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지금 어디 가?”
왜 저와 같은 층으로 가는 거냐는 물음은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하였다. 왠지 그가 하는 말에 충격이라도 받을 것 같은 불안감 탓이었다.
수영이 꿀꺽, 침을 억지로 삼켰다. 그에 태진이 빙긋 웃었다.
“나 오늘부터 여기 8층으로 출근해.”
일찍 받으나 늦게 받으나 충격은 충격이었다.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리를 웃으면서 한담.
수영은 한쪽 입꼬리를 파르르 떨었다.
“그런…… 얘기 없었잖아?”
“네가 내 얘기는 들을 생각도 안 해서 말할 타이밍을 놓친 거지.”
그녀의 말에 태진은 여전한 웃음으로 대꾸해 주었다.
“태국에서 만난 것도 신기했는데 어떻게 여기서 또 만나냐.”
그는 조금 더 저에게 다가왔다.
“이 정도면 운명 아냐?”
슬그머니 허리를 숙이더니 얼굴이 바짝 앞에 멈추었다.
숨결이 닿을 듯 말 듯 아슬한 거리에서 태진이 씩 웃어 보였다.
“안 그래?”
“…….”
운명은 무슨. 어쩐지 꿈자리가 사납더라 했다.
수영은 거듭되는 그의 물음에도 대답 않고 다시금 멀리 떨어졌다.
그녀를 빤히 보던 태진은 별다른 반응 없이 픽 웃곤 정면을 바라보기만 했다.
“후우…….”
수영이 심호흡 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속한 개발 부서에는 팀이 3개가 있는데, 본인은 3팀이었다. 2팀에 새로 경력직 하나가 들어올 예정이라는 소리는 며칠 전부터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또 1명 더 온다고 했던 것 같기는 한데,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앞으로 진태진을 쭉 봐야 한다는 게 중요했지.
‘아니, 왜 하필 많고 많은 부서 중에 왜?’
8층에 수영의 부서 외에도 부서는 몇 있지만 다른 부서에 누가 들어온다는 소리는 없었다. 몇 번을 생각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건 경력직이라도 태진이 ‘그냥 직원’이라는 거였다. 사실상 팀장인 제가 태진보다 위라는 거다.
큭큭. 수영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럴 줄 알았다.’
외국에서 공부한 뒤 부모님 사업을 도와야 한다고 가더니. 분명 제 성격에 못 이겨서 포기했을 게 뻔했다.
‘죽었어, 진태진.’
다른 팀이라도 자신의 아래면 실컷 괴롭혀 줄 맛 나겠다.
“흠흠!”
그녀는 자꾸만 터지는 웃음을 애써 눌러 담으려 헛기침 소리를 내었다.
이윽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수영이 쏜살같이 빠져나갔다.
“…….”
그런 그녀의 뒤를 따라 천천히 걷던 태진은 수영에게서 눈을 뗄 줄을 몰랐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한참 바라보다가 이따금 웃기도 했다.
삑!
복도를 지나 얼마 후, 수영이 카드 리더기에 출입 카드를 갖다 댔다.
문이 열리자 그녀가 뒤를 돌아 저를 졸졸 따라온 그를 올려다보았다.
“저기, 2팀 맨 끝자리에 앉아.”
어제부터 직원 온다고 치워 두었던 자리. 달랑 컴퓨터 하나 올라가 있는 깨끗한 책상이 전부인 곳을 가리켰다.
“네 자리야.”
싱긋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하는 말에 은근한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
좋지 않은 인연이 제 아랫사람으로 왔다는 게 얼마나 웃기는지.
수영은 모처럼 진심 어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고맙다.”
태진은 여전한 웃음으로 답해 주곤 수영이 가리킨 자리로 걸어갔다. 그의 뒤를 눈으로 좇던 수영도 몸을 돌려 제 자리로 가 앉았다.
그렇게 재회가 마무리되는 줄 알았다.
“음?”
여태껏 이들에게 시선을 두지 않던 2팀의 팀장이 고개를 들어 주변을 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비었던 자리에 누군가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누구지?”
2팀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의 표정엔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고개를 연신 갸우뚱거리면서 천천히 태진에게 다가온 그가 조심스레 물었다.
“저……. 혹시 이번에 새로 오신 본부장님 아니십니까?”
그의 목소리는 바로 옆 팀인 수영에게도 들릴 정도의 크기였다.
“아, 네.”
그건 태진의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근데 왜 여기에…….”
태진의 담담한 대답에 2팀장이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그에게 눈을 흘겼다.
‘뭐?’
동시에 수영도 제가 뭘 잘못 들은 게 아니냐는 듯 행동거지를 멈추었다.
‘본부장?’
아, 그래. 본부장이 들어온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회장 아들이라는 것도. 다만 그 외에는 아무것도 들은 게 없었다.
그게 문제였다.
“무…….”
설마 태진이 본부장으로 올 줄은.
그녀가 놀라는 사이, 태진의 손가락은 지체 없이 움직였다.
“쟤가 여기 앉으라던데요?”
검지가 똑바로 그녀를 가리켰다. 그의 검지를 따라 모두의 시선도 그녀에게로 쏠렸다.
“…….”
사무실엔 끔찍한 정적이 흘렀다.
열댓 명의 눈동자 수십 개가 한꺼번에 수영에게 향했다. 당황한 그녀는 말문이 막혀 입만 벙긋거렸다.
그사이 2팀장이 재차 물었다.
“……최 팀장이요?”
“네.”
태진은 확인 사살이라도 해 주듯 확답했다.
‘아니…….’
덕분에 수영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쟤가 언제부터 회장 아들이었어?’
어릴 적, 워낙 제 자랑을 하기에 돈이 좀 많은 놈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스케일이 커도 너무 큰 거 아닌가?
넋이 나가 눈만 깜박이는 그녀를 태진은 생글거리는 웃음으로 마주했다.
수영이 미간을 팍 좁혔다.
‘저 왕재수가!’
일부러다. 100%.
처음부터 말을 해 주면 얼마나 좋아. 하다못해 저 자리에 앉으라고 했을 때 아니라고 하면 되는 거 아니었냐고.
내가 모르는 거 뻔히 알고 일부러 엿 먹으라고 사람들 다 있는 데서 말한 거지. 자기 재밌으려고.
‘10년이 지나도 재수가 없는 건 똑같네.’
“아……. 그, 최 팀장이 뭘 잘못 알고 실수를 한 듯합니다.”
2팀장이 수영을 힐끔 보다 말고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행여 태진이 기분 나빴을까 하는 우려에 눈치를 본 듯했다.
하나 어디 그가 그런다고 눈치를 보는 사람인가.
“괜찮아요. 제가 말 안 했으니 모를 수도 있죠.”
태연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직원들이 다 보이는 위치쯤에 섰다.
“아침부터 늦게 와 놓고 인사가 늦었네요.”
그러더니 사람 좋은 미소로 소름 끼치는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여러분들과 함께하게 된 진태진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함께하게 된. 다시는 함께하고 싶지 않은 얼굴이, 다시 함께하겠단다.
경청하는 이들과 달리 수영은 못마땅함 가득한 표정이었다.
“제가 아무리 여러분들의 상사로 들어왔다지만.”
그런 그녀의 표정이 재미있다는 듯 태진이 수영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이 부서에 먼저 있던 여러분들보다는 부족할 겁니다. 그래서.”
그러고는 절대 그의 눈을 피하지 못하도록 말끝을 늘여 다른 직원들까지 그녀를 보게 했다.
“먼저 팀장님들과 간단히 이야기라도 나누었으면 합니다.”
태진의 말은 이어졌다.
“인사도 할 겸.”
그러나 수영은 그와 눈을 마주칠 생각이 없는지 아예 고개를 돌려 버렸다.
“괜찮으시면 3팀 팀장님부터 하시죠.”
그러자 어림도 없다는 듯 태진은 굳이 수영을 언급했다.
“괜찮으시죠? 최수영 팀장님.”
“…….”
남들에게나 사람 좋은 웃음이다. 수영에겐 그저 기분 나쁜 웃음에 불과했다.
“저와 얘기할 시간.”
꿈틀거리는 눈썹과 실룩거리는 입꼬리. 모든 상황이 자기 손에 쥐여 있다는 자신만만한 표정.
자그마치 10년이나 되었음에도 저놈의 표정은 잊히질 않았다.
수영은 굳은 낯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네. 알겠습니다.”
“이쪽으로.”
태진이 손을 뻗어 회의실 중 1곳을 가리켰다.
먼저 앞서간 그를 따라 발걸음을 뗀 수영은 좇아오는 시선을 애써 무시했다.
탁.
문이 닫혔다.
“최수영 씨.”
그와 동시에 태진의 입술이 벌어졌다. 그뿐만 아니라 문을 닫고 바로 앞에 선 그녀에게 몸도 기울였다.
그는 그녀의 옆에 있는 문에 손을 기대어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아니. 팀장이라고 했던가?”
“…….”
“대단하네. 벌써 팀장까지 달고.”
그는 마치 기특하다는 듯한 뉘앙스로 말했다.
세상 사람 다 홀릴 것처럼 웃음을 흘려 놓고 그녀에게 하는 말은 묘하게 장난스러웠다.
그리고 그게 ‘익숙했었던’ 수영이 한숨과 함께 입술을 뗐다.
“말씀 가려서 해 주세요. 익숙한 얼굴을 보셔서 잠시 착각하신 것 같은데, 여기 회삽니다. 본부장님.”
“알아요, 회산 거.”
나름 단호하게 말했다 생각했는데 태진은 물러설 기미가 없었다.
“근데 뭐 어때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최 팀장을 만났는데.”
오히려 더욱 가까이 다가와 씩 웃어 보였다.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 이 정도 착각은 괜찮지 않나? 응?”
“…….”
“우리가 뭐, 그저 그런 사이인가?”
한 걸음, 한 걸음 수영이 뒷걸음질을 칠 때마다 이상하게도 그가 가까워졌다.
그렇게 더는 물러설 곳이 없어졌을 때쯤 태진이 그녀를 가두듯 팔을 뻗어 옆의 벽을 짚었다.
“불과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되게 진한 사이였잖아요,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