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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몇 발자국 걸었을까.
“…….”
쏴아아아.
처음부터 없던 재수는 생기지 않으려는지 분명 잠깐 그쳤던 빗방울이 또다시 쏟아져 내렸다.
“아, 진…….”
그와 동시에 머리를 가리려던 수영의 손짓이 멈추었다.
하늘은 누군가 의도적으로 가린 것처럼 새까맣게 변하였고, 제 몸을 적시던 것은 온데간데없었다.
덕분에 입 밖으로 짜증을 토하려던 수영의 말문도 막혀 버렸다.
“웬만하면 타고 가.”
이윽고 태진의 음성이 소음을 뚫고 귓속에 파고들었다.
“너 우산 없잖아. 비 맞으면 감기 걸려.”
“…….”
마치 이럴 걸 알고 있었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모든 게 진태진이 알고서 꾸민 일 같아 의문과 불신이 피어올랐다.
그가 스스로 원하는 상황을 다 만들어 놓고 제 마음대로 주무르는 것 정도는 익히 경험했던 그녀에게는 합리적 의심이었다.
“최수영?”
“…….”
한데 어쩌겠는가. 그의 말대로 현재 저는 우산이 없는걸.
여기서 집까지 가려면 1시간. 버스와 지하철을 포함하여 두 번이나 환승해야 했다.
수영은 마지못해 뒤돌아 태진을 마주 보았다.
“네 차.”
절대 네놈이 좋아서 차를 타는 게 아니다. 물에 빠진 생쥐가 되어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을 뿐.
“어디 있는데?”
그녀의 의도가 잘 드러난 모양이었다.
“저쪽에.”
평소라면 한 번쯤 더 장난쳤을 태진이 군말 없이 뒤쪽을 가리켰다.
“앞장서. 빨리 집에나 가…….”
꼬르륵.
하나 그것도 잠시, 둘 사이에 익숙하고 민망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근원지는 모처럼 잔뜩 무게를 잡고 말을 잇던 수영이었다.
정확하게는 수영의 배 속.
그녀의 위장은 그다지 무게를 잡을 생각이 없는지 눈치도 없이 요동쳤다.
“풉.”
그리고 그 소리를 듣지 못했을 리 없는 태진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 씨…….”
왜 이럴 때 소리가 나고 난리냐. 쪽팔리게.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아무것도 안 먹은 게 문제였다.
“크흠! 흠흠!”
수영의 얼굴이 달아오르는 사이, 겨우 웃음을 참아 낸 그가 말을 이어 했다.
“야. 밥 먹고 가자.”
“뭐? 싫어. 내가 왜.”
“벌써 11시야. 어차피 비 오면 차 막혀서 일찍 못 가. 밥 먹자. 배고프잖아.”
“…….”
뒤에 ‘배고프잖아.’ 하는 게 괜히 더 민망하고 얄미웠다.
수영이 입을 꾹 다물곤 대꾸를 하지 않자 태진의 입꼬리가 더 휘어 올라갔다.
“빨리 와.”
그러더니 그녀의 바로 옆에 있는 식당으로 훌쩍 들어가 버렸다.
“뭐야. 자기 멋대로…….”
우산은 자기한테 쥐여 주고 사라진 태진의 빈자리를 빤히 쳐다보았다.
“우산은 왜 날 준 거야?”
알아서 접고 오라는 건지. 그의 행동이라면 무엇 하나 도저히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던 수영은 콧바람을 흥, 불었다.
‘그래.’
까짓것 먹고 가지, 뭐.
비도 오고, 슬슬 점심 먹을 때도 됐고.
상사가 사 주는 공짜 밥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마음이 다 편해지네, 아주.’
수영이 콧잔등에 주름을 연신 잡더니, 큰 우산을 홱 접고 식당 문을 열어젖혔다.
발은 아직 안으로 내딛지도 않았는데 고소한 냄새가 두 팔 벌려 그녀를 환영했다.
‘대박.’
코끝을 자극하는 참기름 냄새에 조금 전 배고픔에 민망했던 기억은 온데간데없고, 꼭 먹어야겠다는 의지만이 남아 있었다.
고개를 두리번거리자 벌써 자리 잡고 앉아 있는 태진이 눈에 들어왔다.
수영은 억지로 끌려온 사람처럼 한껏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다가와 그의 앞에 자리를 잡았다.
“뭐 먹을래?”
슥, 메뉴판이 잘 보이도록 내밀자 자연스레 수영의 눈이 아래로 향했다.
보리밥.
된장찌개.
청국장.
대충 보아도 무난한 밥집이었다.
수영은 깊은 생각 없이 적당히 메뉴를 정하려 입술을 벌렸다.
“어……!”
그러나 마지막으로 읽은 글자에 말을 하다 말고 멈추었다.
수육.
돼지고기를 각종 재료와 같이 넣고 삶아 야들야들하고 고소한 맛을 내는 단백질과 지방이 적절히 섞인 그것.
맛있는 거.
‘아 씨, 맛있겠다.’
먹고 싶다.
수영이 잠깐이나마 눈을 반짝이며 침까지 꼴깍 삼켰다.
그러나 그녀는 진태진 앞에서 진태진이 흠잡을 만한 행동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아무거나.”
하여 최대한 정적인 모습으로 단조로이 목소리를 내었다.
배고프다는 티는 줄줄 내놓고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다는 듯 새침했다.
“그래.”
그에 태진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여기 주문요.”
그저 작게 웃으며 대답한 뒤, 손을 들어 온 종업원들의 시선을 빼앗을 뿐이었다.
종업원 1명이 가까이 다가오자 태진의 말이 이어졌다.
“저희 보리밥 둘…….”
“보리밥 둘이요.”
“수육도 하나 주세요.”
“네. 수육도 하나.”
신속하게 그의 말을 받아 적던 종업원은 고맙다는 말과 함께 메뉴판을 갖고 사라졌다.
둘의 대화가 끝날 때까지 내내 심드렁한 낯이던 수영의 눈썹이 조금 일그러졌다.
제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한 것처럼 추가한 메뉴에 보인 반응이었다.
태진은 그런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키득거렸다.
“먹고 싶으면 말을 하지. 메뉴판 닳겠더라.”
“야. 내가 언제. 그냥 꼼꼼하게 본 거지.”
아 씨, 그건 또 어느 틈에 봐서.
“아, 그럼 취소할까? 여기…….”
“아니!”
선뜻 주문을 취소하려는 태진의 행동에 수영이 다급히 말꼬리를 이었다.
“취소까지 하냐, 너는. 시켰으면 먹으면 되지.”
어찌나 급했는지 손끝 하나도 닿기 싫어했으면서 덥석 그의 손까지 잡았다.
단순히 놀리기만 하려 했던 태진은 예기치 못한 수영의 손길에 멈칫했다.
부드럽게 감싸 쥐곤 어떻게든 제가 아닌 수육을 사수하려는 눈빛.
“그래, 그럼.”
그는 못 말리겠다는 듯 웃었다.

* * *

“맛있게 드세요.”
기다리고 기다리던 음식이 나왔다.
앞에 놓이자마자 콧속 깊숙이 들어오는 음식 냄새에 수영이 입을 쩍 벌렸다.
‘맛있겠다.’
뭐부터 먹을지 고민된다.
‘밥? 고기?’
몇 번을 번갈아 가면서 보던 그녀는 이내 젓가락으로 수육 한 점을 집어 들었다.
곧 맛볼 생각에 눈을 반짝이던 수영은 입이 벌어진 순간, 다시금 눈이 가늘어졌다.
“왜 자꾸 쳐다봐?”
자꾸만 저를 보며 히죽대는 태진 때문이었다.
음식이 앞에 한 상 차려져 있는데 식욕도 없는지 수저를 들 생각이 없어 보였다.
“부담스럽게.”
그럼 그냥 자기 할 일을 하면 되는데 부담스럽게 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거슬린 수영이 시니컬하게 묻자 태진이 곧장 대답했다.
“그냥. 웃기게 생겨서.”
“뭐? 이게 진짜.”
이게 말이야 방귀야. 사람한테 대놓고 웃기게 생겼다니.
그래서 그렇게 바보 같은 얼굴로 히죽거리면서 봤나 보다.
수영이 어이가 없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젓가락을 내려놓으려 했다.
“얼른 먹어. 다 식겠다.”
“…….”
그랬더니 또 제 욱하는 표정을 읽었는지 말을 돌린다.
“됐다.”
‘말을 건 내가 바보지.’
수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마저 입 안으로 수육을 밀어 넣었다.
맛은 상당히 좋았고, 차마 표정을 감추기 힘들 정도였다.
그 때문에 절로 입매가 휘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제 앞에서 망부석처럼 앉아 쳐다보는 태진 덕에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보다 못한 수영이 입을 열었다.
“야.”
“왜?”
“너 사람 좀 그렇게 안 쳐다보면 안 돼?”
“왜?”
“왜…….”
왜냐니. 당연히.
“부담스러워.”
“내가 부담스러워? 난 그냥 네가 잘 먹길래 쳐다보는 건데.”
“됐고. 먹는 사람 그렇게 쳐다보면 밥이 안 넘어가잖아.”
“그래. 네가 싫다면 뭐.”
“그리고 평소에도.”
웬일로 태진이 순순히 대답했다.
이 기세를 몰아 분명히 선을 긋자. 수영은 그리 생각하며 마저 입을 열었다.
“웬만하면 나 쳐다보지 마.”
“그건…… 왜?”
“…….”
김 대리님이 너 좋아한대. 그래서 날 거의 죽일 듯이 노려봐. 죽고 싶지 않으니까 자제해 줄래?
수영은 이 말이 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제발 좀 저와 엮이지 말아 달라고.
“……그냥.”
한데 왜일까. 쉽사리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아마도 제삼자인 제가 남의 마음을 멋대로 말할 수가 없어서일 터.
‘그래. 그거지.’
수영은 확신했다.

* * *

“들어가.”
비는 집에 다다를 때까지도 쏟아지고 있었다.
“그래.”
아파트 현관 앞에 멈춰 선 수영은 태진의 말에 무심히 대답해 주었다.
“너도 가라.”
왜인지 쫓아내는 것 같은 뉘앙스이기는 하지만 태진은 기분 나쁜 기색을 보이기는커녕 웃기만 했다.
“그래. 배웅해 줘서 고맙다.”
“…….”
“갈게. 월요일에 봐.”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언행으로 마지막 인사를 마친 그는 한 발짝 뒤로 걸음 했다.
그렇게 아침부터 무산된 등산으로 시작한 태진과의 만남이 끝나는가 싶었다.
“어? 최수영 팀장님?”
둘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의아함 가득한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는.

밀당하는 사이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