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 어떻게 집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병원을 나오고 차에 올라타 자신의 집에 다다를 때까지도 둘 사이에 대화는 없었다.
차에 앉아 있는 동안 수영은 바깥으로 고개를 고정한 채 태진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녀가 기억이 나는 건 그게 전부였다.
그렇게 도착한 집 현관 앞. 수영이 힘없이 문을 열었다.
“나 왔어.”
“야, 최수영! 너 왜 전화 안 받……. 뭐야, 너 다쳤어? 어디서?”
들어오자마자 수진의 타박과 걱정과 궁금증 섞인 물음이 쏟아졌다.
“야, 최수영! 어디서 다쳤냐고!”
그러나 지금은 일일이 대꾸해 줄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제 언니의 부름을 뒤로하고 방문을 굳게 닫았다.
“…….”
화악, 동시에 얼굴에 열이 피었다.
‘미쳤어.’
수영은 침대에 쓰러지듯 엎어져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이게 뭐야, 진짜!’
퍽퍽, 주먹으로 침대를 내려쳐도 마음이 진정되지는 않았다.
‘미쳤어, 최수영……!’
심장이 쿵쿵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선명했다.* * *
다음 날. 무려 출근하기 전인 아침, 수영이 이제 막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바깥 공기를 마시는 그때.
“이제 나오냐?”
태진이 눈앞에 나타났다.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몰라도 하품을 하다 말고 수영을 보자마자 방긋 웃는 얼굴이 꽤나 환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어둡던 낯빛은 온데간데없이.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당황한 건 수영뿐이었다.
수영은 입을 쩍 벌린 채 그를 똑바로 가리킨 손가락을 부들부들 떨었다.
“너……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너 왜 여기 있어?”
“뭐 하긴. 출근길에 데리러 왔지. 타.”
“아니……!”
‘그러니까 출근길에 네가 왜 여길 오냐고! 완전 반대 방향인 주제에!’라고 말하고 싶으나 기가 찬 나머지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조수석 문까지 열어 주며 해맑게 웃고 있는 저 얼굴을 보고 나무라기도 참 애매한 탓이었다.
수영은 휴대폰에 뜬 시계를 한번 살핀 뒤, 마지못해 걸음을 내디뎠다.
‘정말 어쩔 수 없이 타는 차야. 어쩔 수 없이…….’
고작 몇 마디 나누었다고 시간이 훌쩍 가 버려 까딱하면 지각할 것 같기도 하고, 다리를 다쳐 지하철을 타기엔 힘들기도 하니까.
그녀의 머리는 애써 마음을 가다듬기에 급급했다.
‘아니……. 지금 이게 문제가 아니지.’
수영은 곧장 정신이 번쩍 들어 미간을 좁혔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도무지 그가 왜, 무슨 용건으로 아침부터 저를 찾아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수영이 재차 입을 열었다.
“너, 근데 진짜 왜 왔는데?”
“너 데리러 왔다니까?”
“그러니까 ‘왜’ 왔냐고. 날 데리러.”
거듭 물어도 키득거리며 대답하는 태진의 태도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던 그녀의 목소리가 단호히 튀어나왔다.
태진은 그녀와 눈을 한번 마주치더니 다시금 정면으로 시선을 돌리며 별일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다쳤잖아.”
“…….”
“내가 모르고 있었으면 몰라도, 아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냐?”
하나 그 ‘별일’ 아니라는 듯한 가벼운 말투에는 생각보다 진심이 가득했다.
“…….”
모르고 있었으면 몰라도, 아는데 어떻게.
이 말이 왜 이렇게 다양한 의미로 들리는지.
분명 의미는 하나뿐일 텐데, 제 마음이 예전과 같지 않으니 자꾸만 여러 의미를 두고자 했다. 그리고 그 의미는 제 심장을 마구 간지럽혔다.
“……그래.”
수영은 더 말도 못 하고 고개를 홱 돌려 창밖으로 눈을 돌려 버렸다.
터질 것 같은 얼굴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라지만, 이미 두 손은 어쩔 줄을 몰라 쉴 새 없이 꼼지락거렸다.* * *
“세상에, 최 팀장!”
어떻게 왔는지도 모르겠다. 숨 쉬는 것조차 신경 쓰이는, 왠지 모를 긴장의 연속이었던 출근길이 끝나고 회사에 도착했으니 이제 좀 살겠구나 싶었는데.
사무실에 발을 들이기 무섭게 주희의 목소리가 귓속에 내리꽂혔다.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란 얼굴로 호들갑을 떨어 댔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어쩌다 다쳤어? 넘어진 거야? 어디서? 어쩌다가!”
그렇잖아도 큰 목소리의 소유자가 놀라니 사무실뿐만 아니라 복도를 지나다니는 시선까지 단숨에 빼앗았다.
수영은 멋쩍게 웃으며 작게 대답해 주었다.
“그냥…… 집 가다가 넘어졌어요.”
“그랬어? 아휴, 조심 좀 하지. 얼마나 다친 거야? 안 아파? 금방 낫는대?”
“네. 크게 다치진 않았는데, 그래도 무리하지 말래요.”
“그래?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네. 으이그, 조심하지 그랬어……. 흠, 흠. 저기.”
그에 연달아 질문을 쏟아 내던 주희가 대뜸 목을 가다듬더니 목소리를 낮추기 시작했다.
이제 와 주목을 받은 것이 부끄러웠던 걸까 생각한 것도 무색하게, 주희는 태진을 한 번 힐끔 쳐다보고는 거듭 물었다.
“두 사람…… 이제 화해한 거야?”
“네? 아, 네…… 뭐…….”
이제는 저를 피하지 않는 걸 보면 나름 화해를 하기는 한 거겠거니.
수영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러자 곧바로 주희의 낯빛이 환하게 바뀌었다.
“잘됐다! 그래, 둘이 싸워서 뭐 해. 이러나저러나 친구라며.”
“아……. 음.”
친구.
〈내가 너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르는구나.〉
친구…….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진심이야.〉
친구…….
〈네가 아무리 날 미워해도 나는 너 미워하지 못할 만큼.〉
친구, 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마다 태진이 했던 말들이 스쳐 지나갔다.
‘왜?’라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봐도 이렇다 할 답은 찾지 못하였지만.
“얼마 안 남은 기간 동안 편하게 있다 가. 몸도 성치 않은데.”
〈어디 봐 봐.〉
“네…….”
수영은 최대한 그를 떠올렸음을 티 내지 않으려 억지로 입꼬리를 올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다행히 그 수법이 통했는지 전혀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한 주희의 말이 이어졌다.
“본부장님도 자기 처음 봤을 때 놀라셨겠다. 하루아침에 붕대 감고 나타나서.”
어쨌든 사무실에 동시에 나타났으니 자신보다 더 먼저 보았을 거라 여기기는 한 모양이었다.
이 또한 다행히, 같이 출근했을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한 눈치였다.
주희의 말에 수영은 머뭇거리다 말고 이내 수긍했다.
“네. 조금 놀라신 것 같더라고요.”
굳이 어제 일을 언급할 필요는 없겠지 싶었다. 하여 대수롭지 않았다는 듯 대답한 거였는데.
어쩐지 주희는 그럴 리가 없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자기는. 본부장님이 조금이겠어? 조금인 척하는 거지, 아주 간이 쪼그라드는 기분이셨을걸? 나도 이렇게 놀랐는데.”
“…….”
마치 그가 저를 좋아하는 것이 진심임을, 그것이 한 치의 거짓이 없음을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다행이다. 큰일 아니어서.〉
그러고 보면 그랬다.
수영이 ‘감히’ 남에게 대수롭지 않게 그가 보인 반응을 말하기 힘들 만큼 태진은 긴장을 했었다. 그만큼 걱정도 했겠지.
그러니까 끝을 보고 나서야 주저앉아 한숨을 쉬다 웃었을 테다.
속도 없이.
‘아……. 미치겠네, 진짜.’
수영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건 제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할 수가 없는 감정이었다. 수영 본인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감정.
그녀의 고개가 슬그머니 올라가 태진이 있는 방향을 향했다.
쿵. 쿵. 그와 눈을 마주치고 있지 않음에도 제 시선이 닿았다는 사실에 어제처럼 또다시 심장이 요동쳤다.
‘……아니야. 이제 와서.’
수영은 스스로를 질책하려 머리를 마구 흔들었다.
‘다 끝나 가는 마당에 이제 와서 무슨!’
어차피 자신은 나갈 사람이고, 이건 그냥 잠깐의 감정일 것이다.
그간 그에게 품었던 미운 감정들이 오해에서 비롯됐다는 게 미안하고, 그럼에도 제가 좋다는 고백을 들어서.
그런 후 돌이켜 보니 그가 보였던 모든 말과 행동들이 진심이었다는 걸 깨달아서.
아주 잠깐이지만 그로 인해 설레어 어릴 적 묻어 두었던 감정이 꿈틀댔던 것뿐이었다.
그래. 그런 거다. 틀림없이.
“후우…….”
수영은 눈을 질끈 감고 긴 호흡을 내뱉었다.
‘정신 차려.’
수영이 고개를 급히 쳐들었다.
‘나중에 후회할 짓 하지 말자.’
10여 년 전에도 그랬지 않은가. 짧게나마 태진은 모르게 그를 좋아했던 시절, 되든 안 되든 마음을 전하려던 그날 도로 접었다.
전학을 간다는 제 친구와 끌어안고 있던 태진을 본 순간 말이다.
‘……생각보다 빨리 끝났었지.’
이후부터는 미워지면 미워졌지, 그 비슷한 감정은 조금도 들지 않았고.
수영은 그때 깨달았다.
어느 순간 저 사람이 괜찮아 보인다는 감정을 좋아하는 거로 착각했구나.
‘그러니까 이번에도…….’
어지러운 마음속에 그가 머무르는 바람에 타이밍 좋게 찰나의 감정이 흔들렸던 것뿐. 이번에도 이전과 같을 거라며 그녀는 마음을 다잡았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벌써 일주일이 지나는 중이니 그와 얼굴 볼 일이 없어지기까지 앞으로 3주 남았다. 지금까지 어떻게 버텼는데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