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1 0 0
                                    

“너는 진짜…….”
기어이 다시 돌아온 차 안. 태진이 한숨을 푹푹 내쉬며 수영을 타박했다.
“말 지지리도 안 듣는다. ……자리 불편하면 뒤로 더 젖혀.”
그러는 와중에도 운전대는 꽉 잡고, 혹시나 불편할까 봐 수영의 자리를 연달아 살폈다.
“됐네요.”
수영은 심드렁히 대꾸했다.
시간은 아직 밤 10시. 충분히 저 혼자 집으로 갈 수 있는 시간인데 태진에게 제지당했다.
자기 차를 타고 가지 않으면 절대 보내 주지 않겠다는 으름장 탓이었다.
어찌나 걸음이 빠른지 금세 저를 지나쳐 문 앞을 딱 가로막고 보내 주지도, 움직이지도 못하게 했다.
수영은 정말 어쩔 수 없이 혼자 가기를 포기한 거였다.
뭐, 일단은 그렇다.
수영이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곤 꿍얼거렸다.
“차는 더럽게 좋네…….”
회사에서 타고 봤던 차도 좋았는데 이건 차원이 다르다.
뭔 놈의 차를 두 대씩이나 갖고 있는지. 그와 관련된 모든 점들이 현재 수영의 눈에는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괜한 심술이 나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그래도 얼굴을 마주하고 있지는 않으니 진태진에게 보이지 않겠지. 수영은 그게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했다.
“하.”
그런 생각을 하는 그 얼굴까지. 창가에 언뜻언뜻 보이는 그녀의 표정을 다 지켜보던 태진은 실소를 터트렸다.
그의 눈엔 백 번을 넘게 봐도 귀여운 얼굴을 가만히 보기만 해야 한다는 사실이 애석할 지경이었다.
‘미치겠네, 진짜.’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얼굴로 10여 분을 더 간 후, 수영의 집에 다다른 차가 멈추었다.
슈웅.
동시에 시동도 꺼졌다.
수영이 안전벨트를 풀자 태진도 그녀를 따라 안전벨트를 풀었다.
이상함을 느낀 그녀가 눈썹을 비틀었다.
“뭐냐, 너?”
“뭐가.”
“네 안전벨트는 왜 풀어?”
설마 내리려는 건 아니겠지.
의심을 지우지 않은 눈빛이 올곧게 태진을 향했다.
그는 어깨를 한 번 으쓱이며 태연한 낯으로 대꾸했다.
“집 앞까지만 가게.”
“…….”
“……아파트 현관 앞. 와, 1분이나 걸리겠다. 너무 멀다. 그렇지?”
“…….”
말이라고 들어 주고 싶어도 말이 안 되는 소리.
수영은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얼굴로 차에서 내렸다.
“야. 같이 가.”
태진은 놓칠세라 다급히 그녀를 따라 나갔다.
“최수…….”
“어? 야. 최수영!”
수영을 뒤쫓던 찰나. 때마침 들리는 귀에 익은 소리에 태진이 말끝을 흐렸다.
이내 소리가 난 쪽으로 돌리자 이제 막 집으로 들어가려는 수진이 서 있었다.
트레이닝복에 점퍼, 이 추운 날씨에 슬리퍼로 마무리한 차림에 양손 가득 든 봉투.
뭔가 단단히 준비한 모양새였다.
수진이 설렁설렁 걸어와 마저 입을 열었다.
“왜 이제 들어와? 술 마셨어?”
“어? 어. 언니는?”
“나 편의점. 오늘 영화나 볼까 했지. TV에서 시리즈로 정주행 해 준다더라.”
“아아…….”
수영은 별생각 없이 끄덕였다.
“안녕하세요, 누나.”
그때 멀리서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태진이 수영의 앞에 서선 활짝 웃어 보였다.
“어? 태진이? 너 진태진 맞지?”
그와 동시에 수진이 놀란 기색과 함께 화답했다.
“오랜만이다! 어? 뭐야. 그럼 너희 둘이 술 마셨냐?”
“무슨 소리야. 술은 회사 사람들이랑 마셨어.”
둘이 수상한데, 라는 뉘앙스를 가득 담은 물음에 수영은 단호히 쳐 냈다.
“빨리 들어가자. 춥다, 언니.”
“가만히 좀 있어 봐.”
“아, 빨리 들어가자고.”
“글쎄 기다려 보라니까? 그럼 너 혼자 술 먹은 건데 얘가 데려다줬단 소리야?”
“맞아요, 누나. 제가 데려다줬어요.”
“뭐야. 둘이 사귀어? 언제부터?”
“아직 사귀…….”
“아, 언니! 야, 너 집에 안 가?”
미쳤어, 진짜. 둘 다 왜 이래?
이상한 질문을 하질 않나, 이상한 대답을 하질 않나. 뭐가 좋다고 히죽거린담.
태진의 저 올라가는 입꼬리를 보고 있자니 진짜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수영이 몸을 홱 돌려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제 언니에겐 보이지 않을 표정과 눈빛으로 그에게 욕지거리를 쏟아 냈다.
당장 돌아가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
틀림없이 그렇게 말했는데.
그녀의 언니는 그녀와 생각이 전혀 다른 듯했다.
수진이 휴대폰 화면을 쓱 보더니 말을 이었다.
“들어가서 차라도 한잔하고 갈래?”
“네? 네. 전 좋죠.”
“좋긴 뭐가……!”
‘와, 저거 냉큼 대답하는 거 봐.’
“언니. 왜 그래?”
‘언니, 이 정도로 정나미 있는 사람 아니었잖아?’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다만 차오르기만 할 뿐, 입 밖으로 내진 못하였다.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언니에게 하기엔 제 밥이 끊길 위험한 발언이니, 차라리 다른 말로 설득하는 게 나았다.
수영이 최대한 사정이 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시간도 늦었는데 그냥 보내자. 다음에 보면 되잖아.”
“야. 자기는 술도 안 먹었는데 너 데려다준 사람한테 너무 매정한 거 아니냐?”
그러나 수진은 그런다고 설득당할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 내가 오라고 한 것도 아닌데.”
“뭐? 야. 그러니까 더 고마워해야지. 너 진짜, 태진이가 착하니까 다 해 주는 거야.”
어쩐지 대화가 오갈수록 그녀가 설 자리는 점차 줄어드는 듯했다.
급기야 수진은 되레 그녀를 나무라며 태진의 편을 들기 시작했다.
“네가 쟤 때문에 고생이 많다, 태진아. 들어와. 셋 다 아는 사인데 뭐 어때. 아직 영화 시작 전이니까 차라도 마시고 가.”
“네, 누나.”
수진은 막무가내였고, 태진은 막무가내인 그녀를 기쁜 마음으로 따랐다.
이 상황을 좋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수영뿐이었다.
“아, 씨…….”
금세 아파트 안으로 들어서는 둘을 보며 수영은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 * *

“그날 이후로 처음이지?”
엘리베이터에서부터 집 안까지 쉴 새 없이 떠들던 수진이 테이블 딸린 의자에 앉자마자 차를 건네었다.
“올해 초에 쟤 업고 온 날.”
굳이 수영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날을 언급하면서.
“네. 맞아요.”
그 심정을 이 두 사람이 알 리가 있나. 태진은 여전히 헤실거렸다.
“누나 기억하시네요.”
“당연하지. 쟤가 그렇게 누구한테 업혀 온 적이 없었거든.”
“정말요? 걱정 많이 하셨겠다.”
“뭐, 그렇긴 한데 그래도 네가 데리고 와서 다행이었지. 안 그래도 그때 그냥 보내서 좀 미안했는데.”
“괜찮아요. 제가 뭐 얘한테 바라고 잘해 주나요.”
“어이구. 여전하다, 너는.”
둘의 대화는 거리낌이 없었다.
본디 남의 이야기가 가장 재미있다고 했던가. 저들의 사이에 대화의 주제인 수영이 있든 말든 그건 나중 문제인 듯싶었다.
수영은 혼자 팔짱을 낀 채 둘을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쳐다보았으나 수진은 자신의 동생에 대한 존중 따위는 개미 눈곱만큼도 없는 물음을 이어 했다.
“근데, 둘이 진짜 안 사귀어?”
“언니.”
“네. 안 사귀어요.”
“왜? 학교 다닐 때 엄청 붙어 다니더니. 하긴, 10년이면 있던 감정도 무뎌질 때긴 하지. 다시 보니까 얘가 별로긴 하지?”
“야, 최수진!”
급기야 듣다 못한 수영이 버럭 소리쳤다.
싫다는데 왜 자꾸 그런 쪽으로 저를 몰아가는지, 진심 어린 짜증이 솟구쳤다.
하나 그 짜증도 수진에게는 가시 바늘만큼도 못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오히려 눈썹을 꿈틀거리며 대꾸했다.
“언니한테 야? 최수진?”
“아니……. 그런 얘기 그만하라고.”
“그럼 너희 둘이 같이 들어오질 말던가. 사람 궁금하게 해 놓…… 어?”
그러다 무심코 돌린 시선의 끝에 보인 TV 화면에 수진이 급히 일어섰다.
“시작한다!”
그러곤 홀라당 자리를 떠나 소파를 등받이 삼아 앉았다. 그녀의 자세는 이미 시청 모드였다.
“으이구, 저 영화 폐인.”
이야기를 하다 말고 보이는 엄청난 집중력에 수영은 한심하다는 낯을 띠었다.
“넌 영화 안 좋아하냐?”
그녀의 눈치를 보던 태진이 슬쩍 물었다.
“뭐? 아니? 좋아하는데.”
“그럼…….”
“혼자 보는 거.”
그녀의 단호한 대답에 같이 보러 가자고 하려던 태진의 말이 쏙 들어갔다.
이렇게 틈이 없으니 그가 무얼 할 수가 없었다. 아마도 수영은 그걸 바라고 있겠지만.
그는 반색하던 표정을 지우곤 입맛 다시는 시늉으로 바꾸었다.
“너 이제 슬슬 갈 때 안 됐냐?”
그러거나 말거나 수영은 빨리 그를 내보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여 수영은 자꾸 그를 재촉했다.
“얼른 가.”
“나도 영화 좋아하는데.”
“그래. 29번이니까 네 집 가서 TV로 보라고.”
“…….”
‘야박하기는.’
태진의 낯에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 흘러내릴 듯했다.
그럼에도 그녀의 표정은 조금의 변화도 없었고, 결국 그는 체념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래. 알았다.”
‘회사에선 얼굴 잘 보여 주지도 않으면서.’
태진은 좀처럼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마음 같아선 안 나갈 거라며 고집이라도 피우고 싶지만 그랬다간 그녀가 정말로 싫어할까 봐 그러지도 못하였다.
결국 그는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밀당하는 사이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