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이 지나 8월이 되자 날이 한층 더 더워졌다. 카페에서 알바하는 내겐 그리 좋은 변화가 아니었다.
아아메 하나요. 카페 라테 아이스랑 고구마 케이크 주세요. 콜드 브루 두 개랑 티라미수랑 초코케이크요. 딸랑, 딸랑. 문에 달린 종이 흔들릴 때마다 내가 처리해야 할 주문량도 늘어만 갔다.
“하…….”
점심시간이 지나가자 북적거리던 매장이 조금이나마 한산해졌다. 설거지를 마치고 지친 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5시간이나 더 해야 하는데, 마음은 퇴근을 부르짖고 있었다.
‘요즘은 아크도 별로 재미가 없고.’
그간 퇴근하면 무조건 아크로드부터 켜곤 했는데, 요즘은 딱히 할 일도 없고 즐길 것도 없어서 그런지 예전 같은 재미가 없었다.
그러고 보면 지난 1년 동안 어나더 길드를 상대로 패배하지 않기 위해서 참 열심히 했다. 나타났다 하면 내 자존심을 살살 긁으며 장난을 치는 흔적 때문에 이를 갈면서 장비를 맞추고 레이드를 돌았으니까.
흔적이 계정 삭제하면서 어나더 길드도 조용해진 지금은 완연한 평화가 찾아온 셈이었다. 그리고 평화는 더럽게도 재미없었다. 시발.
‘설마 나도 흔적한테 물들어서 미쳐 가는 거 아냐?’
끔찍한 생각을 하며 한숨을 푹푹 뱉어 내던 그때였다. 딸랑, 새로운 손님의 등장을 알리는 맑은 종소리가 들려왔다.
됐다. 정신 차리고 일이나 하자. 젖은 손을 닦아 내며 카운터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카운터 앞에 서 있던 손님이 나와 눈을 마주하자 옅은 미소를 지은 채로 인사를 해 왔다.
새까만 머리카락 아래로 드러난 작고 새하얀 얼굴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기다란 눈매는 미소와 함께 살짝 접혀 있었고,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조금씩 드러나는 눈썹은 정갈했다.
웬만한 연예인보다 예쁜 얼굴에 비해 키는 굉장히 컸다. 나도 키가 제법 큰 편인데도 불구하고 고개를 살짝 들어야 할 정도였다.
“네, 어서 오세요.”
“아이스 아메리카노랑 생크림 케이크 하나요.”
남자가 내민 카드를 익숙하게 받아서 결제했다.
여자는 물론이고 남자도 돌아볼 정도로 잘생긴 이 손님은 내가 알바를 시작하기 전부터 가게에 자주 들르던 단골손님 중 한 명이라고 한다. 보통은 창가 쪽에 앉아서 노트북을 보며 한두 시간을 보내다가 돌아가곤 했다.
일주일에 적어도 두세 번은 꼬박꼬박 출석 도장을 찍는 상대라 기억이 날 수밖에 없었다. 재빨리 커피를 만들고 케이크도 접시에 올린 뒤 진동 벨을 울리자 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리던 남자가 트레이를 가져갔다.
항상 커피는 다 마셔도 케이크는 몇 입 먹고는 다 남기던데. 아무래도 단 건 별로 안 좋아하지만 자릿세 개념으로 같이 주문하는 모양이다.
테이블 위에 커피와 케이크를 내려놓던 남자가 시선을 느꼈는지 나를 돌아봤다. 아차. 나도 모르게 멍하니 바라보고 말았다. 의도치 않은 실수에 급히 몸을 돌렸다.
***
[길드] 오늘은일요일: 아 심심해
[길드] 오늘은일요일: 길마 왕따시키고 지들끼리 놀러간 길드원들때매 마음이 아프다
[길드] 좋은날씨: ?;;
[길드] 여여랑: ㅋㅋㅋㅋㅋㅋㅋ
[길드] 마하: 저기요 양심있음?
[길드] rxrx78: ㅅㅂ아까부터 이거하자 저거하자 물어봐도
[길드] rxrx78: 다 거절때려놓고 먼ㅋㅋ;
[길드] 오늘은일요일: ㅋ
[길드] 오늘은일요일: 내 맘에 드는걸 가져오라고~
[길드] 마하: 할일 없으면
[길드] 마하: 길드 업글 재료나 모아와
[길드] 마하: 엔셔 숲의 정기 20개 ㄱ
[길드] 오늘은일요일: ?
[길드] 오늘은일요일: 진심?
엔셔 숲의 정기는 하급 중에서도 하급 수집 아이템으로, 길드원 중에서 레벨이 낮은 길드원들에게 주어지는 퀘스트였다.
[길드] 마하: ㅇ
뉴비존에 가서 필드에 있는 하급 몬스터를 때려잡기만 해도 모을 수 있는 허접한 재료를 길드의 마스터이자 대표 고인물인 나보고 손수 구하러 가라고?
어이없는 요구에 헛웃음을 지으며 마우스를 움직였다.
‘가야지…….’
거절하기엔 할 게 너무 없었다. 귀찮은 건 여전했지만 이대로 가다간 정말로 게임을 접을 위기라 간단한 거라도 해서 재미를 붙여야 했다.
[길드] 오늘은일요일: ㅇㅋ..
한숨을 내쉬며 혼자 쓸쓸하게 대답하자 나를 놀리는데 도가 튼 길드원들이 하이에나처럼 곧장 달려들었다.
[길드] 영화별론가: ㅠㅠ
[길드] 영화별론가: 일욜님 요즘 아크 개노잼이신가봄
[길드] sky004: 누가 흔적 좀 불러와라ㅠㅠ
[길드] 저6천원있어요: 이정도면 사실상 흔적이 숨겨진 애인 수준ㅋ
[길드] 울팀인성봐조인성: ㄹㅇ
[길드] 울팀인성봐조인성: 둘이 하루가 멀다하고 투닥거리다가
[길드] 울팀인성봐조인성: 흔적 사라지니까 식음을 전폐하고 시름시름 앓고 있자늠ㅠㅠ
[길드] 불좀켜줄래: 어? 이거 완전...
[길드] 여여랑: 사랑..?
[길드] 오늘은일요일: ㅅ1발
이놈들은 대체 내 길드원이 맞는지 모르겠다. 길드 채팅으로 내 욕을 편하게 하려고 들어온 거 아냐?
워프석으로 아르덴 도시로 이동한 다음에 엔셔 숲으로 향했다. 아르덴 도시에 있는 엔셔 숲은 40~50렙 대에 오는 곳이라 흔히 말하는 뉴비존에 속해 있었다. 다른 곳에 비해 이제 막 50렙을 찍은 유저들이 제일 많은 사냥터이기도 했다.
엔셔 숲의 정기 아이템을 뱉어 내는 몬스터는 초보들이 퀘스트로 잡는 놈이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최대한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아 숲 안쪽으로 들어갔다.
‘대충 여기쯤이면 되겠지.’
몬스터가 드문드문 있는 위치에서 멈춰 섰다. 꽤 깊이 들어왔으니 나 말고는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맞은편에서 스킬 타격 소리가 들려왔다.
사냥하는 소리인가 싶었지만, 스킬 타격음이 교차돼서 들리는 게 아무리 봐도 필드 PVP였다. 대체 여기까지 기어 와서 싸움질을 하는 사람이 누구야? 궁금해져서 사냥을 제쳐 놓고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했다.
“뭐야.”
기껏해야 뉴비존인 만큼 사냥하다가 시비 걸린 뉴비들이 싸우는 줄 알았는데, 화면에 나타난 광경은 내 예상외였다.
딱 봐도 갓 50렙을 찍은 뉴비가 게임을 어느 정도 한 유저한테 처맞고 있었다. 캐릭터가 입고 있는 옷차림부터 무기의 강화까지 차이가 너무 극명했다.
‘저 매너 없는 새끼가.’
무슨 상황인지 바로 파악하고서 미간을 찌푸렸다.
아크로드는 50레벨부터 필드 PVP가 가능하다. 설정에서 PVP 모드를 활성화해야만 가능한 시스템이라 원치 않으면 아예 비활성화 상태로 내버려 두면 된다.
하지만 뭣 모르는 뉴비들이 저 설정을 간혹 켜 둘 때가 있다. 그래도 유저들은 상대가 뉴비라면 굳이 건들지 않는다. 이건 당연한 매너였다. 자기보다 훨씬 약한 뉴비를 상대로 PVP를 해 봤자 재미도 없을뿐더러 비매너 유저로 낙인이 찍혀서 좋을 게 없으니까.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의 양심과 매너일 뿐, 지키지 않는 유저들도 많았다.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저놈처럼.
‘저건 뭔데 뉴비존에 와서 뉴비를 패고 앉아 있냐.’
한심함에 혀를 쯧쯧 차며 빠르게 거리를 좁혔다. 뉴비는 어쌔신이라 불리는 추적자였고 상대는 인파이터였다.
주로 거리를 벌려서 싸워야 하는 추적자가 돌진기로 계속 달라붙는 인파이터를 이기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뉴비라 못 이기겠지만.
그래도 무빙하는 거나 스킬 연계하는 모습을 보면 뉴비가 게임을 아주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승산이 희박한 건 여전했다. 추적자 대표 스킬 중 하나인 반격기를 성공하면 가망이 있긴 한데… 새내기가 반격기 사용 타이밍을 알고 있을 리가.
열심히 뛰어서 뉴비가 죽기 일보 직전에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러곤 망설임 없이 스킬을 사용했다. 콰직, 봉 끝이 바닥을 가르며 인파이터에게 적중했다. 갑자기 끼어든 내 공격을 막지도 못하고 고스란히 받아 낸 인파인터의 체력이 절반 가까이 훅 줄어들었다.
[전체] 진해군대장독수리: ?
뭘 물음표야, 물음표는. 채팅에 대답해 줄 가치도 없어서 무시하고 스킬 연계를 이어 나갔다.
자기보다 약한 상대를 패는 사람치고 제대로 된 놈 없다. 역시나 이 인파이터도 뉴비를 팰 때와 달리 내 공격에는 반격 한번 못 해 보고 계속해서 처맞았다.
[전체] 진해군대장독수리: ㅅ1발아
결국 3분도 버티지 못하고 죽어 버린 인파이터가 시체 상태로 내게 욕설을 날렸다. 꽤 분해 보이는 모습에 나는 채팅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화답했다.
[전체] 오늘은일요일: (이모티콘)
[전체] 오늘은일요일: ^^
흔적이 자주 쓰던 그 감정 표현이었다. 내 머리 위로 뿅 나타난 이모티콘이 손을 살랑살랑 흔들자 인파이터가 노발대발했다.
[전체] 진해군대장독수리: ㅅ1발아 뭔데 넌
[전체] 진해군대장독수리: 두1지고 싶어서 환장한 ** ***
[전체] 진해군대장독수리: 니 어디 살아 ***
욕으로 아주 랩을 할 기세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흔적에게 배운 그대로를 실천했다.
[전체] 오늘은일요일: (이모티콘)
히잉, 울상을 짓는 감정 표현이었다. 그걸 본 인파이터가 이번에는 욕을 하지 않고 조용히 사라졌다. 아마 도시 부활을 누른 모양이다.
음. 역시 이런 상황에서는 말이 안 통하는 또라이처럼 구는 게 좋다니까.
‘흔적을 따라 한 게 좀 쪽팔리지만…….’
아무렴 어떤가 싶다. 어차피 지금 여기에 흔적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인파이터는 잘 처리했으니 이제 뉴비를 달래 줘야겠지. 설정에서 PVP 모드 비활성화하라고 알려 주고 본래 목적이었던 몬스터나 잡으러 가려는데, 채팅이 불쑥 올라왔다.
[전체] 일휘일비: 왜 도와줌?
[전체] 오늘은일요일: ?
[전체] 일휘일비: 왜 도와주냐고
[전체] 일휘일비: 원래 이런거 다 도와주고 다님?
잠시 모니터를 바라보다가 손으로 뻐근한 두 눈을 꾹 눌렀다. 아, 나 오늘 진짜 피곤하긴 한가 봐. 헛것이 보이네.
“…….”
헛것이 아니잖아, 미친.
저거 지금 나한테 하는 말인가? 도와준 사람한테 반말 찍찍하는데? 사실 뉴비가 아니라 뭐 아는 사람의 부캐였다거나… 그럴 리가 있냐.
[전체] 오늘은일요일: 지금 나한테 묻는거?
[전체] 일휘일비: 여기 님말고 누가 있음
“허…….”
기가 막혀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 정상의 범주를 훌쩍 뛰어넘는 상대방의 뻔뻔한 태도에 갑자기 몸에 열이 치솟았다.
[전체] 오늘은일요일: 님 도와준게 아니라 쓰레기 치운건데?
[전체] 오늘은일요일: 님도 죽여드려요? 반말하는 꼬라지보니까 ㅈ같은데
울컥울컥 올라오는 짜증을 힘겹게 억누르며 키보드를 꾹꾹 눌러 채팅을 쳤다. 한 번만 더 반말하면 즉시 죽여 버리라 다짐한 그때였다.
[전체] 일휘일비: 아 미안요
[전체] 일휘일비: 원래 이런거 다 도와주고 다녀요?
“……?”
냉큼 사과하며 존댓말로 재차 물어 오는 채팅에 말문이 턱 막혔다.
…이 새끼 진짜 뭐 하는 놈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