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말씀하세요.”
“아, 네. 감사합니다.”
이게 뭐라고 감사하기까지야. 수영은 예상치 못한 남자의 인사에 순간 터져 나오려던 웃음을 눌러 담았다.
그사이 남자의 말이 이어졌다.
“다름이 아니라, 며칠 전 집으로 보내 드렸던…….”
‘역시 회장님이셨구나. 그 선물.’
왠지 그럴 것 같다 했다. 태진에게 은근슬쩍 물어봐도 모르는 눈치여서 거의 속으로만 확신하고 있었는데, 남자의 한마디에 더욱 분명해졌다.
수영은 긴장감에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싶은 심정으로 숨을 내뱉었다.
“아, 그거요.”
“마음에는 드시나요?”
“네?”
뭐?
“취향에 맞지 않는 게 있으면 바꾸어 드리라는 회장님의 지시가 있으셔서요. 원하는 게 있으시면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오늘 내로 바꾸어 드리겠습니다.”
“……네?”
뭐지? 뭘까. 대체 무슨 소리지? 수영이 생각하느라 눈살을 팍 찌푸렸다.
“혹시 전부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그랬더니 남자가 그녀의 표정을 보고 오해를 한 듯 어쩔 줄 몰라 하는 눈으로 말끝을 흐렸다.
‘뭔 소리야?’
어떻게든 저를 구슬려 헤어지게 하려는 속셈일까.
아니면 기껏 선물해 줬는데 어떤 것도 몸에 걸치지 않는 그녀가 괘씸해 하는 소리일까.
“…….”
그게 어떤 것이든 썩 유쾌하지 않음은 매한가지였다.
수영이 무표정으로 되돌아왔다.
“그거 전부 가져가 주세요.”
“……예?”
“회장님께는 정말 죄송하고, 그럼에도 신경 써 주려고 하신 건 감사하게 생각하지만 그래도 이건 좀 아닌 것 같아서요.”
“아니, 그게.”
“죄송합니다. 주신 건 태진이 통해서 보내 드리겠습니다.”
말은 이렇게 해도 심장은 터질 것 같았다. 이 이야기가 어떻게 진 회장의 귀로 들어갈까. 들어가면 또 어떤 소리를 하실까.
수많은 고민이 스쳐 지나갔지만 이미 그녀는 말을 끝낸 후였다.
“자, 잠깐만요. 기다려 주십시오!”
그녀가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몸을 돌리자 당황한 남자가 다급히 수영을 불러 세웠다.
“그, 그러면 그냥 지금 주세요.”
“…….”
“차라리 지금 가져가겠습니다.”
남자는 자포자기한 얼굴이었다. 어쩐지 그의 예상엔 이러한 수영의 태도가 전혀 없었던 듯싶었다. 그는 막막한 심정에 연신 침만 삼켰다.* * *
남자가 찾아와 선물들을 전부 가져간 이후, 마음이 뒤집어진 기분이었다.
분명 도로 가져갔음에도 부담이 느껴질뿐더러 남자가 건넨 말의 의미가 애매모호했다.
‘연애 한번 하기 힘들어 죽겠네, 진짜.’
남들도 다 연애를 이런 식으로 힘들게 하나.
‘한 번을 제대로 해 봤어야 말이지…….’
하아. 수영은 한숨을 깊게 내쉬며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엎어졌다.
“…….”
한 10여 분쯤 지났을까.
수영이 인상을 팍 찌푸리며 고개를 쳐들었다.
그녀의 낯엔 무언가 자포자기한 심정과 결심한 것 같은 기백이 공존했다.
수영은 이윽고 손을 뻗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러곤 가장 최신 통화 목록의 첫 번째, 태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 어, 수영아.
그러자 기다리고 있었던 듯한 목소리가 곧장 귓전을 때렸다.
평소라면 전화 한 번 걸었다고 한없이 맑고 기대감에 찬 목소리라며 픽 웃기라도 했겠지만, 현재 그녀는 그다지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수영이 단도직입적으로 내뱉었다.
“좀 전에 너희 아버지 비서라는 분이 왔었어.”
- ……어?
“그리고 사실 나, 저번에 회장님이 부르셔서 뵀었어. 그때 회장님이 나보고 너랑 헤어지라고 그러시더라.”
- …….
“그러면서 갑자기 선물 같은 거 보내셨는데, 아까 왔던 비서라는 분 통해서 도로 돌려보냈어. 그런 거 받고 싶지 않아서.”
- ……지금 집으로 갈게.
뚝, 통화가 끊겼다.
그가 그녀의 말을 내리 듣다가 한 소리는 고작 한마디가 전부였다. 그러나 그 한마디를 행동으로 옮긴 그는 얼마 안 가 수영의 집 문을 두드렸다.
“아까 그게 무슨 소리야.”
태진은 그녀가 문을 열어 주자마자 들어올 새도 없이 물었다.
“아버지가 널 왜 불러.”
“…….”
살짝 일그러진 미간을 보니 그도 짧은 시간 동안 그녀만큼이나 많은 생각이 오간 모양이었다.
그에 말없이 그를 올려다보던 수영이 고개를 푹 떨구었다.
“말했잖아. 헤어지라고…….”
“내가 너랑 어떻게 헤어지냐.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너 만나겠다고 외국에서 버틴 게 얼만데.”
“…….”
“그래서 그때 나한테 헤어지기 싫다고 했구나.”
낮이든 밤이든, 그런 말들은 낯 뜨겁다며 잘 하지도 않던 수영이 그런 말을 서슴없이 했다는 게 조금은 이상하다고 태진도 느낀 참이었다.
그럼에도 그마저도 좋아 두근거리기는 했지만 이런 일일 거라고는 차마 예상하지 못하였다.
태진이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미안해. 내가 몰랐어.”
“…….”
“힘들었겠다. 아버지가 괜한 말 해서.”
어린아이를 달래듯 나직한 음성에 수영이 말없이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이내 안겨 있기만 하던 팔을 뻗어 그를 감싸자 태진이 낮게 웃으며 그녀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내가 아버지한테 잘 말하고 올게.”
“…….”
“안 헤어져. 걱정 마.”
“그렇지만…….”
분명 그의 아버지가 헤어지라고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는가.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하지만, 그 반대로 부모 이기는 자식도 없다 했다.
“회장님이잖아. ……네 아버진데.”
진 회장이 강하게 밀고 나가면 어찌 되었든 태진도 수긍해야 하는 것들이 있을 터.
그러한 걱정들이 자신만만해하는 태진을 보고도 마냥 웃지 못하게끔 했다.
“최수영.”
하나 그 생각마저 눈치를 챘는지 태진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수영의 얼굴이 재차 위로 향하자 태진은 숨 쉴 틈도 없이 입술을 집어삼켰다.
입 안으로 그의 혀가 밀려들어 오면서 몽롱해진 정신에 수영의 눈도 나른하게 감겼다.
쪽. 쪽.
진한 키스가 끝날 때쯤 그가 짧게 키스의 여운을 달래며 입을 열었다.
“걱정 말고. 다녀올게.”
태진은 환히 웃으며 그녀를 달래곤 멀어졌다.
다시금 문을 열어 몸을 돌리고, 애써 평평하게 유지했던 이마에 선명한 주름을 그려 내려던 찰나.
“자, 잠깐만!”
수영이 그의 옷자락을 붙잡아 세웠다. 태진이 당황한 듯 움찔하며 돌아보았고, 수영은 한 번의 심호흡 후 마저 말했다.
“나도 갈래.”
“…….”
“같이 가.”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무슨 자신감인지 스스로도 지금 왜 이러는지 납득이 되진 않지만, 뭐든 전해 듣는 것보단 낫지 싶었다.
좋은 이야기든 나쁜 이야기든. 나쁜 이야기라면 더더욱.
‘한두 번 들은 것도 아니고.’
수영은 잘게 떨리는 손에 힘을 주고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의 말을 가만히 듣던 태진은 떨리는 손을 완전히 감싸 쥐며 작게 웃어 보였다.
“그래. 같이 가자.”
“겉옷…… 갖고 올게.”
그렇게 둘은 같이 집을 나섰다.
이보다 더 비장한 표정과 눈빛은 없을 거라 감히 장담할 수 있을 만큼의 얼굴로.
한데 막상 집무실 앞에 서니 긴장이 되는 건 태진이나 수영이나 매한가지였다.
둘의 등장에 놀라 넋이 나간 채 대응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직원들을 보니 왜인지 더 긴장이 되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들어가야지.
태진이 수영의 손을 꽉 쥔 채 문을 열어젖혔다.* * *
두 사람이 들이닥치기 조금 전. 진 회장의 집무실 분위기는 삭막했다.
“후…….”
진 회장이 골치라는 표정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진 회장의 입술이 벌어졌다.
“그게 지금 말이라고 한 건가, 자네?”
“죄송합니다.”
“선물이 마음에 드는지를 물어보랬지, 누가 도로 빼앗아 오라고 했느냔 말이야!”
“…….”
“자네 정말 일을 이런 식으로 할 건가!”
그의 언성이 높아질 때마다 수영을 마주했던 남자의 고개가 아래로 처박혔다.
“면목 없습니다, 회장님.”
“됐어. 어쨌든 그 아이가 마음을 돌릴 생각이 없다는 건 잘 알겠구먼. 그만 나가 봐.”
“예…….”
“다른 방법을 써야…….”
그때였다. 아무나, 그것도 허락 없이 이처럼 막무가내로는 들어올 수 없는 그의 집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진 회장은 물론, 고개를 들 줄 모르던 남자의 눈도 열린 문으로 향했다.
즉시 둘의 눈이 크게 떠졌다.
어쩔 줄 몰라 하며 뒤따라 들어온 직원의 앞에 붉으락푸르락 화가 난 얼굴로 들어온 태진과 굳은 결심을 한 듯한 수영이 서 있었다.
둘은 절대 서로를 놓지 않겠다는 듯 힘주어 손을 잡은 채였다.
“태진이 너……!”
예상치 못한 태진의 등장에 진 회장이 놀라 말도 다 하지 못하고 눈을 깜박였다.
슬쩍 고개를 내려 유독 눈길이 가는 곳을 쳐다보니 자신의 아들과 수영이 꼭 붙잡은 손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진 회장의 표정이 확 풀어졌다.
“너희, 왜 둘이 손을 잡고 와?”
“…….”
“…….”
“둘이 사귀는 거야?”
순간, 당황한 수영이 사고가 정지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떠 보였다.
“내 말이 안 들려?”
“…….”
들린다. 아주 잘 들려서 머리가 멈춰 버렸다. 너무도 잘 들리는 바람에 진 회장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
수영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태진을 올려다보았다. 진 회장의 말을 이해할 수 없는 건 비단 저뿐만이 아니었는지, 그 역시 멍청하기 짝이 없는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