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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세요.”
자신을 닦달할 만큼 대단한 일이 아니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뉘앙스였다.
그런 그녀에게 태진은 오전에 그녀가 제출한 서류를 내밀었다.
“세 번째 장에 오타가 있어서. 다시 제출하세요.”
미친 새끼, 라는 단어가 수영의 눈빛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하……!”
황당함에 바람 소리를 내는 그녀를 마주하면서도 태진은 싱그러운 미소를 유지했다.
그는 욕을 들어도 차라리 이게 낫다 생각했다.
‘가만히 지켜볼 수는 없지.’
수영이 다른 남자를 만난다는 건 예전에도, 앞으로도, 평생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태진은 그녀에게만큼은 집요했다. 그리고 그 집요함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이번과 같은 일이라면 언제든지 훼방을 놓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 * *

지극히 평범했던 하루의 오후.
“다녀올게요.”
수영이 간단히 짐을 챙긴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말에 주희가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았다.
“지금 가려고? 지금 밖에 엄청 더워.”
“네. 시간이 1시간 후로 잡혀서요. 어쩔 수 없죠, 뭐.”
“뭐 타고 가려고?”
“택시요.”
“아, 그래? 그럼 괜찮겠네. 차 조심하고.”
“네. 가 보겠습니다.”
걱정하는 듯한 말들에 수영이 작게 웃어 보이곤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같이 가죠.”
아니, 빠져나오려던 찰나였다.
급하게 저를 붙잡는 목소리에 수영이 몸을 돌려 바라보았다.
시선의 끝자락엔 태진이 서 있었다.
그는 굳이 모두가 다 있는 곳에서 활짝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저도 외근 나가야 할 일이 있으니까. 내 차 타고 가요.”
“아뇨, 괜…….”
“저도 괜찮아요. 가는 길인데요, 뭐. 이왕이면 같이 가는 게 심심하지도 않고, 회사 경비도 아끼고.”
‘이왕이면’부터는 급격히 소리가 작아졌다.
가까이 다가와 귓가에 속삭이듯 하는 말에 수영은 한 발짝 그에게서 멀어졌다.
눈매를 매섭게 만들어 뭐 하는 거냐며 쏘아봤지만 그에게는 그 시선이 가시 바늘만큼도 못한지 빙긋 웃었다.
“얼른 가죠. 둘 다 늦겠는데.”
“잠…….”
대답하기도 전에 이끌려 간 수영은 어느덧 사무실을 나와 지하 주차장에 다다랐다.
“타요.”
태진은 그녀를 향해 가볍게 말한 뒤 차에 올라탔다.
“허……?”
그를 황당한 눈으로 쳐다보던 그녀는 탈 생각도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우웅…….
그러자 금세 시동까지 건 태진이 조수석 창문을 내리며 물었다.
“안 타요?”
이걸 진짜 타? 말아?
정말 몇 번이나 고민을 했는지. 몇 분이 더 흐른 후에야 그녀는 그의 차에 느릿하게 올라탔다.
줄곧 싱글벙글 웃던 태진은 그녀가 안전벨트를 매자마자 거듭 입을 열었다.
“출발하죠. 어디예요?”
“네?”
그의 물음에 수영은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어디냐니?
“알고 같이 가자고 하신 거 아니었어요?”
“아뇨? 최 팀장이 외근 나가는 것만 알고,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는데요?”
“방향이 같다면서요.”
분명 ‘가는 길’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하도 자연스럽고 능청스럽게 말하기에 알고 하는 소린 줄 알았더니 거짓말이었다.
수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거짓말이었어요?”
“에이. 최 팀장 데려다주고 가면 그게 가는 길이죠. 어차피 갈 거, 같이 가면 좋은 거지.”
“좋기는…….”
“얼른 말해요. 진짜 늦겠다.”
그는 수영의 타박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제 옆에 앉혔다는 것이 뿌듯한 모양인지 배시시 웃기만 했다.
수영은 태진을 못마땅하다는 눈으로 보며 대답해 주었다.
“뮤즈넷이요.”
“…….”
멈칫. 그제야 거침없이 내비게이션 모니터를 두드리던 그의 손이 멈추었다.
하나 곧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원래대로 돌아와 다시 움직였다.
평소같이 웃던 표정도 그대로였다.
“진짜 출발할게요.”
그의 말을 시작으로 차가 움직였고, 그의 말을 끝으로 내부에는 정적이 흘렀다.
그다지 태진과 대화를 하고 싶지 않은 수영과 생각에 잠겨 입을 열지 않은 태진의 조화로 흐르는 침묵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뮤즈넷에 도착해 갈 즈음이었다.
가는 내내 앞만 보며 무표정을 유지하던 그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회의하러 가는 거죠?”
“……네. 그런데요?”
“언제 끝나요?”
“12시 반쯤에요. 왜요?”
또 무슨 일을 꾸미려고.
당연하게도 수영이 불신 어린 눈빛으로 그를 흘겨보았다.
상체를 저와 반대쪽으로 빼는 게 꼭 파렴치한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하여 기분이 조금은 상할 법도 한데 그는 여전히 태평했다.
“그냥요. 이따 봅시다.”
“…….”
“다 왔어요. 얼른 내려요. 아슬하게 도착했네요.”
때마침 차가 멈추었고, 태진이 내리기를 재촉했다.
덕분에 그녀는 왜 그러느냐고 묻지도 못한 채 안전벨트를 풀었다.
문을 열고 내릴 때까지 태진은 별다른 말이 없었다.
“잘하고 와요, 최 팀장.”
“…….”
이상하고 불안했다. 의심스럽기도 했다.
그냥 정말 별거 아닌 말인데. 오래전이지만 그와 같이 지낸 세월로 단련된 육감일까.
괜히 싸했다.
“……네. 안녕히 가세요.”
수영은 평소답지 않게 느릿한 걸음으로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 * *

‘끼익’ 하고 급히 멈추는 소리가 아주 작게 울렸다.
1시간 반 전 수영이 내렸던 뮤즈넷 본사 앞. 태진의 차가 똑같은 자리에 멈추어 섰다.
수영이 말한 예상 시간보다 30분이나 이른 시간이었다.
차량에 표시된 시간을 확인한 태진은 흡족한 얼굴로 등받이에 편히 기대었다.
“때마침 일찍 끝나 버렸네.”
처음부터 그의 외근은 1시간짜리였다.
“어쩔 수 없이 같이 가야겠군.”
회사로 가려면 더 빠른 길이 있으나 애당초 그 길은 생각하지도 않았다.
‘언제 나오려나.’
태진에게는 이 모든 게 우연의 일치였다.
우연한 상황쯤이야 만들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끝나면 나와. 같이 복귀하게. 밥 먹고 들어가자.]

짤막하게 메시지를 보내곤 회사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벌써 신이 난 그의 입매는 계속 호선을 그리었다.
잠시 후. 건물 입구에서 낯익은 이가 밖으로 나왔다.
수영이었다.
“최수…….”
그리고 그 옆. 선우가 환히 웃으며 같이 걸어 나왔다.
햇빛이 비춰 그렇잖아도 밝은 안색이 더욱 밝았다.
“…….”
저런 웃음이었다. 수영이 좋아하는 그 망할 웃음이.
남들이 말하는, 무해하고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만큼 신뢰감 넘치는 웃음.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선우는 딱 수영이 말한 이상형에 가까웠다.
그래서, 더 기분이 나빴다.
핸들을 쥔 태진의 한쪽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그는 당장이라도 차 밖으로 나갈 기세였다.

* * *

비슷한 시각, 태진이 수영을 발견하기 직전쯤이었다.
“제가 진짜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었어요.”
엘리베이터를 막 빠져나온 수영의 입술 사이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 뒤로 선우의 멋쩍어하는 웃음이 이어졌다.
“그래도 상사가 어릴 적 친구면 막 어렵지는 않겠어요. 수영 씨 요구 사항을 남들보다 더 빠르게 이해해 줄 수 있잖아요.”
엘리베이터를 나오기 전, 이미 둘의 대화는 어느 정도 진척이 있었다.
호칭마저 편히 놓은 선우는 말투도 타이르는 듯 부드러웠다.
“그랬으면 제가 이렇게까지 스트레스 안 받았겠죠.”
하나 그의 달램이 먹힐 새도 없이 수영은 골치라는 뉘앙스를 폴폴 풍겼다.
“도저히 걔 속을 모르겠다니까요. 어떻게 10년 동안 더 이상해진 거 같아.”
이마에 손을 얹고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폼이 예사롭지 않았다.
“하하하.”
선우가 웃음을 터트렸다.
“저야 제삼자의 입장이라 재미있지만.”
그러더니 그녀를 지나쳐 들어갈 예정인 카페의 문을 열어 주며 말을 이었다.
“수영 씨는 고민될 만하네요.”
“앗, 감사합니다.”
수영이 꾸벅 인사하곤 황급히 안으로 들어왔다.
무더운 더위를 식혀 주듯 찬 바람이 온몸을 에워쌌다.
덕분에 태진의 이야기를 하면서 차올랐던 분노가 가라앉았는지 그녀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뭐 드실 거예요? 사는 김에 과장님 것까지 제가 살게요.”
“아, 아뇨. 괜찮아요.”
“에이, 나중에 맛있는 거 사 주기로 했잖아요. 그때를 위해 제가 산다고 생각하세요.”
“이거 참…….”
“얼른요.”
“그럼……. 저 카페라테로 할게요.”
“네. 아이스죠? 저희, 샌드위치 두 개랑요. 아이스 카페라테 두 잔이랑……. 그냥 아메리카노요. 가져갈게요.”
그는 연신 마다했지만 수영을 말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선우가 마지못해 대답을 하자마자 냉큼 계산하고는 자연스럽게 화두를 돌렸다.
“그나저나 뮤즈넷 근처에 이 가게가 있을 줄은 몰랐네요?”
“아. 얼마 전에 생겼어요. 한 달 전인가? 그 전까지는 공실이었고요.”
“아아…….”
“여기 좋아하세요?”
“네. 저 진짜 좋아해요. 아직 안 드셔 보셨어요? 샌드위치 완전 맛있는데. 학교 다닐 때 우리 학교 앞에 있었거든요. 이틀에 한 번씩은 꼭 갔던 곳이에요. 다음에 또…….”
“이틀에 한 번이 아니라 매일 사 줄 수도 있어.”
“네?”
모처럼 좋아했던, 여전히 좋아하는 가게를 만난 기쁨이 컸다.
수영은 그가 넌지시 건넨 물음에도 눈을 반짝거리며 줄줄 읊듯 대답했다.
그러다 느닷없이 끼어든 묘하게 이질적인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분명 선우는 아니었다.
선우의 목소리는 이렇게 낮은 음성도 아닐뿐더러 제가 말하기 시작한 이후론 입도 벙긋하지 않았기에 확신했다.
게다가 목소리는 굉장히 이 상황을 못마땅히 여기는 듯했고, 제 앞이 아닌 옆에서 들려왔다.
저도 선우도 아닌 제삼자의 목소리.
홱! 수영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최 팀장이 원한다면 가게를 사 줄 수도 있고.”
그러자 태진이 시야 가득히 들어찼다.

밀당하는 사이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