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그때 내가 만약 오해라도 했으면 어쩌려고.”
“이미 했어. 오해.”
“뭐?”
그랬더니 그의 대답이 즉시 돌아왔다.
그는 놀란 저와는 달리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거 그때야. 네가 애들이 올린 사진 보고 화냈던 날.”
“…….”
아. 이제야 생각이 났다.
〈야. 미안하다니까.〉
어렴풋이 귓가에 그의 음성이 윙윙거리는 듯했다.
당시의 태진은 지금과 다를 바 없이 어딜 가나 눈에 띄는 사람이었고, 그를 둘러싼 무리가 있었다.
부러 만들고자 하지 않아도 만들어지곤 하는.
그때의 그 무리 역시 태진의 주변으로 몰려 생긴 무리였다.
개중엔 늘 그를 좋아하는 아이가 있었고, 그런 아이는 동시에 수영을 못마땅해하기도 했다.
태진은 항상 수영의 옆에 붙어 있곤 했으니 어찌 보면 어린 시절엔 당연한 질투였다.
그렇게 생긴 당시의 무리에서 수영을 빼고 다른 아이들끼리만 만났음을 깨달아 서운함이 극에 달했던 날.
그날 태진을 좋아하던 이가 올린 건, 수영을 제외한 모든 아이들이 다 함께 번화가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그를 포함하여.
한데 그게 싸움의 이유일 줄이야.
수영이 미간을 좁혔다.
“왜 그것 때문에 싸워?”
“나도 그때 네가 안 올 줄 몰랐으니까.”
“…….”
“너 안 오는 거 알고 나도 바로 집에 갔었어. 네가 없는데 뭐 하러 내가 거기서 놀고 있겠냐. 그렇게 좋은 애들도 아니었는데.”
“너…… 그때 나한테 아무 말도 없었잖아.”
그날 들은 건 그냥 단순한 사과였다.
오전에 그 아이가 올린 사진을 보았고, 오후가 다 지나서야 태진에게 전화가 왔었다.
당시 수영은 그가 놀 거 다 논 후에야 제 눈치를 보는 줄 알았다. 그래서 그가 너무도 미웠는데.
“왜 말 안 했어?”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그녀가 절대 알 수 없었고, 10년이 넘게 흘러서야 알게 된 건 고작 싸움이 있었다는 것뿐이었다.
수영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태진이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그땐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네 기분을 풀어 줄 수는 없었을 거야. 어쨌든 나도 거기에 있던 건 사실이니까.”
“…….”
“이제 와서 그게 뭐가 중요해. 다 지난 일인데.”
“내가 오해해서 그렇게 욕했는데 넌 그게 좋냐?”
“네가 오해를 했으면 내가 그거밖에 못 한 거지. 그게 다야.”
“너 진짜 바보야? 그게 어떻게 그렇게 돼? 넌 내가 널 그렇게 싫어했는데도 아무렇지 않았다고?”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오해를 받는다는 게 얼마나 속이 터지는 일인데.
아무런 사이가 아닌 상대에게 받는 것도 기분이 나쁜데, 그의 말마따나 좋아하는 사람에게 그런 소리를 들었는데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나.
적어도 그녀 자신은 그럴 수 없다 확신했다.
수영의 인상이 답답함에 확 구겨졌다.
그러나 태진은 바보같이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말했잖아. 네가 날 미워하는 거 알아도 난 그게 안 된다니까.”
“…….”
“나 진짜 너한테 푹 빠져 있었거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하고 잇는 말이 정말 화나게 밝았다.
속없는 사람처럼. 심장이 주저앉는 듯한 그녀의 기분도 모르고.
“…….”
짜증이 솟구쳤다.
“아…….”
수영은 급기야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렇게 몇 분을 있었을까.
“너 진짜 짜증 나!”
최대한 꾹꾹 눌러 보았지만 더는 참을 수가 없어진 그녀의 손이 꽉 주먹을 쥔 채 그의 팔뚝으로 향했다.
“아. 아. 잠깐만.”
“아, 왜 나한테 말 안 해 주는데! 너 사람 바보 만들래, 진짜?”
“아. 아파. 잠깐만. 수영아. 최수영.”
“아프라고 때리는 거거든?”
그럼 달래 주려고 때리겠느냐며 수영이 씩씩거렸다.
“씨이…….”
몇 번을 때려도 분이 풀리질 않았다.
그녀는 흥, 콧바람을 세게 불며 노려보았다.
“……미안.”
팔뚝이 화끈하도록 맞은 태진은 그녀의 뚫릴 듯한 눈빛에 재빨리 꼬리를 내렸다.
“안 그럴게.”
10년이 넘도록 말하지 않다 들통이 난 결과는 결국 사과였다.
“…….”
그제야 수영의 화가 사그라들었는지 조용했다.
힐끔, 태진이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입을 꾹 다물고 불만 가득한 얼굴을 한 그녀는 와중에도 귀여워 보였다.
‘중증이다, 진짜.’
그는 차마 입 밖으로는 뱉지 못할 말을 되뇌었다.
“나 너 좋아했어.”
그때 수영의 말 한마디가 귓속 깊숙이 파고들었다.
“……어?”
태진이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어느샌가 그를 곧은 눈으로 주시한 채였다.
수영의 입이 재차 벌어졌다.
“근데 나, 너 싫어하기도 했어.”
“…….”
“내가 너 오해해서.”
“…….”
“나 지금은 너 좋아해.”
말을 이어 갈수록 그녀의 목에는 힘이 들어갔다.
“네가 다시 좋아졌어.”
“…….”
“근데, 앞으론 그냥 얘기해 줘. ……더는 너에 대해 오해하고 싶지 않으니까.”
수영은 제 뺨이 붉어지는 걸 알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너무나 부끄럽지만 꼭 하고 싶던 말이었다.
“…….”
그녀의 말에 태진은 넋이 나간 채 미동이 없었다.
운전은 어떻게 하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어…… 음. 크흠!”
그러다 뒤늦게나마 상황 파악이 되었는지 겨우 정신이 돌아와 목을 가다듬었다.
‘좋아…… 한다고…….’
배시시. 언제 걸렸는지 모를 미소가 돌아가는 길 내내 떠나질 않았다.* * *
끼익!
이윽고 수영의 집 앞에 다다랐다.
그녀가 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태진이 그녀의 짐을 챙겨 들었고, 그렇게 둘은 위로 올라갔다.
마침내 도착한 집 현관문 앞. 수영은 밀려든 부끄러움에 입을 다문 채, 태진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표정으로. 한마디의 말 없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삐빅, 문 잠기는 소리가 들리고 얼마쯤 지났을까.
“최수영.”
수영의 짐을 내려놓은 태진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아무런 의심 없이 뒤를 돈 그녀는 곧장 그의 손에 붙잡혔다. 한쪽 손은 그녀의 허리를, 다른 손은 뒤통수를 부드럽게 감쌌다.
“읏…….”
그에게 완전히 밀착해 버린 그녀는 그의 입술을 받아들였다.
“으응…….”
순식간에 파고든 혀의 감촉에 몸이 저릿했다. 집어삼킬 듯 몰아치지만 부드럽게 휘감는 키스에 녹아내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때문에 자꾸만 그녀의 입에선 옅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태진이 감았던 눈을 뜨며 그녀에게서 멀어졌다.
말없이 응시만 하는데도 그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느낌이었다. 살짝 아래로 내리깐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하아…….”
수영이 양 볼에 홍조를 띠며 작게 숨을 몰아쉬었다.
“하하.”
그런 그녀를 한참이나 보던 태진이 실없이 웃음을 보였다. 그러면서도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였다.
그 웃음이 무슨 의미인지 알 리 없는 수영이 머뭇거림을 뒤로하고 물었다.
“왜…… 웃어?”
“좋아서.”
그러자 태진이 즉답했다. 그는 낮은 웃음으로 바꾸며 그녀의 목덜미에 짧게 입을 맞춘 뒤, 나지막이 수영의 귓가에 속삭였다.
“네가 너무 좋아서.”
“읏…….”
“좋아해. 수영아.”
무슨 말을 이렇게 잘도 내뱉는지. 이토록 부드럽게, 절절하게, 그리고 야하게.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을 때마다 마치 그의 모든 것이 닿는 것처럼 몸이 간질거려 저도 모르게 반응했다.
“…….”
수영은 아랫입술이 하얗게 되도록 세게 짓이겼다. 얼핏 결심에 찬 낯을 띠던 그녀는 두 팔을 들어 태진의 목덜미를 감싸 안았다.
그 움직임에 그의 고개가 다시금 저를 향하자 곧바로 입술을 집어삼켰다.
그녀의 행동에 태진이 잠깐이지만 크게 떴던 눈을 어느새 나른하게 접고 그녀와 호흡을 맞추었다.
숨소리는 점점 더 격앙되기 시작했고, 키스는 그가 수영을 안아 든 후에도 계속됐다.
털썩.
이윽고 수영의 방으로 들어온 태진이 그녀를 침대에 뉘었다.
톡, 톡. 거친 호흡 뒤로 단추가 하나둘 풀어지는 소리가 이어졌다. 얼마 안 가 태진의 온기가 멀어졌음을 깨달은 수영이 슬그머니 눈을 떠 보았다.
언제 풀어 헤쳤는지 모를 셔츠는 침대 아래로 떨어졌고, 마지막 남은 반소매조차 눈 깜짝할 새 사라졌다.
더 이상 그의 상체를 가리고 있는 것은 없었다.
‘미쳤다…….’
굳이 볼 생각은 없었으나 저절로 눈이 갔다. 첫 만남 때였나. 그에게 안겼을 때 은근히 그의 품이 단단하다는 걸 느끼기는 했지만 저 정도일 줄은 몰랐다.
게다가 술에 취한 것도 아니고 맨 정신으로 보다니. 쉽사리 눈을 떼기가 힘든 광경이었다.
‘저걸 주말에도…….’
그러다 문득 일주일 전 나누었던 정사가 떠오르고 나서야 정신이 돌아왔다.
‘미쳤어!’
수영은 재빨리 눈을 피했다.
시선을 틀어 봤자 어차피 보이는 건 태진이고 그의 몸이라 아예 고개를 돌렸다. 그런 그녀를 빤히 지켜보던 태진이 실소를 터트렸다.
“더 봐도 되는데.”
“뭐…… 뭐? 뭐를?”
“나. 가까이서 보면 더 좋고.”
그러더니 벗은 몸을 수영에게 가까이 기울였다. 그녀가 움찔하며 몸을 웅크리자 태진이 그녀의 옷 안으로 손을 집어넣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 안 보면 후회할 텐데.”
“잠깐…….”
“이따가는 볼 정신도 없을걸?”
“흣……!”
“내가 더 많이 볼 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