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정적. 태진을 욕하느라 바쁜 수영을 제외한 둘의 입은 열릴 줄을 몰랐다.
주희와 성 대리의 눈빛이 바삐 오갔으나 딱히 대책은 없는지 끝내 서로의 시선을 피했다.
“진태진……. 이 나쁜 새…… 끼…….”
둘은 다시금 머리를 처박고 욕을 중얼거리는 수영을 바라보았다.
“하아…….”
동시에 참았던 한숨이 터져 나왔다.
제발 무사히 오늘 하루가 지나가길. 둘의 염원은 일치했다.
그렇게 10여 분이 지났을 즈음.
드륵.
가게의 미닫이문이 열렸다. 주희와 성 대리의 고개가 문 쪽으로 돌아갔고, 그 시선의 끝엔 태진이 서 있었다.
“오셨…… 어요?”
“최 팀장은요.”
그는 인사를 받을 생각도 없이 들어오자마자 수영부터 찾았다.
“나 좀 내버려 둬…….”
성 대리가 쭈뼛쭈뼛 비켜서며 수영을 가리켰고, 태진은 웅얼거리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
그녀의 얼굴은 술에 절어 있었고, 눈가의 미처 닦이지 못한 눈물 자국이 가게 불빛을 받아 반짝였다.
필시 무슨 일이 있으리라, 그는 확신하는 듯했다.
“최 팀장 왜 이래요?”
태진의 물음에 주희가 눈을 똑바로 마주치지 못하고 자꾸만 아래로 떨구며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오늘 좀…… 힘들었나 봐요.”
“…….”
“저기, 그, 최 팀장이 많이 취해서 그런 거니까…….”
“알아요. 실수인 거.”
태진은 그녀를 일으켜 부축했다.
“제가 데려갈게요. 고생하셨어요.”
“아, 네. 들어가세요.”
주희는 그에게 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들어올 때부터 찌푸린 인상은 나갈 때까지 한결같았고, 상황은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둘은 수영이 떠난 자리를 빤히 쳐다보다 힘이 풀린 듯 한숨과 함께 자리에 주저앉았다.* * *
태진은 집 앞에 다다르자 차 안에서 잠든 수영을 안아 들어 방으로 향했다. 그런 뒤 여전히 잠들어 있는 그녀를 천천히 침대에 뉘었다.
“으음…….”
깰 듯 말 듯. 낯선 움직임에 신음을 흘리는 수영의 미간이 좁혀졌다.
태진은 옆에 치워 둔 이불을 그녀에게 덮어 주었고, 이후 정적만이 흘렀다.
“…….”
전화를 받자마자 욕을 해 대기에 처음엔 장난인 줄 알았다.
한데 수영이 어디 자신에게 장난을 칠 사람인가.
다른 이들이라면 몰라도 태진에게만은 눈곱만큼도 틈을 주지 않는 여자였다.
하여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다는 걸 알아채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웠다.
“……잘도 잔다.”
정말. 누구는 걱정돼서 한달음에 달려갔는데 제 세상을 뒤집어 놓고 잘도 잔다며 태진이 헛웃음 쳤다.
사락…….
그는 그녀를 향해 뻗어 놓고 고민만 하던 손가락으로 흐트러진 앞머리를 툭, 건드렸다.
“으음…….”
그러자 수영이 신음을 흘리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아마도 그녀는 그저 바람이 저를 거슬리게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금 잠에 들었는지 조용했다.
“최수영…….”
태진이 나지막이 속삭이듯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왜 자꾸 네가 도망갈 것 같지.”
수영의 곁에 있음에도 불안감은 점점 진해졌다.
절대 자신의 곁을 떠나지 않을 거라 자만했던 어릴 적 어리석음이 지금의 그를 옭아맸다.
언제 갑자기 떠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네가 좋아.’
조금만 더. 그는 그녀에게 가까이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정말 조금이라도 좋으니까 지금보다는 더 가까이.
“좋아해. 수영아.”
완전한 호의를 원하지도 않았다.
그냥, 웃는 것만이라도 하루에 한 번 보면 그거로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모든 걸 가진 기분이 들지 않을까. 태진의 바람은 꽤나 소소했다.
“…….”
그때.
그의 목소리를 들은 건지, 그저 잠에서 깬 건지 모를 수영의 눈이 슬그머니 떠졌다.
은은한 조명 아래 태진의 낯이 그녀의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그는 이제 막 깬 수영의 머리로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긴……?’
잠에 들었다는 걸 깨달은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녀는 아직 완전히 깨진 않았지만 그래도 주변을 구분할 정도의 정신은 있었다.
분위기가 묘하게 흐르는 것 같은 느낌에 수영은 큰 움직임 없이 눈동자만 돌렸다.
널따란 방. 제집에는 없는 조명.
이따금 태진에게서 나던 체취가 사방에서 풍겼다.
확실히, 수영 자신의 집은 아니었다.
“구경 끝났어?”
한참을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고 있노라니 태진이 나지막이 목소리를 내었다.
“누구 좋으라고 술을 그렇게 마셔. 마실 거면 적당히 좀 마시던가.”
“뭐?”
한데 그 말이 꼭 타박하는 것 같아 수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네가 뭔 상관이야.”
“…….”
“누가 데리러 와 달랬어? 난 그냥…….”
“그럼 나한테 전화는 왜 했는데.”
“싫어서.”
그녀는 지금, 그의 모든 게 싫었다.
물론 술에 취해 한층 더 예민해진 감정이기도 하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정말로 싫었다.
오히려 술은 그간의 감정을 겨우 표현할 수 있도록 도와준, 현재 그녀에겐 더없이 고마운 도구였다.
수영이 말을 이어 했다.
“넌 내가 왜 술 마셨는지 모르지.”
“…….”
“됐다. 내가 너랑 무슨 얘길 하겠냐. 모든 게 장난인 네가 뭘 알…….”
덥석!
원래는 상체를 일으키려 했었다.
아직 몽롱하지만 어쨌든 정신이 돌아온 마당에 마냥 누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런데 제가 한 말이 문제였을까. 그 시도는 해 보지도 못하고 태진에게 붙잡혀 다시 눕혀졌다.
“……장난.”
그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 침대 위에 딱 붙여 버리곤 상체를 기울였다.
태진의 말이 이어졌다.
“아니야.”
그러더니 서서히 그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두 상체 사이엔 약간의 틈만이 남았고, 어느덧 그의 얼굴은 바로 코앞에 다다른 상태였다.
“차라리 진심이면 진심이었지.”
속삭이듯 말할 때마다 그의 숨결이 느껴졌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집어삼킬 것처럼 그 숨이 자꾸만 가까워졌다.
‘뭐, 뭐야……. 얘가 왜 이래?’
이상한 분위기였다. 괜히 심장이 빨리 뛰고 호흡이 달렸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평소에도 종종 보는 태진의 정색하는 모습인데.
왤까. 오늘따라 그가 낯설었다.
이러다 정말 사고라도 치겠구나, 하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수영이 눈을 질끈 감았다.
퍽!
“윽.”
분명 아무것도 하지 못할 줄 알았다.
생각은 그랬다.
하나 머리와 몸은 따로 움직이는 법인지. 꼼짝도 할 수 없을 줄 알았던 것과는 달리 그녀의 몸은 자유를 갈망했다.
“웃기고 있네!”
무릎으로 있는 힘껏 그를 찬 그녀는 자유를 얻음과 동시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안 떨어져?”
어디서 통하지도 않을 거짓말을 잘도 내뱉느냐며 수영이 미간에 주름을 깊게 그려 넣었다.
“잘도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는 탓에 그 넓은 방이 그녀의 목소리로 가득 메워졌다.
“…….”
그러니 절대 듣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왜인지 태진은 대꾸가 없었고, 그의 몸은 여전히 고꾸라진 채였다.
그에게서 빠져나가기 위한 발버둥이니 그녀는 태진이 당연히 고통스러워할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허억…….”
다만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하였다.
평소라면 아프다고 따지든가 몸부림을 쳐야 하는데 이상하리만큼 몸이 굳어 있었다.
수영이 태진의 심각함을 깨달은 건 그때부터였다.
“야, 너 괜찮아?”
“…….”
“야, 진태진…….”
거듭 불러 봤지만 앞으로 엎드린 상태로 소중히 제 아래를 감싸 쥔 그는 숨소리조차 없었다.
“야…….”
수영이 뒤늦게 밀려들어 온 걱정에 눈꺼풀을 파르르 떨기까지 했다.
“야, 진태진……!”
등을 쓸고 어깨를 흔들고.
태진이 움찔하여 상체를 들자 재빨리 두 손으로 얼굴을 잡아 들어 올렸다.
“너 괜…….”
얼굴을 본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진 않지만 그거라도 봐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와 마주 본 순간. 눈물이라도 흘릴 줄 알았던 태진은 너무나도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히려 활짝 웃는 얼굴.
그는 수영을 속였다는 것만으로도 좋은지 히죽거렸다.
“걱정했냐?”
속았다.
휙! 또다시 그의 얼굴이 침대로 곤두박질쳤다.
“걱정은 개뿔!”
누가 저 같은 놈 걱정한다고!
“씨이…… 씨이…….”
이럴 줄 알았다. 이 와중에 사람 놀리기나 하고.
‘술이 다 깨네!’
수영이 붉으락푸르락하는 낯으로 씩씩거리며 방을 뛰쳐나갔다.
“야, 나 진짜 아프긴 했…….”
그런 그녀의 뒤를 바라보며 중얼거리던 중. 수영이 다시금 들어오는 바람에 눈을 깜박거렸다.
“왜 다시 들어와?”
“……내 가방이랑 휴대폰.”
“뭐?”
“아, 내 가방이랑 휴대폰 어디 있냐고!”
좀처럼 펴질 줄 모르는 얼굴을 하곤 수영이 언성을 높였다.
그에 태진이 자세를 고쳐 잡고 되물었다.
“그건 왜.”
“왜긴 왜야. 집에 가려고 그러지.”
“여기가 집인데 어딜 가?”
“내 집이 아니잖아.”
“내 집이잖아.”
“그러니까 내 집 간다고. 빨리, 가방이랑 휴대폰 어디…….”
답답함에 말하는 와중 수영이 고개를 돌렸다.
그랬더니 떡하니 침대 옆 협탁에 놓인 제 휴대폰과 가방이 눈에 띄었다.
“저기 있네.”
수영은 곧장 걸음 하여 손아귀에 그것들을 넣었다.
“나 간다!”
“야, 잠깐.”
“잠깐은 얼어 죽을 잠깐.”
뒤통수를 때리는 태진의 목소리에도 그녀는 꿈쩍하지 않았다.
오히려 콧방귀를 뀌곤 걸음을 빨리했다.
“아…….”
그 단호함에 태진은 외마디 탄식을 내뱉었다.
“하여간 최수영. 이 밤에 어딜 혼자 가려고.”
결국 태진은 외투를 벗지도 못한 채 다시금 밖으로 향했다.
“야! 같이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