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복도를 지나 온갖 불투명 유리문 사이로 걸어가니 가장 끝에 위치한 큰 사무실 하나가 나타났다.
“여기예요.”
“되게…… 크네요.”
지금까지 여러 번 뮤즈넷을 방문했지만, 들어간 곳이라곤 기껏해야 회의실이 전부였다.
수영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강성보다 큰 것 같은데요?”
“하하. 그렇게 큰 차이는 안 나요. 게다가 운영팀도 있어서요. 다른 부서들보다 조금 더 큰 편이죠.”
“아…….”
“들어가요.”
선우가 사무실 문을 열어젖혔다.
수영이 따라 들어섰고, 동시에 낯선 직원들의 고개가 한곳으로 돌아갔다.
“잠깐, 얘기 하나만 할게요.”
선우의 입술이 재차 벌어졌다.
“음, 아마 익숙한 사람들도 있을 거예요. 이번에 새로 개발 사업 진행하게 되면서 팀장직을 맡게 된 최수영 씨입니다.”
“안녕하세요. 최수영입니다.”
그의 소개 뒤로 고개를 숙이자 박수 소리가 이어졌다.
생각보다 평범한 반응에 수영은 오히려 안도하며 남몰래 숨을 토해 냈다.
‘꼭 처음 입사한 사람 같네.’
그녀는 어색함에 쭈뼛거리면서도 나쁘지 않은 분위기에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 *
입사 첫날이 끝나는 건 너무도 순식간이었다.
“휴…….”
정신없이 하루가 지나가고, 퇴근 시간이 되어서야 긴장이 풀린 수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수영 씨.”
그와 동시에 선우가 다가왔다.
“아직 퇴근 안 했어요?”
“이제 하려고요.”
“얼른 해요. 첫날인데. 여기는 칼퇴 안 하면 사장님한테 혼나요.”
“네에…….”
이제 겨우 6시 5분 아닌가. 그러고 보니 아직 퇴근 시간 5분밖에 안 지났는데 반 이상은 빠져나가고 없었다.
적응되지 않는 상황에 넋을 놓자 선우의 입꼬리가 위를 향했다.
“저는 하얀이랑 약속이 있어서 먼저 가 볼게요. 오늘 고생 너무 많으셨어요.”
“아, 네. 들어가세요.”
그러곤 누구보다 퇴근에 진심이라는 듯 쌩하니 사라져 버렸다.
‘다들 빠르네.’
칼같이 퇴근해 본 적이 언제였더라. 새삼 당황스러워진 그녀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마저 가방을 집어 들었다.
띠링!
그러자 그녀가 퇴근할 것을 알아채기라도 했는지 휴대폰이 제 존재감을 뽐내었다.[끝났어?]
시간이 칼 같음은 비단 이 회사뿐만이 아닌 듯했다.
태진이 보낸 메시지에 수영의 손이 바삐 움직였다.[이제 막!]
[나도 이제 막 도착했어. 내려와.]
[금방 갈게]‘귀여워.’
오매불망 기다리는 저 이모티콘은 대체 뭐람. 평생 이모티콘 같은 건 안 쓸 것처럼 생겨 놓고, 저보다 더 잘 쓰는 것 같다.
수영은 키득키득 웃으며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이윽고 건물의 마지막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그녀는 더 걸음을 떼지 못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뭐야?’
정문 앞에 떡하니 차를 세우고 서 있는 태진과 그의 앞에서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있는 선우가 눈에 들어왔다.
‘왜 둘이 같이 있지? 그새 친해지기라도 했나?’
저 두 사람이 친해질 기미라고는 조금도 안 보였는데.
‘정확히는 진태진이 일방적으로 싫어했지.’
그런데 저렇게 가까이서 대화를 한다고?
수영이 미심쩍다는 얼굴로 슬그머니 둘에게 다가갔다.
다가가자마자 들린 건 선우의 목소리였다.
“예전에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일찍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하하하. 태진 씨 반응이 너무 재미있으셔서.”
얼핏 놀리는 듯 들리는 뉘앙스였다.
절대 고의는 아닌 것 같은데, 오해에 진심이었던 이가 듣기엔 울컥 치밀어 오르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태진이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실례가 많았다면서 표정은 전혀 안 그래 보이네요?”
“아, 죄송해요. 본부장님을 수영 씨 남자 친구로 뵈니까 반가워서 저도 모르게.”
“……크흠.”
불쾌함을 내비치자 선우의 언행이 금방 사그라들기는 했다.
‘수영이가 말했나 보네.’
‘수영 씨 남자 친구’라는 말이 꽤나 마음에 드는지라 태진은 방금 내었던 짜증을 거두었다.
“수영이 잘 부탁합니다. 굳이 다른 곳으로 갈 이유가 없는 애지만, 다양한 경험은 필요하니까요.”
물론, 짜증만 거두었을 뿐 호의적으로 변한 건 아니었다.
‘쟤가 지금 뭐라는 거야?’
태진의 말에 수영이 인상을 찌푸렸다.
‘다른 곳으로 갈 이유가 없어?’
강성에서 그 사달이 날 때 직원들 사이에서의 분위기를 직접 느끼고 눈치까지 보던 사람이 선우다.
그걸 알기에 수영에게 이직을 제안한 건데.
여기 올 이유가 있다는 걸 이 중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무슨 저런 씨알도 안 먹힐 거짓말을 해 대는지.
비릿하게 올라간 입꼬리와 표정을 보니 선우에게 일부러 그러는 모양이었다.
“제가 지켜볼 겁니다. 우리 수영이.”
‘쟤 진짜 미쳤나 봐!’
저 입을 당장 막아 버려야겠다. 왜 진태진은 당당한데 부끄러움은 제 몫인지.
“야, 진…….”
“네. 걱정 마세요.”
수영이 부리나케 손을 뻗어 그를 말리려 하는 찰나. 선우가 싱긋 미소 지었다.
“저희 팀 사람들 다 착합니다.”
제기랄. 선우는 더한 사람이었다.
수영보다 한발 빠르고, 그녀의 예상을 빗나간 반응이었다.
“뭐…….”
태진이 어이를 상실한 낯을 띠었다.
반박이라도 하려는지 잠시나마 꾹 다물었던 입술을 벌리려던 때였다.
“진태진!”
수영이 재빨리 그의 손목을 잡아챘다.
“가자.”
“…….”
“가자고, 얼른.”
이러다 싸우겠다. 진심인 태진에 비해 누가 봐도 장난스러운 선우의 대화는 길지 않을수록 좋았다.
수영이 거듭 재촉하자 태진이 못 이기는 척 선우를 째려보고는 그녀가 탈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두 분 다.”
“…….”
“네. 선…….”
탁. 수영은 대답을 채 하기도 전에 닫힌 문을 통해 태진의 감정을 읽어 내었다.
‘제대로 삐쳤네.’
그렇지 않으면 대화 중에 문을 닫아 버릴 리가 없다.
화내는 걸 잘 보지도 못했지만, 화가 났다고 해서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니 이건 삐친 거다. 그것도 제대로.
‘에휴.’
수영은 짤막한 숨을 내쉬었다.
슬쩍, 고개를 돌려 이제 막 운전석에 올라탄 태진을 쳐다보았다.
입만 삐죽 안 내밀었지, 조금 일그러진 미간과 찡그린 콧잔등이 그의 기분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수영이 빤히 쳐다보았다.
“삐쳤어?”
“삐치긴 누가.”
‘삐쳤네.’
어쩜 이렇게 알기 쉽냔 말이야. 왜 선우가 아까 태진의 반응이 재미있다고 한 건지 알 것 같다.
수영은 그의 시야 밖에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곤 다시금 태진을 힐끔 보며 넌지시 말했다.
“너무 기분 상해 하지 마. 선우 씨는 왠지 너 좋아하는 거 같은데.”
“좋…….”
무슨 그런 전해 듣는 것만으로도 짜증 나는 소리를, 하듯 눈이 번득였다.
태진은 짤막한 한숨을 토해 냈다.
“내가 싫어. 내 앞에서 널 더 안다는 듯이 말했잖아.”
“응?”
“우리 회사에 있는 것보다 거기 있는 게 더 네가 행복할 거라는 것처럼 말했다고.”
“…….”
그는 생각 이상으로 진지해 보였다.
“그야…….”
예상 밖의 대답에 수영이 머뭇거리는 시늉을 하면서도 입을 마저 열었다.
“사실이긴 하니까……?”
“뭐?”
아니라곤 하지 않는 그녀의 반응에 태진이 눈을 부릅뜨고 수영을 돌아보았다.
그는 그녀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는 듯 적잖이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수영이 말을 이어 했다.
“아니 뭐, 네 탓이라는 게 아니라. 솔직히 여기로 옮긴 것도 회사 사람들 때문이잖아.”
“…….”
“그걸 보면 틀린 말은 아니라는 거지. 그리고……. 너, 아까 일부러 그랬지?”
“뭐가?”
“잘 부탁한다고 하면서 막 이상한 말 한 거.”
조금도 선우에게 호의적인 말 같은 건 해 주지 않겠다는 의지가 강해 보였다.
그의 의기양양한 말이 어찌나 당황스럽던지, 당장 입을 틀어막고 싶기까지 했었다.
그러다 선우의 대답에 말문이 막혔으니 망정이지. 수영은 내심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었다.
그녀는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중얼거리듯 말을 이었다.
“네가 일부러 시비 걸던데, 뭐.”
“야, 그건 시비가 아니라!”
“아니라?”
태진은 마땅히 대꾸할 말이 없었다. 잃었다는 말이 정확했다.
그는 재차 반복된 그녀의 질문에 답하지 못하고 침만 꿀꺽 삼켰다.
“아니면 뭔데?”
그러자 수영이 거듭 물어 왔다. 무언가 그에게서 색다른 대답이 들려오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그렇게 한참 입도 벙긋하지 못하고 있던 태진이 고개를 홱 돌리었다.
“……맞긴 한데.”
“거봐.”
“아무튼, 싫어. 그 사람.”
“…….”
“왜, 왜 그렇게 봐.”
“아니야. 아무것도.”
스스로도 찔리기는 하는가 보다.
그저 가만히 쳐다보았을 뿐인데도 흠칫 놀라며 말까지 더듬는 모습에 수영이 실소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제 반응에 태진이 일희일비하는 게 꽤나 웃기기는 하지만 굳이 그 티를 내고 싶지는 않았다.
하여 수영은 시치미를 뚝 뗀 채 “가자.” 하고 턱을 정면으로 내밀었다.
“하여간…….”
태진이 한껏 억울해하는 표정에 불만을 조금 섞더니, 이내 본인도 어쩌지 못한다는 걸 알았는지 시선을 정면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