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는 사이 벌써 속옷 위로 움켜쥔 손에 수영이 신음을 토하며 바르르 떨었다.
쪽, 쪽. 태진의 입술이 그녀의 볼, 입술, 목, 쇄골로 천천히 내려오면서 흔적을 남겼다. 그와 동시에 걸리적거리던 윗옷도 벗겨 침대 아래로 떨구었다.
이후 유일하게 그녀의 속살을 가리고 있던 속옷도 마찬가지였다.
봉긋 솟은 피부에 말캉한 입술이 닿자 수영이 움찔거렸고, 그 틈에 그녀의 등 뒤로 파고든 손이 잠겨 있던 호크를 풀었다.
“아…… 으응.”
묶여 있던 것이 해방되며 찬 공기를 만나기 무섭게 태진이 불덩이 같은 손으로 부드럽게 쓸었다.
드러난 것 중 가장 도드라지고 예민한 곳이었다. 저릿한 감각에 수영은 탄식을 내뱉었다.
하나 당연하게도 그녀의 탄식은 긴 밤의 시작에 불과했다.* * *
“으윽…….”
밤 10시. 아직 하루가 완전히 끝났다기에는 애매한 시간. 특히나 둘의 하루는 여전히 길었다.
수영이 이불 속에서 꿈틀거리며 고통을 호소했다.
“왜 그래.”
이제 막 씻고 나온 듯, 때마침 그녀의 방으로 들어온 태진이 후다닥 다가와 물었다.
“어디 아파? 어디가 아픈데.”
“…….”
아. 말하지 말까.
전에는 볼 수 없던 걱정 가득한 얼굴. 이러면 안 되지만, 저 얼굴을 보자니 계속 아프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뒤따른 양심의 고통에 못 이긴 수영이 대답해 주었다.
“아픈 건 아니고……. 몸에 힘이 안 들어가.”
씻는 것도 겨우 했고, 옷도 겨우 갈아입었다. 더는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 없다는 게 그녀의 진심이었다.
“……아.”
그에 태진의 표정이 급격히 풀어지면서 자리에 주저앉았다.
“놀랐잖아.”
“뭘 그런 걸 갖고 놀라?”
아픈 거나 힘이 없는 거나 어쨌든 고통스러운 건 똑같은데.
수영이 눈을 가늘게 뜨고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묻자 곧장 태진의 대답이 들려왔다.
“네가 아프다는데 그럼 안 놀라?”
“…….”
“병원 가야 되는 줄 알고 제일 가까운 데가 어딘지도 생각했는데.”
“…….”
“하여간 최수영 진짜. 사람 들었다 놨다 잘해.”
“사람 속도 모르고…….”라면서 구시렁거리는 태진의 얼굴에 불만이 가득했다.
“아, 씨…….”
덕분에 수영은 또다시 설레 버렸다. 이게 뭐라고 사람을 두근거리게 하는지. 그녀는 주체할 수 없는 웃음을 꾹 눌러 담으며 중얼거렸다.
“귀엽기는.”
“……뭐?”
“어? 뭐가?”
“네가 방금 나 귀엽다고 하지 않았냐?”
눈치만 빠른 줄 알았더니 귀도 밝다. 수영은 새침한 얼굴로 시치미를 뗐다.
“내가? 안 그랬는데?”
고개뿐만 아니라 몸도 완전히 틀어 그의 말을 부정했다.
“…….”
그랬더니 그는 더욱 흥분하여 반응을 보이기는커녕 어떠한 목소리도 내지 않았다. 결국 수영이 궁금함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고, 곧 숨을 멈추었다.
두 손바닥으로 꽃받침을 하곤 생글거리며 웃는 그의 낯이 시야에 가득 들어찬 탓이었다.
태진이 한껏 취한 포즈를 유지한 채 입을 열었다.
“나 귀엽냐?”
귀엽냐고? 당연히. 미치게 귀엽다. 잘생긴 놈은 뭘 해도 잘생기고 예쁘고 귀엽다는 걸 진태진을 보고 새삼 깨달았다.
수영은 벌겋게 된 얼굴로 입만 벙긋거렸다.
“다행이네.”
태진은 나름 적나라한 그녀의 반응이 꽤나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키득거리는 목소리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네 마음에 들어서.”
“……원래 너는 너 잘난 거 알았으면서 무슨.”
뭘 이제 와서. 전에는 몰랐다는 듯이 하는 말에 그녀는 그가 내숭이라도 떠는 줄 알았다.
“그 잘난 얼굴로 너 꼬시는 데 오래 걸렸다?”
한데 그게 아니라 그의 딴엔 진심이었던 듯했다. 분명 웃는 얼굴인데 미세하게 떨리는 눈썹이 시선을 빼앗았다.
“흠흠.”
수영은 그의 속을 보지 못한 척 같은 투로 대꾸했다.
“그럼 뭐, 내가 누구처럼 얼굴만 보고 좋아할 줄 알았어?”
“그럼?”
“뭐?”
“그럼 뭐를 더 보냐고.”
“그야…… 이것저것?”
사실 딱히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래서 누구와 사귀어 본 적도 없다.
수영은 더한 대답을 요구하는 질문에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 댔다.
태진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나 돈도 많아.”
“뭐?”
“직업이나 외모, 성격 이런 거야 너도 잘 알 거고. 아, 최수영만 보는 지고지순함도 갖췄네.”
“…….”
“그래서 너 만나기 전까지 다른 여자 앞에서는 옷 한 번도 안 벗었어.”
“콜, 록! 콜록, 콜록!”
하마터면 영영 써 보지도 못했을 뻔했다며 말을 잇는데, 어찌나 표정이 태연한지. 표정만 보면 내일 점심 고르는 줄 알 정도였다.
수영은 깜빡이도 없이 훅 들어온 그의 발언에 침도 제대로 삼키지 못해 기침을 토해 냈다.
“야……! 너는 무슨 그런 소리를!”
기어이 힘없는 몸을 일으키게 했다.
수영이 인상을 팍 쓰며 옆에 놓아두었던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자 그가 작게 웃음소리를 내었다.
“아쉽다.”
“뭐가, 또.”
“너 이직하는 거.”
멈칫. 수영이 마시던 것을 멈추고 힐끔 그를 내려다보았다.
“…….”
이미 지나 버린 일이지만 저 또한 아쉬움이 없는 건 아니었다.
조금만 더 빨리 오해가 풀렸다면. 조금만 더 빨리 마음을 인정했다면. 마음속 한구석이 남몰래 아릿했다.
“됐어. 어차피 같은 공간에 있는 거 다른 사람 눈치 보이기도 하고.”
그럼에도 티 내지는 않으려 최대한 담담히 대꾸했다.
“뮤즈넷이랬나?”
수영이 마저 물을 마시는 사이 그의 말이 이어졌다.
“인수할까?”
“푸웁!”
“그럼 또 같이 다닐 수 있지 않겠냐?”
또다. 또 절대 별일 아닌 것 같은 말투로, 절대 별일인 말을 내뱉는다.
“내일 당장은 아니더라도 불가능하진 않을 것 같은데.”
“이…… 이 미친놈아!”
물론 지금이야 생각을 거치지 않고 툭 뱉은 소리라지만 태진이라면 왠지 해낼 것 같았다.
“내가 진짜 너 때문에 못 살아.”
수영이 입가에 흐르는 물줄기를 벅벅 닦으며 그를 노려보았으나 그는 오히려 뭐가 잘못되었냐는 얼굴로 히죽였다.* * *
어김없이 돌아온 출근날의 아침이었다.
“뭐야, 최 팀장?”
수영이 제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먼저 와 있던 주희의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무언가 의심 가득한 물음에 수영이 의아한 얼굴로 “네?” 하고 대답하자 그녀가 재차 물었다.
“오늘 좀 기분 좋아 보이네? 연휴에 무슨 좋은 일 있었어?”
“네? ……아뇨. 별일 없었는데요.”
“그래? 흐음.”
수영이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으나 주희는 여전히 날카로운 눈매를 유지했다.
“에휴.”
그러나 곧 그녀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곤 들고 있던 펜을 툭 내려놓으며 푸념하듯 말했다.
“아니야. 그냥 자기 이제 2주도 안 남았다고 생각하니까 걱정 반, 부러움 반으로 투정 한번 부려 봤어.”
“아…… 하하.”
“그래도 마음은 좀 편안하겠다. 그렇지?”
“뭐…….”
사실 처음엔 ‘그렇긴 하죠.’라고 대답하려 했다. 한데 그러기에는 주희와 옆에서 듣고 있던 성 대리의 표정이 너무도 부담스러웠다.
“그…… 렇지만! 어차피 일의 연속인걸요. 여길 나간다고 해서 일을 안 하는 것도 아닌데요.”
“그렇긴 하지.”
다행히 그녀의 빠른 처세술이 성공했는지 주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요. 하하. 하하하.”
“어. 안녕하세요, 본부장님.”
그렇게 어영부영 대화가 끝나 가는 사이, 태진이 들어왔는지 직원들의 고개가 저마다 기울었다.
“네. 안녕하세요.”
그 역시 목소리를 내었고, 그제야 수영의 고개도 그가 있는 쪽으로 돌아갔다.
“안녕하세요.”
둘은 입을 다물고자 했다. 정확히는 그녀의 요구였다.
퇴사 전까지는 아무 사이 아님을 유지하기. 물론 회사에서만, 이라는 조건으로.
하여 수영은 누구에게나 다 하듯 인사를 건네었고, 그건 태진도 마찬가지였다.
“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가 했던 요구는 둘이 눈을 마주친 지 1분도 채 되지 않아 무의미하게 변하였다.
모두가 인사를 마치고 각자의 업무에 시선을 돌린 타이밍. 둘만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는 게 확실해지자 태진의 한쪽 눈꺼풀이 빠르게 감겼다.
양쪽 입꼬리는 오직 그녀를 보고 올라간 상태였다.
“헙…….”
예상치 못한 윙크에 그녀는 당황하여 입술을 앙다물었다. 혹시나 그가 보낸 신호가 다른 이들에게도 보였을까, 수영은 휙휙 주변을 살폈다.
아무도 보지 못했음을 확신한 후, 후다닥 주저앉아 고개를 숙였다.
‘미쳤나 봐!’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서 보내는 애교라니! 그녀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애써 꾹 눌러 담았다.
“크흠!”
태진 역시 마찬가지. 그녀가 가림막 뒤로 숨는 것을 본 그 또한 주체할 수 없는 입꼬리에 억지로 소리를 내며 억누르고 있었다.
‘방금은 좀 위험했나.’
급히 자리로 돌아와 업무에 집중하는 척 시선을 고정한 후에도 그의 입꼬리는 좀처럼 내려올 줄을 몰랐다.
“큼!”
겨우 진정이 된 수영은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들고 모니터를 보는 시늉을 했다.
“……최 팀장.”
그러던 그때.
주희가 슬그머니 다가와 그녀에게만 들릴 크기로 속닥거렸다.
“나 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