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윽.”
술을 마신 건 애석하게도 수영의 아비와 태진뿐이었다.
애초에 술잔을 들려 해도 한 모금도 양보하지 않은 아비 탓이었다.
그러면서 왜 태진에게는 그리도 권하는지. 그 의도가 빤히도 보여 수영이 인상을 찌푸렸다.
물론 지금은 제게 부축당하는 태진 때문에 쓴 인상이었다.
“아니 아빠는 무슨 술을 이렇게 먹여? 애 죽이려고 작정했나!”
고작 3분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놈이 문을 나서자마자 이 모양 이 꼴이다.
그렇잖아도 큰 체구라 그냥 버티기도 보통 일이 아닌데 축 늘어지니 더 힘들었다.
수영이 엘리베이터 앞에 다다라 버튼을 누르며 한껏 불만을 토했다.
“내가 또다시 아빠랑 마주치게 하나 봐라.”
설령 둘이 마주하더라도 술만큼은 필사적으로 뺏으리라. 그녀는 굳은 결심을 하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기를 고대했다.
그러던 그때, 얌전히 그녀에게 기대어 있던 태진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굽었던 허리가 펴지고 키가 쑥 커진 그는 끔벅끔벅 눈꺼풀을 움직이며 수영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더니 대뜸 활짝 웃으면서 그녀를 끌어안았다.
“수영아아.”
“깜짝아! 얘 왜 이래!”
“아. 진짜 예쁘다.”
“뭐…… 뭐?”
그의 말에 수영이 입을 어버버거렸다.
“갑자기 왜 이래?”
“갑자기 아닌데? 늘 생각했던 건데?”
태진이 그녀에게서 조금 멀어져 실소했다.
“어떻게 넌 몇 번을 봐도 좋냐. 역시 다시 한국에 오길 잘한 것 같아.”
“…….”
“다행이다. 너희 부모님이 나 좋게 봐 주셔서.”
위에서 아래로 전등 빛이 내리쬐는데 반쯤 그림자가 드리워 그의 얼굴은 더 은은하게 빛이 났다.
그 아래서 그는 눈을 살짝 아래로 내리깔고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
이건 누가 봐도 그녀를 꼬시는 게 틀림없었다.
사람 홀리는 건 시간과 장소를 따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의 얼굴을 마주 보자마자 말문이 막혀 입을 꾹 다문 수영은 때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급히 몸을 실었다.
“얼른 타. 가자.”
“그래.”
그에 태진이 서운한 기색 하나 없이 그녀를 따라 올라탔다.
그러곤 움직이지 못하게 포박하듯 두 팔로 그녀를 끌어안아 품에 가두었다.
“야……! 누가 타면 어쩌려고!”
“이것도 못 하게 하면 나 너무 서운한데.”
재빨리 수영이 태진을 제지했지만 그는 물러섬이 없었다.
그는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파묻은 채 서운한 투로 중얼거렸다.
“마음 같아선 뽀뽀하고 싶은데 참는 거야.”
“뭐…….”
수영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미쳤다.
태진은 작정한 게 틀림없었다.
그래. 굳이 작정하지 않아도 넘어간 마당에 이 정도로 작정하고 들이대는데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있을 수 있겠는가.
그녀는 결국 바람 빠진 풍선처럼 몸에 준 힘을 풀었다.
“사람들 없는 동안까지만이야.”
끄덕끄덕. 목 언저리에 닿은 그의 머리카락이 두어 번 움직거렸다.
수영이 짧은 한숨과 함께 손을 위로 들어 올렸다.
그대로 저를 간지럽히는 머리카락을 만져 볼까 싶어 손을 뻗으려던 찰나였다.
휙!
아직 1층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수영이 올렸던 손을 내려 그의 어깨를 잡아 미는 시늉을 했다.
“야, 다른 사람 탔어.”
엘리베이터에 탄 여자는 문이 열리자마자 흠칫 놀라더니 아무렇지 않은 척했으나, 이후로 수영은 자꾸만 그 사람의 시선이 느껴졌다.
민망해진 수영은 그를 흔들어 재촉했다.
“야, 진태진.”
“…….”
“진태진……?”
그럼에도 그는 꼼짝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잘만 떠들어 대 놓고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자?”
수영이 설마 하는 우려 섞인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
태진이 그녀의 말에 반응하듯 몸을 두어 번 들썩였다. 그러고는 다시금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수영이 이상함을 느끼기도 전이었다. 그가 씩 웃더니 두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며 같이 탄 여자의 귀에 들리지 않을 수 없는 크기로 말했다.
“자기야. 우리 자기 오늘 왜 이렇게 예뻐?”
애교. 이건 누가 들어도 명백히 애교였다.
“뭐, 야…….”
“우리 자기는 트레이닝복을 입어도 예쁘다. 뭘 먹고 이렇게 예쁘지?”
“하지 마. 야……!”
그의 칭얼거림에 수영이 당황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수영은 태진의 눈앞에 손을 휘저으며 최대한 정신을 분산하려 했다.
그런데 대체 뭐가 문제인지 태진은 그녀의 의도대로 움직여 주질 않았다.
그는 자신의 앞에서 움직이는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술에 취한 애가 힘은 또 어찌나 센지, 휘젓던 손이 금세 아래로 내려갔다.
태진이 히죽거렸다.
“자기 혹시 진짜 집이 하늘이야? 천사는 하늘에서 산다던데.”
“미…… 미…….”
‘얘가 지금 뭐라는 거야!’
그는 도저히 감당할 게 못 되었다.
이건 칭얼거리는 수준이 아니라 술을 너무 많이 마셔 미쳐 버렸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이지 싶었다.
“알았으니까 제발 조용히 좀 하자. 응?”
수영이 간절한 표정으로 그를 타일렀다.
“아. 자기가 천사라는 건 세상에 비밀인가?”
“진, 태진, 태진아.”
“걱정 마, 자기야. 나쁜 사람들이 자길 실험체로 쓰려고 데려간다 하면 꼭 지켜 줄게.”
“제발. 제발.”
“자기야. 사랑해. 내 맘 알지?”
“진태진, 제발……!”
하나 이미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태진이 그녀의 간절함을 들어 줄 리 없었다.
어쩜 이렇게 때마침 사람을 곤란하게 만들 수가 있는지.
‘환장하겠네, 진짜!’
급기야 두 손으로 태진의 입을 틀어막았다.
띵!
그러나 이미 그의 입에서 할 말은 다 나와 버렸고, 한마디도 빠짐없이 들은 여자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큽, 하고 웃음 참는 소리가 들렸던 건 결코 착각이 아니었다.
수영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그를 있는 힘껏 밀어냈다.
그러자 아무리 해도 밀리지 않을 것 같던 태진이 너무도 손쉽게 밀려났다.
어쩐지 순순히 밀려나는 폼이며, 금세 멀쩡해진 얼굴로 히죽거리는 표정이며. 어느 하나 빠짐없이 그가 멀쩡하다는 걸 나타내 주고 있었다.
젠장.
“야!”
수영이 버럭 소리쳤다.
“너 일부러 그랬지!”
그녀의 합리적인 의심 가득한 추궁에도 태진은 어깨를 으쓱이며 발뺌했다.
“아니야. 나 취했어.”
한 치의 진실 없는 거짓말이었다.
적어도 얼굴 모를 여자가 탄 이후부터는 말이다. 물론 그전까진 태진 역시 놀릴 생각 없이 진지했다.
한데 어쩌겠는가. 여자가 들어오는 순간 느껴지는 수영의 다급함이 그의 눈엔 심각하게 귀여운 것을.
태진이 고개를 틀어 당장이라도 레이저를 쏠 것 같은 그녀의 눈을 회피했다.
“내가 진짜!”
수영은 채 말을 다 하지 못하고 휙 몸을 돌려 나갔다.
씩씩거리는 와중에 얼굴에 피었던 열꽃은 식을 줄을 몰랐고, 당황스러움은 곧 부끄러움으로 바뀌었다.
장난이라는 걸 아는 이 와중에도 조금 전의 그가 눈에 아른거릴 게 뭐람.
수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뜨기를 반복했다.
“같이 가.”
뒤에서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지만 절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같이 가자니까? 수영아. 최수영!”
오히려 그의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걸음 속도를 빠르게 하기 바빴다.
“…….”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태진은 두어 번 수영을 부르다 말곤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최수영 왜 이렇게 귀엽냐.”
이러면 더 놀리고 싶어지는 게 사람 심리 아닌가.
“자기야아, 같이 가자.”
그는 장난을 멈출 생각이 없다는 듯 빠르게 그녀의 뒤를 쫓았다.* * *
어느덧 찬 공기가 물러가고, 창문을 열면 바람을 타고 봄 내음이 코끝을 자극하는 4월이었다.
햇빛은 아침부터 방 안을 밝혔고, 눈 부심을 이기지 못한 태진은 눈살을 찌푸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달그락.
일어나자마자 그의 손이 협탁으로 향했다.
보지도 않고 능숙하게 휴대폰을 집어 든 그는 화면부터 살폈다.
날짜는 4월 10일.
눈이 부셔 찡그리느라 얼굴을 인식하지 못한 잠금 화면에 입력한 비밀번호도 오늘 날짜와 같았다.
이윽고 보인 배경 화면은 활짝 웃고 있는 수영의 사진이었다.
아침부터 보는 그녀의 얼굴에 태진은 실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봐도 봐도 예쁘네.”
그렇게 한참 그는 휴대폰 액정을 넋 놓고 쳐다보았다.
〈다음 주 내 생일이야!〉
그러다 문득, 그의 머릿속에 수영이 스쳐 지나갔다.
지난주의 그녀가 아닌, 조금 더 오래전의 그녀였다.
〈4월 10일! 무슨 말인지 알지?〉
기대에 부푼 표정으로 눈을 반짝이던 그때의 그녀는 지금 생각해도 귀여웠다.
반드시 기억하라며 일주일 동안 떠들어 대던 수영의 생일은 그녀의 바람대로 그에게 각인되었다.
0410. 이 네 자리 숫자는 그녀의 생일이자 그의 모든 비밀번호였다.
수영을 잊고 싶지 않아 제 몸에 익혀 두던 번호가 10년이 지나 그녀와 다시 이어 줄 줄은.
그에게 이 번호는 이제 행운의 번호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