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째서인지 태진은 저와 달리 당황한 기색도 없었다. 물러서기는커녕 더욱더 제게 가까이 다가와 처연하기 그지없는 눈을 했다.
“나,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진심이야.”
“…….”
“네가 아무리 날 미워해도 나는 너 미워하지 못할 만큼.”
꿀꺽. 마른침이 목구멍으로 힘겹게 넘어갔다.
수영은 머리를 세게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진태진은 진심이다.
그간 몇 번 말한 적은 있지만 그런 것 따위는 다 거짓이라고 둘러대도 이번만큼은 한 치의 변명할 여지 없는 진심.
그래서 더 혼란스러웠다.
이 애의 마음이 너무도 확실해서. 그런데도 정작 수영 본인은 그가 좋은지 싫은지조차 확실하지 않아서.
“진태진…….”
겨우 입술 조금 벌리는 게 이렇게나 힘들 줄은 몰랐다.
“나는…….”
위이잉.
아. 하늘이 주신 기회일까. 때마침 울리는 휴대폰 진동 소리에 수영이 힐끔 액정을 들여다보았다.[언니]
“어, 그러니까…….”
그러곤 눈동자를 또르르 굴리며 말끝을 흐렸다. 무슨 말을 할까, 꽤 오랫동안 고민하던 그녀는 이내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어쨌든, 그때 일은 정말 미안했어.”
휙! 그에게 잡혀 있던 손도 거두었다.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회피라는 걸 알지만 이것 말고는 당장 꺼낼 수 있을 만한 말이 없었다.
“최수…….”
“갈게.”
수영은 자신의 귓속에 파고들려는 목소리를 애써 무시한 채 태진을 지나쳤다.
“…….”
혼자 남은 태진은 꾹 다물었던 입술을 조금 벌려 숨을 내뱉었다.
“또…….”
하, 하는 짧은 숨은 입김이 되어 퍼져 나갔고, 그의 낯은 울음인지 웃음인지 모를 표정을 지었다.
“또 가 버렸네.”
수영을 잡았던 손이 차게 식은 채 애꿎은 허공만 쥐락펴락했다.
그렇게 몇 번. 아무리 쥐려 해 봐도 아무것도 잡히지 않음을 깨달았는지 뒤늦게 태진의 몸이 움직였다.
우당탕탕!
“아악!”
이제 막 차로 돌아가려던 그때.
귀에 익은 목소리와 함께 들리는 무언가 나뒹구는 소리. 조금 떨어져 있음에도 살벌한 소음이 귓전을 때렸다.
“최수영?”
태진은 즉시 고개를 돌려 그녀가 들어갔을 아파트 안을 쳐다보았고, 곧장 뛰어들어 갔다.
“수영……!”
눈이 녹아 물이 질척거리는 복도. 어찌나 미끄러운지 태진도 뛰어가다 휘청일 정도였다.
그러니 수영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이, 엘리베이터 앞에 주저앉아 왼쪽 발목을 감싸 쥐고 있었다.
조금 전의 큰 소리와 비명은 역시나 수영이 낸 듯싶었다.
태진이 부리나케 다가가 그녀를 살폈다.
“왜 그래. 넘어졌어? 괜찮아?”
“너……! 안 갔어?”
“어디 봐 봐.”
동그랗게 뜬 눈이 자신을 향하는데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도리어 놀랍고 민망한 건 수영이었다.
도망치듯 빠져나와서 당연히 태진도 갔겠거니 했건만.
왜 갑자기 얘가 나타나서 제 발목을 잡고 살피고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너 왜 아직도 안 갔어?”
“지금 그게 중요해? 봐 봐. 삐었어? 넘어지는 소리 같기는 했는데.”
“아! 야!”
“아파?”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그 큰 손으로 세게 눌러 놓고 아프냐고? 이게 지금 말이야, 방귀야?
태진의 태연한 물음에 수영이 인상을 확 일그러트렸다.
“……붓겠는데.”
한데 그는 그녀가 그러거나 말거나 한결같이 심각한 얼굴로 제 발목을 살피기 바빴다.
이윽고 태진과 그녀의 눈이 마주쳤다.
“안 되겠다. 병원 가 보자.”
“뭐? 싫어. 뭐 하러. 그냥 살짝 삐끗한 걸 텐데.”
“살짝 삐끗?”
꾸욱.
“아……! 야! 이 미친놈아!”
얘가 미쳤나! 아프다고 분명히 말했는데 또 누르는 건 무슨 심보야!
수영이 급기야 그의 팔뚝을 찰싹찰싹 때려 제지했다.
“아프다니까!”
“그러니까. 가자고, 병원.”
“시…… 싫어.”
고집이라는 거 안다. 지금도 아파 죽을 것 같고, 일어서지도 못할 만큼 힘들었다.
발목뿐만 아니라 넘어지면서 타박상도 같이 생겼다. 그러니 꼭 병원을 가야만 했다.
하지만 태진과 가고 싶지는 않았다. 수영은 차라리 제 언니를 불러 데려가 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태진과 가는 건 너무 쪽팔리고 숨 막힐 것만 같은 탓이었다.
“안 가.”
하여 거절했거늘.
“엄마야!”
태진은 그 거절을 도로 거절했다.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을 거라는 걸 짐작한 그는 다짜고짜 수영을 안아 들어 올렸다.
일명 공주님 안기로.
갑작스러운 들림에 놀란 수영이 비명을 내질렀다.
“야! 내려! 내려!”
그러나 그는 그녀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줄 생각이 티끌만큼도 없어 보였다.
되레 태진의 인상도 조금 찌푸려진 채였다.
“움직이지 마. 무거우니까.”
“그럼 내려 주면 되잖아!”
“싫어. 나도.”
“뭐? 야……! 읏!”
더 이상의 언성 높이는 짓은 무의미했다. 이미 태진은 아파트를 빠져나갔고, 뛰다시피 차로 향하는 바람에 무서워진 수영의 입이 절로 틀어막혔다.
눈은 질끈 감겼고 숨은 왜인지 모르게 참게 됐다.
그러다 어느 순간 걸음을 멈춘 듯한 기분에 슬그머니 눈을 떠 보였다.
차 앞. 태진이 조수석 문을 열어젖혔다.
“다리 안 부딪히게 조심하고.”
“…….”
그러곤 수영을 조심스레 앉혔다.
“안 아파? 어디 안 부딪혔지?”
“…….”
먼지 하나도 발에 안 묻었겠다. 조심은 자기가 다 해 놓고 그리 물어보니 얼마나 민망한지.
눈빛은 또 왜 이렇게 뜨겁고 강렬하냐고.
수영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뭐, 뭐야.’
그런데 이상하다. 단지 끄덕였을 뿐인데 왜 태진이 자꾸만 제게 가까워지는 걸까.
그것도 얼굴이 사선으로.
누가 봐도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일 거라고, 그녀는 장담했다.
더군다나 고백 비슷한 것도 대놓고 받았으니까.
솔직히, 저 역시 조금 흔들린 건 사실이니까.
‘아…… 안 돼!’
수영이 눈을 질끈 감았다. 호흡도 멈추었다.
철컥.
‘……철컥?’
그리고 그게 다였다.
한쪽 눈만 살짝 떠서 보니 태진은 그녀로부터 한참 멀어져 있었고 이어서 차 문도 닫혔다.
“…….”
젠장.
‘쪽팔려, 진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절대로 말 안 할 거다. 절대, 절대로.
‘아니 쟤는 내가 손이 다친 것도 아닌데, 무슨 안전벨트까지 매 준다고 난리야……!’
수영은 화끈거리는 낯에 괜히 태진을 원망했다.
착각은 본인이 해 놓고 남을 탓하자니 양심이 조금 찔리기는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수치사를 할 것만 같아서였다.
이후부터는 순식간이었다.
내릴 때도 탈 때와 마찬가지였다. 병원에 출입할 때는 자연스레 그에게 안긴 상태였고.
주변의 시선이 꽂힐 때마다 왜 부끄러움은 자신의 몫인지.
수영은 도저히 얼굴을 들 수가 없어 진료하는 내내 푹 숙이고 있었다.
“다 됐습니다.”
얼마 후, 붕대가 그녀의 발을 단단하게 감쌌다.
“다행히 크게 접질린 건 아니네요. 그래도 당분간 살살 걸으세요. 목발까지는 안 쓰셔도 될 것 같은데. 혹시 필요하시면 1층에서 구매하시면 돼요.”
“네.”
“이제 가셔도 괜찮습니다. 짐 챙기시고요.”
“감사합니다.”
“…….”
“…….”
의사가 자리를 뜬 뒤 찾아온 정적이 생각 이상으로 길었다.
“크흠.”
이러한 생각은 수영만 한 게 아닌지 태진이 괜히 헛기침을 하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걸을 만해? 목발 사러 갈까?”
“됐어. 안 필요하다잖아.”
“그래도 네가 필요하면 쓰는 거지.”
“됐네요. 아프지도 않아.”
그의 제안을 거절하면서도 시선은 절대 그에게 향하지 않았다. 기어이 말문이 막힌 태진이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쪼그려 앉은 채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곤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수영이 힐끔 그를 내려다봤지만 그는 미동조차 없었다.
“아…….”
나지막한 탄식에 수영은 그가 마음처럼 되지 않는 상황에 화가 난 줄 알았다.
하나 제 생각이 착각이었다는 건 바로 뒤에 이어지는 그의 중얼거림에 깨달았다.
“……다행이다. 큰일 아니어서.”
“…….”
“가자, 집에. 데려다줄게.”
속이 없는 건지, 미련한 건지.
그런 소리를 듣고도 이런 말이 나올까. 덕분에 ‘너 바보야?’ 하는 물음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수영은 안도하며 작게 웃는 태진의 모습에 입술을 짓이겼다.
성질은 나는데 자꾸만 가슴이 간질거렸고, 상황은 최악인데 감정은 이상하게 들떴다.
머리와 심장이 완전히 반대로 향하는 느낌.
수영의 낯이 차츰 붉어져 갔다.
“왜 그래?”
그에 태진이 벌떡 일어서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와 큰 손을 이마에 짚었다.
“열나는 것 같은데. 괜찮아?”
“…….”
“어디 또 아픈 데 있어? 피곤해서 그런가?”
그 와중에 그는 제 마음도 모르고 거듭 저를 걱정하며 다가왔다.
이러다 진짜 큰일이라도 날 것 같아 수영은 그의 손을 뿌리쳤다.
“괜찮아. 피, 피곤해서 그런가 봐.”
“…….”
잠깐이지만 침묵이 흘렀다.
날 선 그녀의 반응에 태진이 멍하니 바라보다 곧 평소와 다름없는 낯을 띠었다.
“그래. 그만 가자.”
그러고는 먼저 밖으로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