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띵!
또다시 싸움이 시작되려는 때. 상황을 정리해 주려는 듯 엘리베이터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그 안에서는 보안팀으로 보이는 여럿이 쏟아져 나왔다.
“비키라니까!”
그들을 발견한 남자의 몸부림이 격해졌으나 태진은 너무도 단단히 그를 붙잡았다.
보안팀에게 넘겨질 때까지 남자는 조금도 벗어날 수 없었다.
“에이…….”
욕지거리를 내뱉던 남자가 붉으락푸르락하는 얼굴로 태진을 쏘아보았다.
“씨…….”
하나 그것도 잠시, 그와 눈이 마주친 남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눈을 피했다.
끝까지 입을 다물지 않은 건 나름의 자존심이었다.
남자의 언행에 태진이 픽 웃곤 고개를 돌려 수영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직 놓았던 넋을 되찾지 못했는지 멍하니 허공만 주시하고 있었다.
수영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게……. 이게 뭐야?”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인지할 새도 없이 수상한 남자가 들이닥치고, 태진이 나타나고, 보안팀이 나타나 남자를 데려갔다.
체감상 10분도 걸리지 않은 듯했다.
〈퇴근한 후에 들락날락하는 사람이 CCTV에 잡혔대.〉
수영은 오늘 오후 주희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별생각 없이 들었던 말이었는데 눈으로 직접 보니 더 소름 끼쳤다.
“으.”
이제야 정신이 돌아온 수영은 제 팔을 여러 번 쓰다듬었다.
“내가 오길 잘했지?”
그러는 사이, 어느덧 태진이 나타나 그녀의 뒤에 바짝 다가와 섰다.
“이럴 줄 알고 내가 온 거야.”
그는 의기양양한 얼굴이었다. 수영이 크게 뜬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알고…… 있었다고? 어떻게?”
아까부터 무서울까 봐 왔다느니 하며 이상한 소리만 해 대더니. 그게 장난이 아니라 진심이었나.
정말 제가 걱정되어서? 일부러?
설마.
“뭐…….”
은근한 기대감이 태진에게 향할 때쯤 그의 말이 이어졌다.
“그게 중요해?”
“어?”
“내가 널 위해 여기까지 왔다는 게 중요하지.”
그만큼 내가 널 위한다는 거 아니야.
“안 그래요?”
헤실헤실 웃는 낯이 현재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환했다.
그의 말에 하, 하는 바람 소리를 내었다.
‘그럼 그렇지.’
그냥 타이밍이 맞았을 뿐인가 보다.
수영은 팍 식은 눈빛으로 그를 흘겨보았다.
“네. 잘하셨네요. 인제 그만 비켜 주세요. 야근해야 해서요.”
그에 태진은 뻔히 보이는 그녀의 속을 모르는 척 장난스럽게 되묻기만 했다.
“아직도 일이 안 끝났어요?”
“네. 안타깝게도 아직 안 끝났네요. 누가 야근도 시키고, 야근하는 사람 옆에 와서 방해까지 하셔서요.”
“같이 할까, 야근? 또 저런 사람이 나타나면 어떡해.”
“됐어요. 이제 괜찮겠죠.”
수영이 얼굴에서 표정을 지우곤 그를 지나쳤다.
“그러니까 그만 가 주세요. 본부장님 있으면 집중이 안 돼서.”
“왜요? 나 보느라?”
“착각은 집에 가서 하시고요. 여긴 회사니까 제발.”
끊임없이 따라와 말장난을 해 대는 태진에게 진저리가 나 그녀가 사무실 앞에 멈추어 서선 그를 돌아보았다.
수영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환하고 영업력 꽉 찬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 따라오지 말아 주세요. 업무 때문에 오신 게 아니라면 이 문, 넘어오지 마시고요.”
“뭐……. 아니, 잠깐. 최 팀장.”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진태진 본부장님.”
“최 팀장. 최 팀장?”
미처 끝내지 못한 그의 말을 들어 줄 기색조차 없었다.
“최수…….”
문이 닫힐 때쯤 몸을 돌려 들어가 버리는 그녀의 뒷모습이 조금 전 목소리만큼이나 단호하게 느껴졌다.
“……이런.”
이 문을 넘어갔다간 그때는 진심을 담은 원망을 들을지도 몰랐다.
결국 태진은 들어갈 수 있음에도 들어가지 못한 채로 문 앞에 우두커니 서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기다릴 수도 없고.”
괜찮긴 할 텐데. 그래도 드는 걱정에 발이 쉽게 떨어지질 않는다.
“……아쉽네. 같이 있고 싶었는데.”
제 나름 중요한 술자리였다.
업무나 다름없는 자리를, 미처 다 끝나기도 전에 먼저 일어나 달려온 거였는데.
사실인지도 모를 그 뜬소문 하나에 수영이 떠올라서.
태진이 등 뒤로 숨기고 있던 왼손을 만지작거렸다.
조금 전 실랑이에서 얻은 영광의 상처였다.
“엄살 좀 떨어 볼걸.”
아프다고 투정이라도 부렸으면 한 번 더 봐주기라도 했을 것을.
주제에 또 걱정시키기 싫다고 그새 통증을 숨겼다.
태진의 입가에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쓴웃음이 걸렸다.
“웃는 건 여전히 예쁘네.”
화날 때만 웃는다는 게 문제지만. 웃는 거 보려고 화나게 할 수는 없으니까.
“내일 봐요. 최수영 팀장.”
그녀는 보지 못할 표정으로 인사를 건넨 그의 발이 느릿하게 뒤로 움직였다.

* * *

“수고하셨습니다.”
어제에 이은 3팀의 회의가 끝난 직후.
“밥 먹으러 갑시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직원들을 따라 회의실에서 나오며 주희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최 팀장 어제 고생 좀 했구나?”
과연 입사 때부터 남다르던 에이스라며, 주희가 그녀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말도 마세요.”
그에 수영이 힘없이 대꾸했다.
“새벽에 퇴근했어요.”
수영의 푸념 섞인 말에 주희가 눈을 크게 뜨고 관심을 보였다.
“그 정도야? 고생 많았네.”
“이게 다…… 본부장님 덕분이죠.”
망할 진태진. 재수 없는 진태진.
걔만 아니었어도 업무가 밀려 늦게 집에 갈 일은 없었을 텐데.
수영은 분이 풀리지 않아 어금니를 꽉 물고 중얼거렸다.
“으…….”
“에이. 그래도 새로 오신 본부장님, 일은 잘하더라.”
“네?”
그녀 딴엔 제 편을 들어 줄 줄 알고 한 푸념에 가까웠건만. 어쩐지 돌아오는 건 태진에 대한 옹호였다.
수영이 어이가 없어 되묻자 주희의 말이 이어졌다.
“본부장, 벌써 우리 부서 업무 다 파악했다던데?”
“걔…… 아니, 본부장님이요?”
“그래. 사실 처음엔 다들 반신반의했는데 이젠 회의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다잖아. 자기 오기 전에 계획 변경된 사항까지 다 알고 ‘그거랑 접목해서 이렇게 바꾸는 건 어떻겠냐’고 말을 한대.”
“그…… 래요?”
“그래. 말이 처음이지, 10년 가까이 교육받았다는 소문이 진짠가 봐. 외국물은 뭐가 다르긴 다른가 보더라고.”
“…….”
걔가? 그 뺀질이가? 말도 안 돼.
수영은 도저히 믿을 수 없어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주희의 말이 끝나면 바로 ‘뻥이야!’ 하고 말할 것 같은데, 더 이어지는 말이 없었다.
“그건 그렇고, 최 팀장.”
주희는 곧 화두를 돌리었다.
“별일 없었어?”
그녀는 제가 어제 말했던 ‘남자’에 관해 묻고 싶은 모양이었다.
잔뜩 기대하는 낯에 수영이 잠깐 생각하는 듯하더니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없었어요.”
“아……. 그래? 그럼 다행이고.”
굳이 말할 필요 없겠지 싶었다. 말하면 태진의 이야기를 해야 하고, 그러면 단둘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될 터.
수영은 사서 고생하고 싶진 않았다. 비록 아쉬움 가득한 눈초리를 받을지언정.
“근데 있잖아, 최 팀장.”
하나 언제 그랬냐는 듯 주희는 얼마 안 가 수영에게 바짝 다가왔다.
“자기는 연애 안 해?”
“연애요? 왜 갑자기…….”
“아니 뭐, 대놓고 티 팍팍 내는 본부장님도 있고.”
있고, 뒤에 더 이을 말 따위는 애초에 없었는지 그녀의 말이 끊겼다. 처음부터 태진에 대한 생각을 묻고 싶었던 듯했다.
수영은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생각 없어요. 그리고 본부장님은 좀…….”
‘애’보다는 ‘증’이 더 많은 애증의 대상이었다.
좋지만 싫고, 싫지만 억지로나마 학창 시절을 같이 보낸 사이인지라.
정말 말 그대로 애증이었다. 그런 애랑 무슨 연애를 하나. 떠올리기만 해도 화가 부글부글 끓는 기분인데.
“아무튼 생각 없어요.”
하지만 그걸 회사에서 말하고 싶지는 않아 말 대신 표정으로만 답했다.
“그래?”
그녀의 말에 주희가 아쉬운 듯 입맛 다시는 시늉을 했다.
“안타깝네. 본부장님은 누가 봐도 진심 같았는데.”
“회의 끝났어요?”
슬쩍 반응을 떠봤지만 수영의 입은 열리지 않았고, 그 노력에 대신 보상하듯 태진이 모습을 보였다.
“최 팀장.”
그는 주희에겐 가벼이 묵례로 인사를 대신하더니 곧장 수영에게 활짝 웃어 보였다.
“어제는 잘 들어갔어요?”
“……어제?”
“어제 혼자 내버려 두고 가서 걱정했는데. 다행히 잘 들어갔나 보네.”
“어제 같이 있으셨어요?”
“뭐…….”
그의 말에 반응을 보인 것도, 놀란 것도 주희였다.
그렇잖아도 큰 주희의 눈이 더 동그랗게 커졌고, 놀란 만큼 컸던 목소리는 사무실 전체로 퍼져 나갔다.
덕분에 또다시 수영에게로 시선이 꽂혔다.
“아뇨?”
힐끔거리는 직원들의 시선을 의식한 수영은 냉큼 대답을 가로챘다.
“본부장님 회식 때문에 먼저 가셨잖아요. 그냥 물어보신 거겠죠. 그렇죠? 본부장님.”
“…….”
그러고는 주희를 등지고 서서 이목구비를 마구 움직였다.
더는 일을 크게 벌이지 말고 눈치껏 알아서 행동하라, 는 무언의 압박.
“하…….”
그 의도가 다분히 드러난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귀여워 죽겠네.’

밀당하는 사이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