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놀려? 말아? 잠깐이지만 고민하던 태진은 이내 웃음을 꾹 눌러 참은 뒤 말했다.
“네. 그냥 물어봤어요. 저 때문에 야근하셔서. 양심에 찔리더라고요.”
‘양심은 무슨.’
방금도 제가 나서지 않았다면 앞장서서 소문내었을 거다. 마냥 저를 놀리는 것에만 관심 있는 사람이 퍽이나.
수영은 태진의 뻔뻔한 대답에 욕지거리라도 한껏 쏟아 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휴, 됐다.’
그러나 곧 그의 입을 막는 것보다 그를 보지 않는 게 더 제 심신에 좋다는 걸 깨달았다.
어쨌든 일이 커지진 않았으니까.
수영은 둘을 뒤로하고 먼저 걸음을 옮겼다.
위이잉…….
그때, 그녀의 휴대폰이 제 존재감을 뽐내었다.
수영은 발신자를 확인하자마자 통화 버튼을 눌러 귓가에 가져다 대었다.
“어. 엄마.”
대수롭지 않게 전화를 받은 채 복도를 거닐던 그녀는 얼마 안 가 멈추어 섰다.
“뭐?”
수영의 이마에 두어 개의 주름이 그어졌다.
“싫어. 안 해.”
평소와 다르게 언성도 조금 높였다. 그러자 주희와 태진 외에도 멀찍이서 따라붙던 이들이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가까이 다가갔다.
“싫다니까? 아니 엄……! 엄마!”
사람들이 바짝 뒤에 쫓아올 때까지도 목소리를 낮추지 않은 수영은 통화가 일방적으로 끊기고 나서야 사그라들었다.
“아, 진짜…….”
“최 팀장, 무슨 일이야?”
미처 다 내지 못한 성질에 수영이 씩씩거리고 있는 틈을 타 주희가 조심스레 물었다.
수영은 여전히 가라앉지 못한 흥분에 인상을 일그러트리며 대답했다.
“집에서 자꾸 소개팅이니 뭐니…….”
“자기 소개팅 잡혔어?”
“네? 아뇨, 아…….”
“어머. 어머머. 세상에.”
이미 처음 대답이 너무 강력했다. 수영의 끝내지 못한 첫 대답만으로도 주희의 흥미를 끌기는 충분했고, 그녀는 손뼉까지 치며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하긴 자기도 연애 안 한 지 꽤 되지 않았나? 그렇지?”
“…….”
“그래서? 누…….”
“과장님. 과장님!”
“응? 아……. 흠흠.”
잠시나마 모두가 잊고 있었다.
지금은 점심시간이고, 모든 직원이 한데 쏟아져 나오는 시간이며, 유일하게 태진이 수영을 따라다니는 시간임을.
아까부터 줄곧 저들과 함께 있던 태진을 깜박 잊고 있던 주희는 그의 눈치를 보며 자신을 말리는 성 대리의 제지에 겨우 정신을 가다듬었다.
“……소개팅?”
충격을 받은 건지, 이제야 입을 열 생각이 든 건지. 태진이 뒤늦게 입을 열었다.
“최 팀장, 소개팅 나가요?”
‘누구 마음대로?’라는 말이 그의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차마 꺼낼 수는 없어 답답함에 침을 삼켰다.
잠깐이지만 정적이 흘렀다.
성 대리는 급기야 입을 틀어막았고, 주희는 흥미진진하게 태진과 수영을 번갈아 가며 보았다.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태진을 보고 수영이 얼빠진 표정으로 “네?” 하고 되묻다 말고 미간을 좁혔다.
“아마도요.”
“…….”
“제가 원해서 가는 건 아니지만요.”
싫다고 해도 무작정 가라고 할 사람이다, 수영의 어머니는.
자신들도 소개팅으로 만나 천생연분을 이어 가고 있다며, 당신들의 딸도 소개팅에서 인연을 만날 거라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는 부모.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엄마도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을…….’
이번에는 제대로 파투 내고 와야지.
당장은 피할 수 없으니 이후에라도 부모 쪽에서 이런 이야기를 못 가져오도록 수를 쓸 셈이었다.
“뭐 하는 사람이라는데?”
“과장님……. 본부장님도 계시는데.”
“아이. 그래도 궁금은 하잖아. 어차피 본부장님보다 대단한 사람이 나올 것도 아닌데, 뭐. 안 그래?”
“그건 그렇지만…….”
태진의 눈치를 살피던 성 대리는 주희의 대꾸에 금세 수긍하며 말끝을 흐렸다.
그녀의 대답에 태진은 퍽 만족스러웠던 듯 한쪽 입꼬리를 실룩거리면서 잠자코 그들을 뒤따랐다.
태진을 한 번 더 힐끔 쳐다본 주희는 수영에게 바짝 다가가 거듭 물었다.
“그래서? 뭐 하는 사람이래?”
“네? 아. 공무원이래요.”
“음. 괜찮네. 안정적이고.”
“그런…… 가요?”
수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한 거였다. 그냥 물어보기에 대답해 준 것뿐.
그러나 그녀의 말을 듣고자 하는 귀는 많았고, 특히 당장이라도 레이저를 쏠 것 같은 태진의 눈빛에 수영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그럼. 요즘 같은 세상에 안정감이 제일 좋지. 나이는?”
“저보다 2살인가, 3살 많다고 했던 것 같아요.”
“어머, 어머. 딱 좋네!”
한데 왜일까. 분명 눈을 피했는데 진태진의 얼굴을 바로 앞에서 마주하는 것 같았다.
주희가 묻는 말에 대답할 때마다 성 대리가 말리는 소리와 태진의 목 가다듬는 소리가 이어 들렸다.
“과장님…….”
“응?”
급기야 성 대리가 주희를 붙잡아 끌었고, 한껏 신나 있던 주희는 텐션을 잃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려 보았다.
“…….”
그러자 곧바로 마주한 태진의 미묘한 표정에 머쓱히 웃으며 연달아 치던 손뼉을 거두었다.
“아니, 뭐……. 또 남의 연애가 그렇게 재밌더라고.”
그러면서 나름대로 변명이라며 중얼거리는 말이 더욱 태진의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공무원? 안정? ……게다가 연상?’
“하…….”
태진은 속이 부글부글 끓는 기분이었다.
‘나를 두고?’
어떻게 저를 두고 다른 사람을 소개받을 수 있느냐며 따지고 싶다가도, 그 주선자가 그녀의 어머니라 하니 그럴 수 없어 속이 더 답답했다.
결국 그는 답답함과 서운함이 폭발했는지 입 밖으로 조소를 흘려보냈다.
태진이 마저 입을 열었다.
“그 남자 머리가 나쁜가 보네.”
그게 둘 사이의 작은 언쟁의 씨앗이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딱 들어도 가시가 가득한 말에 수영이 미간을 좁히며 몸을 틀었다.
허튼소릴 했다가는 노성이라도 지르겠다는 낯이었다.
하나 그런 수영의 반응에도 태진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 할 말을 내뱉었다.
“같은 공무원도 많은데 왜, 굳이 최 팀장이랑 소개팅을 하냐는 거죠.”
“…….”
“아니, 여자가 그렇게 없나?”
“뭐라고요?”
수영은 수영 나름대로 소개팅을 파투 낼 생각이었다.
다시는 제 부모가 그런 소리를 하지 않도록 그럴싸한 계획을 머릿속에 굴리는 중이었는데.
방금 뚫린 입이라고 지껄인 태진의 비아냥거림에 수영은 조금 전까지 세웠던 계획들을 뒤엎었다.
‘내가 못 할 줄 알고?’
수영이 저 혼자 팔짱을 끼곤 짝다리를 짚은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본부장님이 뭘 모르시나 본데요.”
그녀는 한쪽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말을 이었다.
“이분, 제 사진 보고 딱 한 번만이라도 만나게 해 달라고 사정사정해서 만나는 거거든요? 제가 너어무 마음에 들어서요.”
순전히 오기였다. 진태진 따위에게 말싸움에 질쏘냐, 하는 정말 단순한 오기.
“뭐…… 뭐?”
그게 통한 걸까. 태진이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수영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더욱 쏘아붙였다.
“누구처럼 앞에서 대놓고 면박 주는 사람이랑은 다른 분이라고요, 이분은.”
“누, 누가 대놓고 면박을 줬다고 그래요? 내가 언제?”
“어머나. 그 누구가 본부장님이라곤 말씀 안 드렸는데. 찔리셨나 보다.”
“…….”
“괜히 본부장님 기분 안 좋으신 거로 트집 잡지 마시고 갈 길 가시죠.”
이겼다.
수영은 생각했다. 비록 조금은 과장이 없지 않아 있지만 어쨌든 거짓은 아니었다.
어쩌다 우연히 닿은 인연의 지인이라 했다. 그 인연이 소개팅 주선을 위해 내민 자신의 사진을 보곤 만나 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먼저 꺼내었다며.
‘엄마가 해 준 소리기는 하지만.’
어쨌든 제가 태진에게 거짓말을 한 건 아니니까.
수영은 흥, 하고 콧바람을 세게 불며 태진을 등져 돌았다.
“트집이라니……. 쟤는 남의 속도 모르고…….”
그렇게 ‘홀로’ 남겨진 태진은 그 자리에서 한참을 중얼거렸다.
‘최수영을 만나게 해 달라고 사정했다고?’
표정도 좀처럼 풀어질 줄을 몰랐다.
‘대체 어떤 놈이야?’
“어떤 놈이길래 최수영을…….”
이러다 정말로 수영이 자신은 얼굴도 모르는 남자에게 가 버릴까, 급격히 불안감이 몰려왔다.
‘그렇게는 안 되지.’
태진은 주먹을 꽉 쥐곤 굳게 결심한 눈으로 수영의 뒷모습을 주시했다.* * *
기어이 주말.
“후우.”
동네 프랜차이즈 카페 앞에 다다른 수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심호흡 말고 한숨을.
“으…….”
솔직히 조금 후회했다.
며칠 전 진태진 때문에 홧김에 소개팅을 받아들였던 자신의 결정을.
‘다음엔 엄마한테 확실하게 말해야겠어.’
다시는 이런 불편하기만 한 자리는 만들지 말았으면.
사람도, 만남도 편한 게 좋다. 새로운 사람보단 익숙한 게 좋은 편.
“휴!”
근데 어쩌겠는가. 이미 여기까지 왔는데.
수영은 기합이 바짝 들어간 숨을 한 번에 내쉬곤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두리번두리번. 휴대폰을 꺼내어 사진과 함께 카페 내 사람들을 번갈아 가며 보았다.
‘어디 있……. 아, 저기 있다.’
몇 번을 더 살피고 나서야 발견한 수영은 목을 가다듬으며 가운데쯤 자리에 앉아 있는, 말끔하게 생긴 남자에게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