더니. 너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네.”
“…….”
“하긴. 그거 보는…….”
취기가 확 오른다고 자각한 이후로 머리가 띵하더니 귀에서 이명이 들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앞에서 열심히 떠들어 댄다 한들, 모르겠다.
“야.”
“…….”
“너 괜찮냐?”
쿵. 태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어이 그녀의 머리가 테이블로 곤두박질쳤다.
“……하.”
제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진 고개에 태진이 헛웃음을 쳤다.
“결국 뻗었네.”
“…….”
“오랜만에 만나서 나에 대한 긴장감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것도 웃기고.”
수영은 눈을 뜨고 싶어도 뜨지 못한 채 테이블에 엎드려 있었다. 그런데 선명하지 않은 그의 중얼거림이 귓가에 맴돌았다.
얼핏 원망이 섞인 것 같다는 느낌이기는 했다.
“너답다.”
슥, 그의 손이 제 머리카락에 닿는 것 같았다.
“아…….”
한데 왜인지 태진은 외마디 탄식과 함께 손을 거둔 뒤, 일어서 다가왔다.
“가자.”
무미건조한 목소리와는 달리 행동은 조심스러웠다.
“최수영.”
“으응…….”
수영은 끊어지기 직전인 의식 속에서 몸을 움직여 보려 했다.
하지만 태진이 머리를 받쳐 제 몸을 부축하는데도 아무런 저항을 할 수 없었다.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에라, 모르겠다.
“…….”
그녀는 맥없이 흐느적거리는 몸을 순순히 그에게 기대면서 두 팔로 태진의 허리를 감아 단단히 붙잡았다.
“그래. 차라리 그게 낫다.”
그러자 그가 한숨 섞인 투정을 뱉으며 그대로 그녀를 안아 올려 자리를 옮겼다.
레스토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호텔. 그의 방이었다.
가장 꼭대기, 환상적인 뷰를 자랑하는 곳이지만 수영도, 그리고 태진도 지금은 그런 것 따위 보이지도 않았다.
풀썩.
태진이 이불을 걷어 그녀를 눕혔다.
수영은 불편한 움직임에 신음을 흘렸다.
태진이 그런 수영의 모습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짧게 숨을 고르며 그녀를 부르려 할 때였다.
“최수영, 정신 차…….”
휙!
자꾸만 귀찮게 자신을 깨우려는 태진의 목소리에 순간 짜증이 난 수영은 언제 정신을 잃었냐는 듯 눈을 번쩍 뜨고 태진의 옷깃을 낚아챘다.
방심하고 있던 태진의 몸이 속절없이 그녀에게 끌려갔다. 둘의 사이는 미세한 틈만을 남겨 두고 있었다.
“…….”
꿀꺽. 그의 울대가 느릿하게 움직였다.
태진은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이성의 끈을 놓지 않으려 애썼다.
하나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수영은 반쯤 접혀 나른하게 뜬 눈으로 태진과 마주했다.
“최수…….”
“너.”
그렇게 한 번 더 그가 입을 열려고 하던 때. 그녀는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온종일 그를 보며 느낀 것들을 입 밖으로 흘려보냈다.
“되게 변했다?”
“……뭐?”
“엄청…….”
엄청 이상하게 변했어.
수영은 미처 다 하지 못한 말을 속으로만 곱씹었다. 술 때문에 머릿속이 어지러웠고, 지금 눈앞에 벌어진 모든 상황이 마치 꿈인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그때보다 더 잘생겨진 것 같기도 하고……. 특히 그…… 입술이…….”
그래서인지 그녀는 맨 정신으로는 생각도 못 할 말들을 내뱉었다.
문득 오래전에 묻어 두었던 감정이 불쑥 튀어나올 것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닌가…….”
잠에 취한 건지 그냥 취한 건지 모를 그녀의 중얼거림에 눈빛이 흔들린 태진이 실소했다.
“그게 무……!”
하나 말을 다 잇지도 못한 채 그의 눈이 크게 떠졌다.
수영이 태진을 조금 더 강하게 잡아당겼다.
그러자 두 사람은 숨결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그 사이를 간신히 지탱하고 있던 그의 팔이 무너졌다. 그리고 둘의 입술이 닿았다.
수영은 몽롱한 와중에도 선명하게 느껴지는 말랑한 감촉에 기분이 좋아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러나 마냥 딱딱할 것만 같던 그에게 부드러움이 있다는 사실에 만족감을 느끼던 것도 잠시. 묘한 이질감을 느낀 수영은 다시 그를 밀어젖혔다.
힘없이 밀려난 태진은 여전히 그녀의 위에 있었고, 그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너…….”
그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수영을 내려다보았다.
당황한 걸까, 겨우 붙잡고 있던 끈을 놓아 버린 걸까.
수영은 강렬한 태진의 눈빛에 사로잡혀 몽롱한 머리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윙윙거리는 그녀의 귓가를 뚫고 태진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려왔다.
“이건……. 내 탓이야.”
그가 주문이라도 거는 양 알 수 없는 말들을 중얼거렸다.
“욕 정도는 기꺼이 들을게.”
“…….”
그러더니 떨림이 이는 뺨에 그의 손이 닿는 게 느껴졌다.
그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고, 고개가 서서히 기울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