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진과 수영의 고개가 동시에 소리 나는 곳을 향했다.
반쯤 돌렸을까. 굉장히 낯익은 얼굴이 저들을 검지로 번갈아 가며 가리키고 있었다.
그 얼굴은 신기해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은 채였다.
1팀의 서 대리였다.
서 대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여기서 뭐 하세요?”
“아, 그게.”
그에 곧바로 태진이 입을 벌렸다.
그는 수영에게서 한 발짝 멀리 떨어져 살짝 웃어 보였다.
“며칠 전에 팀장님들이랑 등산 가기로 한 거, 비 때문에 취소돼서 이제 막 집까지 데려다준 참이에요.”
“아……. 그러시구나.”
나름 대답은 잘한 것 같은데 어쩐지 서 대리의 눈빛이 묘했다.
“근데 두 분, 사귀세요?”
“네? 아뇨?”
그리고 이어진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반응한 건 수영 쪽이었다.
“절대요. 그럴 리가요.”
그녀는 결코 그럴 일도, 그럴 수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는 뉘앙스를 폴폴 풍겨 댔다.
“…….”
어찌나 자연스럽고 단호한지 옆에서 듣던 태진이 입을 다물고 쓴웃음을 지은 채 끄덕거렸다.
수영이 거듭 말을 이었다.
“그런데 서 대리님은 여기 무슨 일로…….”
“아, 저는 집 알아보다가요. 이제 가려고요.”
“그렇구나. 그럼, 월요일에 봬요.”
“아, 네. 들어가세요.”
“본부장님도 안녕히 가세요.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들어가세요, 최수영 팀장님.”
급히 마무리하려는 듯한 수영의 언행에 서 대리는 물론 태진까지 엉겁결에 대답했다.
후다닥! 수영은 즉시 아파트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렸고, 둘만 남은 거리에는 어색한 기류만 맴돌았다.
“휴!”
냅다 달려 엘리베이터에 타고 나서야 수영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누군가에게 쫓기는 것도 아닌데 조금 전 그 상황이 너무도 불편했다.
수영은 몇 번 더 숨을 고르고 나서야 마지막으로 깊게 숨을 푹 내쉬었다.
‘어떻게 여기서 회사 사람을 만나냐.’
그렇잖아도 불편한 요즘인데 더 불편해지게 생겼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나름대로 둘이 있을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는 거였다.
애초에 합당한 이유가 아니면 제가 주말에 태진을 만날 일이 없기는 하지만.
“아, 몰라.”
이게 뭐 대단한 거 걸린 것도 아니고. 별일이 생기면 그것도 이상하다.
수영은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머리를 좌우로 거칠게 흔들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것에 맞추어 빠져나갔다.* * *
별일은 예상처럼, 바람과 달리 생겼다.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는 월요일. 수영이 제 팀원들과 함께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거기서 딱 마주친 거야, 글쎄.”
사무실로 들어가기 전, 휴게실을 지나치던 그녀는 우연히 들리는 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둘이 진짜 수상하다니까?”
목소리의 주인공은 서 대리였다. 이틀 전 집 앞에서 마주쳤던 사람.
“에이. 원래 서로 아는 사이이기도 했고, 이젠 아예 같은 회사 사람이잖아요. 게다가 토요일엔 강 팀장님 때문에 팀장급끼리 등산 가기로 했던 날이고요.”
“김 대리 몰라? 그거 취소됐었다잖아.”
“진짜요?”
“그렇다니까. 근데 주말에 둘이 왜 있었겠어. 아무리 봐도 수상하지.”
“…….”
수상하다니. 수상할 게 대체 뭐가 있다고.
굳이 따지자면 점심밥 먹은 것밖에 없다. 그것도 타이밍이 구려서.
심지어 마주친 그날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이야기까지 해 줬는데 소용이 없었다.
‘에휴.’
무시하자. 수영은 짤막한 한숨을 내쉬며 그냥 지나치려 했다.
“그게 뭐 그렇게 대수래요?”
뒤에 이어지는 김 대리의 목소리를 듣기 전까지는.
“응?”
서 대리와 얼굴을 마주하지 않은 김 대리는 살짝 떨리는 음성으로 성질을 팍 내었다.
“어릴 때는 원래 잘 모르잖아요. 본부장님이 최 팀장님 첫사랑이라고 한 것도 어릴 때 이야기지, 지금이란 소리는 안 했고요.”
“그렇기는 한데…….”
‘뭐야, 지금 내 편 들어 주는 건가?’
수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김 대리님의…….’
“그냥 우연이겠죠. 본부장님도 생각이 바뀌셨을 줄 누가 알아요.”
‘그럼 그렇지.’
순간 제 편을 들어 줄 거라고 생각한 그녀는 곧바로 들리는 말에 몸을 축 늘였다.
‘그럴 리가 없지.’
어느 누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여자랑 그런 이야기가 떠도는데 좋아하겠냐고.
‘이해는 되지만…….’
그 싫은 티를 보니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김 대리 쟤가 진짜!”
한데 그 불쾌함을 수영만 느낀 것은 아닌 듯했다.
그녀의 발에 맞추어 같이 멈춰 서 있던 주희가 인상을 구기며 당장이라도 휴게실로 들이닥칠 기세를 뿜어 댔다.
“안 되겠어요. 최 팀장님한테 직접 물어볼래요.”
“응?”
그때, 김 대리도 같은 심정이었는지 만류하는 이들을 제치고 휴게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마침 휴게실 문 앞에 서 있던 수영과 맞닥뜨렸다.
“깜짝이야!”
김 대리는 수영이 있을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못한 듯 몸까지 들썩였다.
그녀는 이내 눈매를 날카롭게 세우곤 수영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왜, 왜 남이 하는 얘기를 몰래 듣고 있어요?”
‘허……?’
남이 하는 얘기라니.
그 자리에서 걸리고도 되레 화를 내는 김 대리의 뻔뻔함에 수영이 팔짱을 끼며 입 밖으로 비소를 흘려보내었다.
“누가 남 얘기를 하길래요. 그 얘기가 하필 제 얘기라서 저도 모르게.”
“…….”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저 본부장님이랑 아무 사이 아니고요. 주말에 서 대리님 뵈었을 때도 아니라고 말씀드렸어요. 당사자한테 대답 다 들어 놓고도 안 믿으시면 제가 할 말이 없네요.”
“그건…….”
“이왕이면 남 얘기는 아무도 안 듣는 데서 해 주세요. 이런 상황이 저는 별로 재밌지가 않아서요.”
수영의 말에 뒤따라 나오던 서 대리가 급히 고개를 숙여 시선을 회피했다.
김 대리도 할 말을 잃은 양 입을 꾹 다문 채 분한 얼굴을 했다.
수영은 그대로 그들을 지나쳐 먼저 사무실로 들어왔다.
“최 팀장……!”
그러자 주희가 서둘러 뒤따라와 속삭이듯 그녀를 불렀다.
주희는 수영의 눈치를 힐끔 살피며 말을 이어 했다.
“아까 일 신경 쓰지 마. 원래 저 둘 별것도 아닌 거 크게 만들잖아. 알지?”
“맞아요. 두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 없잖아요. 일도 제대로 못 하면서 남 얘기만 해 대서.”
행여나 수영이 상처를 받았을까, 주희와 성 대리는 조심스러웠다.
그에 수영은 멋쩍게 웃어 보였다.
“네. 신경 안 써요.”
“그럼 다행이고.”
……라고 말은 했지만, 신경 쓰였다. 엄청나게.
‘미치겠네, 진짜!’
아무렇지 않은 척은 말 그대로 ‘척’이다. 어떻게 신경을 안 쓰냐고. 내 일인데. 내 사회생활인데!
‘그러니까 점심이고 뭐고 그냥 집에 갔으면 아무 문제 없었잖아!’
물론 수육은 엄청나게 맛있었지만!
‘하아…….’
수영은 차마 입 밖으로 뱉지 못한 말을 속으로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 뮤즈넷 다녀올게요. 회의가 있어서.”
“어어, 그래. 다녀와.”
그러고는 그들을 등지고 도는 순간 다시금 인상을 구겼다.
‘아 씨…….’
어쩜 이렇게 멀쩡한 날이 없는지. 인생에 ‘마’가 낀 게 분명했다.
전에도 그랬다. 10년 전에도.
누구 덕분에 온갖 소문들로 뒤범벅이 되었던 10년 전.
인정하긴 싫지만 그때도 진태진은 꽤 생겼었고, 그를 좋아하는 이들이 많았다.
다만 그때마다 눈총을 받는 건 태진이 아닌 수영이었다. 그게 싫어 벗어나려 해도 그가 원체 딱 붙어 있는 바람에 그러지도 못했지만.
그럼 좀 잘해 주던가. 괴롭히기나 하고.
그뿐만 아니라 수영에게 다가오는 이들에게 한없이 쌀쌀맞게 대하는 바람에 새로운 이들을 사귈 기회도 적었다.
아니, 그를 만난 이후에는 아예 없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아직까지 연락하고 지내는 이들은 전부 태진을 만나기 전부터 알던 인연들이니까.
그래 놓고 수영은 사람 운이 없다며 운운해 대던 놈.
‘진태진…….’
한데 어쩜 10년 후인 지금도 이렇게 똑같은 상황이 있을 수가 있는지.
아주 개탄스럽기 그지없는 요즘이었다.
“후…….”
‘됐어.’
처음 겪는 것도 아니고. 뭐라고 떠들든 신경 쓰지 말자. 소문이란 게 다 그런 거 아니겠나. 그냥 모르는 척하면 된다.
진태진과 자주 마주치지 않으면.
그러면 언젠가 소문은 사그라들 거고, 오해도 풀릴 거다.
수영은 머리를 쥐어뜯고 마음을 고이 접어 심호흡했다.
“최 팀장.”
그러자 이 일의 원흉인 태진의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바빠요? 잠깐 나랑 얘기 좀 해요.”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환한 얼굴로 그녀에게 말을 걸어왔다.
수영은 인상을 쓰다 말고 고개를 쳐들어 빙긋 웃어 주었다.
“죄송한데 지금 제가 외부로 회의를 가야 해서요.”
그러니까 갔다 와서 보자는 소리는 아니다. 그냥 보기 싫다는 말 대신이었다.
“그……. 그래요, 그럼.”
입만 웃는 섬뜩한 표정에 태진은 움찔하며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녀는 곧장 그를 지나쳐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됐어.’
모든 소문은 그가 오자마자, 그를 마주할 때마다 생겨났다.
그러니 그와 마주칠 일만 없으면 되겠지 싶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제외하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