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0 0 0
                                    

다시, 수영이 팀장직을 맡은 지 열흘 후로부터 6개월이 지난 시점.
저마다 갖가지의 생각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오후 3시 12분.
수영이 서랍을 열어 흰 봉투를 꺼내었다.
그녀는 지체 없이 곧장 태진에게 다가갔다.
“본부장님.”
봉투를 그의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이름을 불렀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본부장님?”
수영은 동요하지 않고 거듭 그를 불렀다. 그제야 수영과 눈을 마주한 그는 환하게 웃음 지었다.
“무슨 일이에요, 최 팀장?”
“여기요. 꼭, 수리 부탁드립니다.”
“이게 뭔데요?”
수영도 그 웃음에 맞게 눈을 휘었다.
“사직서요.”
“예?”
그리고 이어지는 물음에 내뱉은 단어. 사직서.
“…….”
정적이 흘렀다. 새삼 그는 수영이 한 말에 충격이라도 받은 듯했다.
누가 보면 잘 지내던 사람이 대뜸 못 할 짓이라도 한 것처럼.
“뭐……. 뭘 냈다고?”
“사직서, 라고 말씀드렸는데요.”
제가 잘못 들은 건가 싶어 되묻는 그에게 수영은 여전히 웃으며 대답했다.
“……하.”
헛웃음을 내뱉는 그의 낯은 적잖이 황당하다는 표정이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아니, 최 팀장 잠깐 나 좀 봅시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수영이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그가 먼저 앞장서 걸어간 곳은 회의실이었다.
달칵.
“지금 뭐 하는 거야.”
그는 그녀가 저를 따라 들어와 문을 닫기 무섭게 입을 열었다.
치밀어 오는 감정을 최대한 꾹 눌러 담아 말하는 게 느껴졌다.
그녀가 벌인 상황에 흥분하여 목에서부터 차츰 붉어지는 게 선명하게 보였다.
하나 수영은 올곧은 시선을 유지한 채 되물었다.
“사직서에 무슨 문제…….”
“사직서를 낸 것 자체가 문제라고, 지금.”
태진이 눈을 부릅떴다.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눈빛이었다.
“이게 뭐 하자는 건데. 갑자기 왜 떠나겠다는 거냐고. 말도 없이.”
“…….”
“최수영. 대체 뭐가 문제냐고 묻잖아.”
몇 번이고 따져 물었지만 그녀는 이상하리만큼 답이 없었다.
입을 꾹 다물곤 빤히 그를 쳐다보는 게 전부였다.
그래서 더 답답했다. 태진이 손에서 최대한 힘을 빼고 그녀의 양 팔뚝을 붙잡았다.
고개가 아래로 푹 꺼졌고,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발 대답해.”
“무슨 기분이야?”
이윽고 그녀의 입술이 벌어졌으나 그는 그 물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태진이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그게 무슨…….”
“네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을 누군가 마음대로 저질러 버리는 걸 보는 기분이 어떠냐고.”
“…….”
“난 기분 진짜 더러웠는데. 네가 네 맘대로 저질러 버려서.”
“……뭐?”
“그럼, 네가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했던 방금은. 어때?”
“최수영.”
“기분 나쁘지?”
“최수영!”
급기야 태진이 버럭 소리쳤다.
“…….”
순간의 정적. 수영이 대꾸를 하지 않은 탓에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그는 한숨을 깊게 내쉬다 떨림을 겨우 잡아낸 음성을 내뱉었다.
“이해되게 말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대체 어디가, 어떻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런 소리를 한 건지.
태진은 그게 궁금했다. 알아야 했다.
그것만 알면, 그걸 해결하면 수영이 방금 자기가 한 말을 번복할 거다. 그는 감히 확신했다.
그러나 그의 확신 따위는 한낱 종잇장보다도 못하다는 듯.
“너 때문이라고. 내가 여기 떠나는 거.”
“……뭐?”
그녀는 태진의 속을 갈기갈기 찢어 댔다.
“그게…… 그게 무슨 소리야.”
태진은 말도 잘 나오지 않아 목에 힘을 주고 거듭 소리를 내었다.
“왜 나 때문인데.”
눈동자가 흔들리고, 자꾸만 시선이 갈피를 못 잡듯 움직였다.
그런 그를 똑바로 마주한 수영은 단 한 번의 표정 변화도 없이 대답했다.
“왜? 이해가 안 돼?”
“당연히 안 되지. 너 같으면 이해가 되겠어?”
“너 진짜, 너밖에 모르는구나?”
그러다 황당하기 그지없는 이야기를 들은 얼굴로 헛웃음을 토했다.
“너도 기분 나쁠 거 아니야. 이 상황이 네 마음대로 안 돌아가서. 원하는 대답을 못 들어서.”
“…….”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으니까.”
아주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겠지. 남이 느꼈던 건 생각도 안 하고.
수영은 점점 더 감정이 북받쳐 오름을 느꼈다.
“넌 한 번이라도 내 말 제대로 들어 준 적 있어? 내가 아는 척하지 말아 달라고 했을 때,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긴 했냐고.”
“…….”
“안 해 봤겠지. 넌 내 말 정도는 가볍게 무시하는 애니까. 네 말에 내가 몇 번이나 놀아났으니까.”
태진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든, 어떤 생각을 하고 있든.
“셀 수가 없어. 내가 너 때문에 포기한 것만 세어도 열 손가락이 모자라. 얼마나 벗어나고 싶었는데. 너한테서.”
현재 그녀에겐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너는 하나도 변한 게 없더라. 네 맘대로 날 쥐려는 것도, 모든 상황이 네 위주로 흘러가게 하려는 것도 전부.”
그저 제 화가 풀리는 것에만 집중한 채 온갖 말들을 쏟아 내었다.
“지금도 봐. 너는 첫사랑 잊지 못한 순정남이고 나는 널 받아 주지 않은 나쁜 년이야. 난 처음부터 네가 싫었는데, 다들 내가 너 안 받아 주고 여기저기 재고 있는 거라더라.”
“……그만해.”
“그것뿐인 줄 알아? 이젠 내 실력도, 내 위치도 의심받아. 내가 언제 너한테 도와 달라고 했어? 안 했잖아. 그냥 네 말과 행동이 내 모든 걸 의심받게 했다고.”
“최수영.”
“근데 내가 어떻게 여길 더 다니겠어. 네가 있는데. 너랑만 있으면…….”
“수영아, 그만.”
그러다 거듭되는 그의 만류에 정신이 돌아온 수영이 말끝을 흐렸다.
“이제 그만해도 돼.”
제 앞에서 붉게 열이 핀 낯으로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고 있는 태진을 발견한 탓이었다.
“네 말 다 알아들었으니까…….”
그는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 내지도 않은 채 말을 이었다.
“내가 미안해.”
“…….”
“네가 날 이 정도로 싫어할 줄은 몰랐네.”
“그…….”
아니. 사실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제 마음을 몰라주는 것 같아 쏟아 낸 말들이라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실수한 건 아니겠지.
스스로를 검열할 정도로 대단한 성격은 아니지만, 태진이 우는 걸 보니 당황스러웠다.
태진의 말이 이어졌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줄게.”
“…….”
“미안하다. 나 때문에.”
한 음, 한 음 억지로 눌러 담은 감정이 회의실에 울려 퍼졌다.
눈을 감지도 않고 힘을 강하게 주는 탓에 충혈되어 아플 텐데도 저를 보는 시선은 올곧았다.
그에 되레 눈 마주치기가 껄끄러워진 건 수영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홱 돌려 몸을 틀었다.
“그, 그만 가 보겠습니다.”
그렇게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벌컥 문을 열어젖히자 회의실 안과는 다른 공기가 흘렀다.
사람들은 힐끔거리며 눈치를 보는 것 같기도, 그마저도 같잖아하는 것 같기도 했다.
분위기가 원래 이랬나.
고작 퇴사한다는 이야기가 뭐 그렇게 엄청난 말이라고.
‘아주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기분이네.’
수영은 저를 쳐다보는 시선들에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자리로 돌아왔다.
“하아…….”
동시에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이제 그만해도 돼.〉
처음 봤다. 진태진이 우는 거.
어떤 소리를 해도 장난으로 받아들이고, 무슨 말을 해도 웃어넘기는 놈이라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는데.
차라리 그랬으면 이런 기분은 안 들었을 텐데.
‘……됐어.’
신경 쓰지 말자.
‘어차피 다 끝났는데, 뭐.’
뭐가 어찌 되었든 태진이 이번엔 제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인 듯했다.
‘그럼 좋은 건데 왜 이렇게 심란하냐…….’
분명 그만 스트레스 받으려고 관두는 건데 마음 한구석이 아릿했다.
“…….”
수영은 저도 모르게 회의실로 향하는 눈길을 어쩌지 못하였다.

* * *

“자기 진짜 너무해. 어쩜 우리한테 한마디 말도 없이!”
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주희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최 팀장 나간다는 거야 짐작은 했지만서도, 최소한 미리 말은 해 줄 줄 알았는데.”
“…….”
“혹시 우리한테도 서운했던 거야? 응? 최 팀장?”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며 수영을 서운한 얼굴로 노려보았다.
미리 말하지 않은 대가가 이런 걸까. 주희의 매서운 눈빛에 수영이 눈을 또르르 굴리며 말했다.
“그게……. 죄송해요. 저도 갑작스럽게 결정한 거라서요. 근데 우리 팀에 서운한 건 하나도 없어요. 정말로요.”
“근데 그렇게 말도 없이 가? 거짓말이지?”
“진짠…… 데.”
“어휴! 최 팀장 너 진짜!”
“과장님. 진정하세요.”
급기야 보다 못한 성 대리가 주희를 진정시켰다.
“팀장님 힘들어하신 거 아시잖아요. 과장님도 예상하셨다면서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 잠깐, 성 대리, 지금 누구 편이야? 어? 성 대리는 최 팀장이 나가는 게 서운하지 않은가 봐?”
“아이, 서운하죠. 그렇지만 팀장님도 팀장님 나름의 사정이 있으신데 저희가 뭐 어쩌겠어요. 네?”
“…….”
그러자 잔뜩 열이 올라 진정하지 않을 것 같던 주희도 차츰 누그러진 표정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주희는 이내 한숨을 푹 내쉬며 체념한 낯을 띠었다.
“그래. 다른 팀에서 최 팀장을 좀 괴롭혔냐. 걔들이 문제지, 자기가 문제겠어? 최 팀장 잘 생각했어! 어? 더 좋은 곳 많을 텐데, 뭐!”
그러곤 꾸역꾸역 하는 말이라는 게 느껴질 만큼 억지스러운 격려가 이어졌다.

밀당하는 사이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