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한참을 고민했다. 대기업의 후계자 같은 사람들은 대개 약혼자가 정해져 있다고들 하는데. 태진도 그러지 말라는 보장은 없지만, 그래도 일단은 자신이 태진의 연인이기는 하니까 굳이 숨길 이유도 없지 않나.
수영이 꽉 쥔 주먹에 힘을 주며 말했다.
“네. 하고 있습니다.”
‘저질렀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앞뒤 없이 지르고 보는 일은 드물었는데, 특히나 이렇게 엄청나게 저지른 건 처음이었다.
꿀꺽. 바짝 마른침을 억지로 삼켰다.
제 대답을 들은 진 회장의 심각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등줄기에 땀이 주룩 나는 기분이었다.
얼마 후, 그가 재차 물어 왔다.
“헤어질 생각은, 없고?”
쿵. 순식간에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1초 전까지도 예상했던 말이고 전개인데 막상 들으니 입술이 바짝 말랐다.
수영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곤 결심한 듯 목에 힘을 주어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마 그 어떤 말이라도 진 회장에겐 통하지 않을 게 뻔하였다.
한데 그렇다고 해서 마냥 가만히 ‘알겠습니다.’라고 하고 싶지는 않았다.
수영이 떨리는 음성을 겨우 가다듬었다.
“비록 진지하게 만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진심으로…….”
“자네가.”
“…….”
“내 아들놈이랑 어릴 때부터 같이 다녔다고 들었어.”
“그건…….”
“그리고 그놈이 자네를 꽁무니 빠지게 쫓아다녔다는 소리도 들었고.”
“…….”
한 마디, 한 마디 진 회장이 말을 거듭할수록 무언가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꾹 짓눌리는 기분이었다.
분명 그는 한없이 온화한 말투와 표정으로 얘기하는데 목소리에서 은근한 딱딱함이 묻어났다.
꼭 애써 답답함을 표출하지 않고 참는 느낌.
진 회장이 미간을 살짝 좁히다 이내 눈썹을 꿈틀대며 소파 등받이에 등을 기대었다.
“덕분에 그놈이 좀 정신을 차렸기는 했는데……. 아무튼 이런 말을 하려던 건 아니고.”
“…….”
“헤어질 생각이 없다니. 자네가 그래도 그놈을 아니까 내 마음을 조금은 이해해 줄 줄 알았는데 말이야.”
“…….”
“시간은 충분히 줄 테니 한번 잘 생각해 봐. 그럼 이만 나가 봐도 좋아. 내가 너무 시간을 많이 빼앗았네.”
끝에 희미한 미소가 이어졌다. 얼핏 수영에게 최대한 부드럽게 해 주려는 듯도 보였으나 그럼에도 그녀의 표정은 좀처럼 풀리질 못하였다.
“안녕히 계세요.”
수영은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한 뒤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여기…… 화장실이 어디예요?”
그러곤 문 닫히는 소리가 나기 무섭게 저를 안내했던 여자에게 물었다.
“나가셔서 왼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수영은 곧바로 화장실로 향했다. 뛰어들어 오다시피 한 그녀는 문을 닫고 기대어 섰다.
“…….”
다리가 사시나무 떨듯 바르르 후들거렸다. 이내 긴장이 풀린 건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하아…….”
수영은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 *
띵동.
몇 시간 후, 저녁이 되자마자 태진이 그녀의 집으로 찾아왔다.
“잘 놀고 있었어?”
문을 열자 낮도 아닌데 그의 웃는 낯이 시야에 환히 들어왔다.
“…….”
그러자 참 이상하게도, 손잡이를 잡을 때까지 들었던 불안감이 물에 닿은 솜사탕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수영이 실소했다.
“완전.”
“뭐야, 최수영.”
그에 마냥 즐거워 보였던 태진이 눈을 가늘게 뜨고 어깨를 축 늘였다.
“나 없이 진짜 잘 살았나 보네.”
그의 서운함 가득한 말투에 수영이 멈칫했다. 하나 그 티를 내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새침한 표정으로 뒤를 돌았다.
“기껏해야 몇 시간인데 무슨…….”
“아아, 서운하다.”
그때, 태진이 집 안으로 다시 들어가려는 수영을 와락 끌어안았다.
“나는 그 몇 시간 내내 보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는데.”
그러고는 제게 속삭이듯 나지막이 말했다.
“매시간 보던 얼굴 못 보니까 죽겠네.”
“…….”
어린아이도 아닌데 마치 아이 대하듯 해 주길 원하기라도 하는 양 투정의 정도가 심했다.
당황한 수영이 어색한 웃음을 토했다.
“앞으로도 그럴 텐데…….”
“야, 최수영.”
그와 동시였다. 냅다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수진이 거실로 나와 수영을 쳐다보았다.
“너 밥……. 너희 뭐 하냐?”
아마도 그냥 밖에서 소리가 들리니 그녀가 있음을 깨닫고 나와 본 듯싶었다. 그런데 때마침 둘이 부둥켜안고 있는 걸 목격한 것이다.
수진은 당황하기는커녕 못 볼 꼴을 보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쳐다보았다.
“어? 어, 아니. 어……. 어? 뭐라고?”
되레 당황한 건 수영이었다. 그녀는 재빨리 그의 팔을 뿌리쳤다.
“못 들었는데, 뭐라고 했어?”
“밥 뭐 먹을 거냐고.”
“아, 글쎄? 모, 모르겠는데?”
“그럼 시켜 먹자. 피자 먹고 싶어.”
“어어. 그러든가.”
“태진이도 먹고 갈 거지? 그럼 그냥 두 판 시킨다?”
“네, 누나.”
수진은 이상하리만큼 담담한 어조로 제 할 말만을 끝내곤 다시금 방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다행히 상황은 부드럽게 흘러가 정리되었으나 의문점만 가득 남은 태진은 눈을 깜박였다.
“누나가 웬일이시지? 누나한테 사귄다고 이야기한 적은 없지 않나?”
당연히 관계를 들키면 드디어 사귀는 거냐고 집 안을 방방 뛰어다닐 줄 알았다. 수진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니까.
근데 웬걸, 무덤덤한 수준이 아니라 익숙하다는 뉘앙스였다.
태진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수영이 낯을 붉게 물들이곤 작게 대답했다.
“……봤대.”
“뭐를?”
그러나 너무 작았던 탓일까. 그는 아직까지 표정에 궁금함이 가득해 보였다.
“너랑 나랑…… 한 거.”
“어?”
“아, 바다 갔을 때 너랑 나랑 키스한 거 언니가 봤다고!”
그걸 꼭, 콕 짚어서 이야기해 주어야 알아듣냔 말이야!
결국 수영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라 소리치다시피 말했다.
“……헙.”
그제야 태진도 숨을 참고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아직도 민망함이 가라앉질 않았는지 씩씩거렸다.
“씨이…….”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쥐구멍에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명절 다음 날엔가, 본가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온 날. 아무렇지 않게 ‘너희 둘이 사귀지?’로 시작해서 ‘나 봤다?’로 이어지더니 ‘바다에서 애정 행각 벌인 거.’로 끝나던 그 말들.
그러니 현관 앞에서 끌어안고 있는 것 정도는 애들 소꿉장난 수준으로 보일 수밖에.
태진이 묘하게 납득이 간다는 얼굴로 바꾸었다.
“……언제 보셨대.”
그러면서도 멋쩍기는 한지 하하, 웃었다.
“그날 밤에 둘이 같이 있었던 건 모르시…….”
“야!”
멋쩍어 보인다는 거 취소다. 진태진한테 ‘민망’은 개뿔. 철판을 깔아도 몇 개는 깔았을 놈이라는 걸 깜박했다.
한술 더 뜨려는 말에 수영이 급히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너 미쳤어?”
수영이 인상을 구길 대로 구기곤 당장 그 입을 다물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눈빛을 보내었다.
물론 그게 통할 태진이 아니었지만.
“읏.”
오히려 그는 저를 가린 손바닥에 입을 맞추며 그녀에게 한껏 눈웃음을 지었다.
어느새 그녀의 손은 그에게 붙잡혔다. 말캉한 감촉에 간지러움이 느껴져 수영의 미간이 좁아졌다.
이윽고 태진이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쪽. 둘의 입술이 닿은 건 즉시였다. 처음에는 짧게, 그다음은 조금 더 길었다.
태진의 유도 하에 두 사람의 걸음이 수영의 방으로 향하였고, 문은 약간의 틈만을 남겨 둔 채 닫힐 듯 말 듯 했다.
등불도 켜지 않아 정말 한 줄기 빛만이 전부인 공간이었다.
“하아…….”
잠깐 멀어진 사이, 수영이 숨을 몰아쉬었다.
〈헤어질 생각은, 없고?〉
그때, 하필이면 진 회장의 목소리가 귓가에 윙윙거렸다.
“…….”
덩달아 그녀의 숨도 멈추었다.
‘나는…….’
수영은 몇 번을 생각해도 저를 보며 웃고 있는 이 남자와 헤어질 생각이 없었다.
무작정 억지를 부린다고 해서 끊어져야 할 인연이 끊어지지 않을 리는 없지만, 한번 부려 보고 싶었다. 억지.
수영이 입술을 세게 짓이겼다.
“나는…….”
그러다 자신에게 최면을 걸듯 중얼거렸다.
“너랑 헤어질 생각 없어.”
“……뭐?”
“헤어지고 싶지 않아.”
“…….”
“네가 좋아. 진태진.”
사람 감정이 이리도 휙휙 바뀔 수 있는 거였던가. 어이가 없어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어느 순간 정신 차리고 보니 그가 너무도 좋아졌다. 감히 감당하기 힘들 만큼. 그래서 다른 걱정이 들다가도 얼굴만 보면 싹 다 잊어버릴 수 있을 만큼.
수영이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그의 가슴팍을 붙잡았다.
“……하하.”
태진은 그런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며 낮게 웃어 보였다.
“그걸 이제 알았어?”
“…….”
“네가 나한테 빠진 지가 언젠데.”
그는 이어 엄지로 수영의 뺨을 쓸었다.
“분하네, 최수영.”
“…….”
“나랑 ‘헤어진다’는 생각도 하고.”
“…….”
“나는 처음부터 그런 생각은 갖다 버렸는데.”
달칵. 문이 완전히 닫혔다. 빛이라고는 문 아래 틈으로 희미하게 들어오는 게 전부인 방 안에서 둘의 입술은 재차 포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