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박깜박. 어떠한 빛도 들지 않는 어두운 방 안.
눈꺼풀이 제 의지와 다르게 움직였다. 정신이 든 수영은 곧장 머리를 움켜쥐었다.
“아, 머리야…….”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공기 중에 알코올이 둥둥 떠다니는 것 같다.
수영은 인상을 찌푸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손을 휘적이다 거치적거리는 것이 있어 덥석 집어 들었다.
“몇 시지…….”
어두운 곳에서 용케 휴대폰을 찾은 그녀는 전원을 눌러 시계를 살폈다.
새벽 6시가 조금 넘은 시각.
“…….”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두리번두리번.
익숙한 촉감, 알코올이 배어 있지만 익숙한 냄새. 다행히 제 방이었다.
아. 집에 잘 왔구나.
수영은 한시름 놓은 표정으로 다시금 침대 위로 쓰러져 누웠다.
‘내가 또 집은 잘…….’
잘…… 오긴 하는데.
‘어떻게 왔지?’
기억이 안 난다. 아니, 사실 조금, 아주 조금 나기는 하는데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뭐? 첫사랑?〉
기억하고 싶지 않았는데.
갑자기 스쳐 지나간 장면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눈이 동그랗게 떠지고,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은데도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이리저리 움직였다.
〈누가 그래?〉
두 손은 저절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자 언젠가 들은 것 같은 목소리가 귓가에 윙윙거렸다.
〈나 너…….〉
“아니야.”
〈그때도, 지금도.〉
‘아니야!’
이놈의 기억력은 왜 쓸데없이 점점 좋아지는 건지.
차라리 태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기억 못 하는 게 나았다. 젠장.
떠올리기를 멈춘 수영이 머리를 좌우로 마구 흔들었다.
“아, 머리…….”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그녀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걷어 냈던 이불을 다시 머리끝까지 끌어 올려 덮었다.
“아이, 몰라.”
아무 일도 없었다. 절대. 아무 일도.
수영은 애써 제 감정을 다독였다.
그렇게 1시간여 뒤.
“야, 최수영!”
눈 깜짝할 새 잠들었던 그녀는 느닷없이 부르는 소리에 경기 일으키듯 몸을 들썩였다.
“야! 너 안 일어나냐?”
벌컥 문을 열고 들이닥친 언니, 수진의 낯에 신경질이 가득했다. 비몽사몽으로 일어난 수영은 짜증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이 씨…….”
“어휴! 술 냄새. 회식 가서 술은 네가 다 마셨냐?”
“아, 언니!”
“뭐.”
“구박하지 마. 나 힘들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호적 메이트한테 듣는 구박이 얼마나 서러운데.
안 그래도 진태진 때문에 힘들어 마신 술로 구박받으니 더 설움이 밀려들었다.
“하이고. 네가?”
그러나 수진은 제 동생의 푸념 섞인 짜증에도 눈 한 번을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이가 없다는 듯 문에 기대어 기가 찬다는 웃음을 내뱉었다.
“너 데려다주고 자기 집까지 다시 간 태진이도 있는데 네가 뭐가 힘들어?”
“……뭐?”
“빨리 일어나. 이게 지각할까 봐 깨워 줬더니 언니한테 성질이야.”
“언니, 언니.”
“아, 왜.”
“뭐랬어, 방금?”
태진? 진태진? 방금 태진이랬지?
“언니가 걜 어떻게 알아?”
이름 하나에 잠이 싹 달아났다.
수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벌떡 일어서 수진을 쳐다보았다. 수진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봤으니까 알지. 오랜만이라고 인사하더라.”
“……걔가?”
미심쩍었다. 제 마지막 기억 속의 그는 꽤 화난 것 같았는데. 완전히 기억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인사할 기분 정도는 됐었던 건가.
수영이 느릿하게 목덜미를 긁적였다.
“야, 빨리 준비나 해. 지금 7시 반이야.”
“뭐? 그걸 왜 지금 말해!”
“그러게 누가 그렇게 술을 마시래!”
뒤에 들리는 욕 같은 타박에 대꾸해 줄 겨를이 없었다. 수영은 부리나케 화장실로 향했다.
“야, 근데.”
수도꼭지를 틀자마자 바짝 그녀에게 따라붙은 수진이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
“태진이 걔, 더 잘생겨졌더라. 거의 10년 됐지?”
“…….”
“어떻게 다시 만났냐? 걔가 먼저 연락하던?”
“그…….”
차마 지난 휴가 때, 태국에서 우연히 태진과 만났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캐리어가 바뀌는 소동이 있었다고는 절대.
이미 아무 일도 없었다고 자신만만하게 떠들었던 탓에 수영은 태연한 척 대꾸했다.
“그럴 리가. 나 휴대폰 번호 바로 바꿨었잖아.”
“그럼? 네가 먼저 연락했어?”
“미…….”
이 언니가 진짜!
“내가 미쳤어? 걔한테 연락하게?”
세수를 하다 말고 빽 소리를 지르는 수영의 반응에 수진이 입을 삐죽 내밀고 콧잔등에 주름을 잡았다.
“아니면 말고. 그럼 뭔데? 어떻게 둘이 같이 와?”
“몰라. 나가. 나 씻게.”
더는 태진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는 듯 단호한 말투로 딱 잘라 대답했다. 하여 이 이상 말을 걸지 않을 줄 알았건만.
“둘이 사귀어?”
이 호적 메이트는 제 속을 벅벅 긁어 댔다.
“언니! 좀!”
수영은 급기야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집 안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으나, 수진은 이미 모습을 감춘 후였다.
‘아, 진짜!’
그렇잖아도 심란해 죽겠는데 놀리고 있어!
‘사귀기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나 너…….〉
“으!”
잘못 들은 거다. 그래. 그거다, 잘못 들은 거. 본인은 취했었고 태진도 취했던 거다.
수영은 몸을 부르르 떨며 어제의 기억을 애써 떨쳐 냈다.* * *
“하여튼 굉장했다니까.”
점심시간. 주희가 수영보다 앞장서 식판에 음식을 담으면서도 입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성 대리도 그때 같이 있었어야 했는데. 아쉽다, 아쉬워.”
그녀는 어제의 일을 되새기는 듯 그 누구보다도 안타까워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정작 그 이야기를 듣는 당사자인 수영의 부끄러움은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러게요. 직접 봤으면 더 좋았을 텐데. 아쉽네요.”
주희의 적당히 조미료가 가미된 이야기에 성 대리가 흥미롭게 반응했다.
반짝이는 눈으로 셋 중 맨 뒤에 서서 주희와 수영을 번갈아 가면서 볼 정도로.
“꼭 드라마 같아요.”
“그렇지? 내 주변에 이런 사람이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 안 그래? 성 대리? 응?”
“하하하. 맞아요. 역시 팀장님 대단하시다니까요.”
“…….”
그런 이야기를 왜 하필이면 저를 사이에 두고 하는지. 아니, 왜 하는지 모르겠다.
사이에서 듣든 뒤에서 듣든 이러나저러나 쥐구멍으로 숨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애초에 태진과 엮이는 것부터가 인생의 내리막으로 가는 롤러코스터에 탄 거나 마찬가지였다.
수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드라마였으면 좋겠네요.”
드라마는 해피 엔딩으로 끝날 가능성이라도 있지. 이건 완전 배드 엔딩 확정이다.
100% 퇴사 엔딩.
그녀의 푸념과도 같은 말에 주희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에이, 왜? 좋지 않아?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본부장이면 든든한 빽이 생긴 거잖아.”
“빽은요.”
짐 아니면 다행이지. 진태진이나 본인이나 마주쳐 봤자 좋은 거 없는 사이다.
수영은 잔뜩 울상을 지으며 그들을 따라 수많은 테이블 중 하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녀의 말은 계속됐다.
“별로 친한 사이도 아니었어요. 그냥 우연히 같이 다녔던 거지.”
“정말? 그렇다기엔 본부장 눈빛이 장난 아니던데? 처음 와서 인사할 때부터 눈에서 레이저 나오고 그러더구먼.”
“에이.”
수영이 손사래를 쳤다.
“걔 원래 남들한테 다 그래요. 학교 다닐 때도 인기 많았고요.”
“내가 인기는 많았죠.”
“아, 깜짝이야!”
“그래도 나는 최수영 팀장 말고는 안 보이던데요?”
“어머.”
“어? 안녕하세요.”
절대 그놈은 나한테 관심 가질 일이 없었다며 부정하려던 찰나. 언제 왔는지 태진이 자연스럽게 그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수영과 달리 둘의 낯에는 신기함과 흥미의 기색이 역력했다.
“안으로 들어가세요.”
성 대리가 꾸벅임과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옆으로 비켜섰다.
“아니…….”
“고맙습니다.”
굳이 제 앞에 나란히 앉게끔 비켜 주는 이유가 뭔지 수영은 성 대리의 멱살을 잡고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영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태진을 쳐다봤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궁둥이를 붙였다.
“호호.”
눈 깜짝할 새 4명이 되어 버린 테이블에, 주희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여기는 안 오실 줄 알았는데.”
“왜요?”
“먹어 보시면 아시겠지만…… 맛이 뛰어나지는 않아서?”
“아하?”
태진이 어느 정도 납득하는 얼굴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뭐, 못 먹을 정도만 아니면 다 먹습니다.”
“어머. 입맛이 까다롭지는 않은 편이신가 보다. 최 팀장이랑 똑같네. 최 팀장도 그런데. 안 그래?”
“과장님…….”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어색하게 입꼬리만 실룩거리던 수영이 말끝을 흐렸다.
어떻게든 저 두 사람이 자신과 태진을 엮으려 한다는 느낌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때 태진이 입매를 휘어 올렸다.
“네. 딱히. 땅에 떨어진 것만 아니면 다 잘 먹어요.”
그러고는 자신의 앞에 앉은 수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때요? 최 팀장.”
“네?”
“나 뭐든 잘 먹는데.”
“아, 네에…….”
잘 먹든가 말든가. 자리나 좀 비켜 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심드렁하게 그를 마주했다.
그랬더니 기다렸다는 듯 먹던 것도 내려놓고 테이블에 팔을 올려 턱을 괴며 씩 웃었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신랑감 아닙니까? 나랑 잘해 볼 생각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