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마 내가 아니라고 해도 안 믿을 건 아니죠? 강 주임님 빚 갚으려면 앞으로 회사 열심히 다녀야 한다면서요. 그러려면 사원 평가에 목숨 걸어야 하는 거 아닌가?〉
〈본부장님…….〉
〈아니라고 하면 아니라고 믿어 줘요. 웬만하면 남 일에 관심 끊으시고. 누가 누구랑 만나든 두 분 일에 지장 있는 거 아니잖아요?〉
끝에 “안 그래요?” 하고 한 번 더 덧붙인 물음이 묘하게 살벌했다.
그야말로 웃는 낯으로 협박이라도 하듯이.
멀리서 듣는 주희도 서슬 퍼런 어조에 베일 것 같은데 당사자는 어떨는지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강 주임은 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역시나 전엔 볼 수 없었던 재빠른 반응에 태진이 흡족해하는 미소를 지었다.
〈좋네요. 그 사과, 그대로 최 팀장한테 가서 하세요.〉
〈…….〉
〈음. 강 주임님이 몇 년 차더라? 이제 슬슬 진급하실 때가 된 거 같은데.〉
〈해, 해야죠. 해야죠……. 그럼요.〉
〈역시. 강 주임님, 믿을게요.〉
아프지 않게 팔뚝을 치는 폼이 영락없는 격려인데 어쩐지 강 주임의 표정은 껄끄러워 보였다.
〈표정.〉
〈……예?〉
〈표정 관리하시라고요. 스마일.〉
〈아, 네……. 하하. 하하…….〉
그러나 그런 모습조차 용납하지 않는 태진의 말에 직원들은 억지로나마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허매…….〉
그 모습을 끝까지 보던 주희가 저도 모르게 넋을 놓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무서운 사람.
그게 그녀의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간 단어였다.
그간 보여 준 그에 대한 좋은 이미지는 전부 수영 앞에서만 취하는 태도라는 듯, 그녀가 본 태진은 너무도 낯설었다.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아서 모르는 줄 알았건만. 최소한 수영에 대한 건 모르는 게 없는 모양이었다.
〈지난번에 최 팀장 데리러 왔을 때도 그렇고. 최 팀장 일이라면 깜박 죽는단 말이야…….〉
주희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비로소 지난 일들에 간간이 든 의아함이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 일을 회상하는 지금도 마찬가지. 느닷없이 찾아와 하는 사과에 생겼던 의문이 풀려 버렸다.
자신이 본 것에 대한 설명을 마친 주희가 차를 홀짝였다.
“안 그랬으면 저 둘이 사과하러 왔을 리가 없지. 안 그래?”
“…….”
그녀의 이어지는 말에 수영의 입은 되레 다물어졌다.
머릿속이 뒤엉키기 시작했다.
주희의 말이 사실이라면 제 사정, 마음 따위는 신경도 안 쓸 거라 여겼던 이가 사실 모든 걸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라는 생각.
‘어떡해. 나는 그것도 모르고……!’
정작 알지도 못한 건 그가 아니라 저 자신이었다는 생각.
다 아는 척하면서 남의 속도 살피지 않고 말부터 내뱉은 건 본인이었다는, 그 눈앞이 캄캄해지는 생각.
아득해지는 정신에 수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뜨기를 반복했다.
그사이, 주희가 재차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다들 알 거야. 본부장님이 마냥 최 팀장 편애하진 않는 거. 자기가 좀 열심히 살았어? 아무리 편애를 받아도 본부장님 없을 때 그 나이에 팀장 단 건 자기가 우리 회사에서 유일하잖아.”
“…….”
“그냥 자기들이 실수한 거에 한 소리 들었다고 괜히 떠들어 대는 거지. 오히려 걔들을 더 봐주고 있던데? 저번에 정 대리가 그러더라. 자기들 건 보지도 않고 그냥 막 사인했다고.”
그녀의 말은 길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한 말은 수영의 귓속에 파고들었고, 감정과 뒤섞여 표정 관리도 엉망이었다.
“다른 팀을 좀 봐주면 그 사람들이 자기한테 안 그럴 거라고 생각한 것 같아.”
하아. 수영은 목 끝까지 차오르는 한숨을 욱여 삼켰다.* * *
“후…….”
자리로 돌아온 수영은 의자에 궁둥이를 붙임과 동시에 깊게 숨을 내쉬었다.
차마 포커페이스를 유지할 자신은 없어 얼굴을 숙이고 이마에 양손을 짚어 가렸다.
‘미치겠네.’
주희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사직서를 내던 날 보았던 태진의 표정이.
지나고 보니 뭐라고 떠들어 댔는지 확실히 기억도 안 나는데, 그는 거의 세상을 잃은 얼굴이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피부.
사시나무 떨듯이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
아래로 축 처진 눈썹.
풀 죽은 어깨.
떨림을 겨우 참아 낸 체념한 목소리.
빛이 사그라져 가는 눈망울까지.
누가 보면 수영이 작정하고 울린 사람이었다.
‘내가 말이 심했나.’
그 정도였나. 나 쓰레긴가.
‘그래. 심하기는 했지.’
그렇지 않고서야 진태진이 울 리 없다. 걔가 그렇게 쉽게 상처받고 그러는 애가 아닌데.
그렇기는 한데…….
‘아니……. 걔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말을 심하게 했으면 화를 내면 되지 왜 울고 그런담.
‘진짜 그 정도로 상처였다고?’
눈물을 뚝뚝 흘려 가면서 울 만큼?
‘아. 망했어.’
신경 쓰여 죽을 것 같다. 정말 난데없이 죄책감이 훅 밀려들어 왔다.
‘어떡하지.’
제가 한 말에 사과해야 할까.
아니, 굳이 사과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래도 애가 울었는데.’
“아…….”
미치겠네, 진짜.
그녀의 입에서 탄식이 늘어 갔다.
‘사과는 해야겠지…….’
어쨌든 뭣도 모르고 말을 심하게 한 건 맞으니까.
비록 정말 태진과 엮인 일이 전부 행복했던 건 아닐지언정.
수영이 갖고 있던 생각과 내뱉은 말들이 태진에 대한 오해 때문이었던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그 오해로 인해 본인이 저지른 잘못은 수습해야 했다.
그래서 태진을 직접 보고 사과를 하려고 했건만.
“…….”
아주 잠깐이지만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태진은 열심히 저를 피하는 중이었고, 눈조차 마주치지 않는 상황이었다는 것을.
“본……!”
수영이 군중 속 태진을 발견하여 다가가면 그는 더 빠른 걸음으로 사람들 사이로 숨질 않나.
덜컹.
“……아.”
“본부장님. 잠깐 드릴 말씀이…….”
“맞다. 화장실 가려는 걸 깜박했네.”
“본부장님 화장실에서 나오셨…… 보, 본부장님!”
우연찮게 문을 사이에 두고 마주칠 때면 이상한 말을 해 대며 화장실로 숨었다.
쾅!
결국, 수영은 답답함에 탕비실로 들어와 테이블을 세게 내리쳤다.
‘기회가 있어야 사과를 하든 말든 하지!’
어쩜 하루 종일 단 한 번의 기회도 못 잡는지, 원.
“피하려면 이렇게나 잘 피하는 인간이, 그동안은 내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었던 거다, 이거지?”
생각해 보니 괘씸해 죽겠다.
수영은 빠득 이를 갈며 후, 하고 입바람으로 앞머리를 날렸다.
“이 정도로 잘 도망 다닐 줄은 몰랐네.”
사과를 하려는데 더 열불이 터지는 건 왜일까. 수영은 알다가도 모를 이 마음을 달래기 위해 숨을 푹 내쉬었다.
“후……. 좋아.”
‘아직 기회는 있어.’
힐끔, 시계를 보니 5시 55분. 퇴근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어떻게든 퇴근 전에 진태진을 붙잡는다. 내가 오늘 꼭 한다, 사과.’
수영은 비장한 얼굴을 하곤 다시금 옷매무시를 정돈한 뒤 탕비실을 빠져나갔다.
오늘은 일도 얼추 마무리되었겠다, 칼퇴 정도는 무난하게 할 수 있는 날이었다.
하여 자리로 돌아온 그녀는 슬쩍 태진의 자리를 살폈다.
‘응?’
그런데 당연히 아직은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태진이 보이질 않았다.
자리뿐만이 아니라 그 어디에도 태진은 없었다.
“과장님!”
수영이 눈을 연신 깜박이다 말고 주희를 불러 젖혔다.
“본부장님 어디 가셨어요?”
“응? 본부장님? 방금 퇴근하셨는데. 왜?”
“네? 아, 씨……!”
설마하니 먼저 퇴근할 줄은 몰랐다. 이 역시 자신을 피하기 위함이리라. 일말의 다른 의심도 품지 않은 수영은 재빨리 가방과 겉옷을 집어 들었다.
“과장님, 저 먼저 퇴근할게요!”
“뭐? 최 팀장. 최 팀장!”
등 뒤로 들리는 목소리 따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수영은 당장에 태진을 붙잡는 게 우선이었고 목표였다. 그러니 미친 듯이 뛰어야 했다.
엘리베이터는 사치. 계단으로 뛰어 내려갔다.
“……우왁!”
“죄송합니다!”
가는 길에 만난 모르는 이와의 부딪힘도 불사한 그녀는 사과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1층에 다다랐다.
이윽고 밖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젖혔을 때.
“어디 있…… 어!”
하얀 눈이 세상을 뒤엎은 도로 위. 자신의 앞을 지나가는 태진의 차가 또렷이 눈에 들어왔다.
“택시!”
그 즉시, 수영은 고민하는 시늉도 없이 택시를 잡아탔다.
“저기 저 1784! 저 차 따라가 주세요!”
수영은 택시 뒷좌석 문을 채 닫기도 전에 입부터 열었다.
“남자 친구예요?”
“네?”
그랬더니 그 모습을 대체 어떻게 오해한 건지 택시 기사의 얼토당토않은 물음이 돌아왔다.
“남자 친구요?”
수영이 순식간에 풀어진 얼굴로 한쪽 눈살을 찌푸리자 택시 기사가 멋쩍게 웃어 보였다.
“아니, 아가씨가 너무 살벌하게 이야기하길래 혹시 남자 친구가 바람피워서 잡으러 가는가 했죠.”
“…….”
“남자 친구 아니에요?”
“아, 아니에요!”
수영은 흥분한 나머지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한데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영문은 알 길이 없었다.
아마도 어이가 없어서 피어오른 열꽃이리라. 수영은 그렇게 단정 지었다.
놀란 택시 기사는 몸을 들썩이다 이내 허허허 웃었다.
“아이구, 내가 오해했나 보네. 미안해요. 그럼 누군데 이렇게 급하게 쫓아간댜?”
“그냥, 친구예요. 급하게 할 말이 있어서…….”
“휴대폰 있잖아요? 문자도 있고, 전화도 있고. 요즘 젊은 애들은 그 뭐야, SNS도 맨날 하드만.”
“그…… 러게요.”
그걸 받으면 참 좋으련만.
전화를 걸어도 받질 않고, 불러도 못 들은 척에 먼저 도망가기까지 했다.
그러니 어떡하나. 직접 얼굴을 보기 위해 잡으러 가야지.
잠깐이라도 눈을 떼면 홀라당 사라져 버리는 놈인지라 그녀의 마음은 누구보다도 급했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 퇴사하는 날까지 태진의 눈썹 한 올도 보지 못할 것 같았다.
그건 또 싫어서.
수영은 머뭇거리던 입을 꾹 다물고 입꼬리만 살짝 실룩였다. 그러자 택시 기사가 거울에 비친 그녀를 한번 흘긴 뒤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남자 친구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