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노퓨쳐가 직접 길드 스카우트를 하러 온 해프닝은 결국 서정연의 어마어마한 도발로 마무리가… 된 줄 알았다.
과연 서정연의 생각이 통했을지, 노퓨쳐가 우리를 갖고 싶어서 안달이 난 채로 돌아간 게 사실일지, 궁금하지만 당장은 알 수 없는 문제라고 여겼는데. 나는 기가 막힌 심정으로 눈앞에 있는 상대 캐릭터를 바라봤다.
[전체] 나의라임나무: ㅎㅇ여!
[전체] 빚과송금: ?
[전체] 쥐안에든독: ㅎㅇ?
“…….”
인사는 왜 또 해맑고 난리야.
‘나의라임나무’라는 닉네임을 달고 있는 이 유저는 다름 아닌 어나더 길드 소속 길드원이었다. 나는 혹시나 해서 서정연에게 물었다.
“저런 애가 원래 어나더에 있었어?”
[아뇨. 저도 처음 봐요.]
지난 1년간 한 번도 본 적 없는 닉네임이다 했더니, 역시 이번에 새로 들어온 길드원인가 보다. 나는 우선 상대의 장비를 살폈다.
‘팔에 건틀릿을 차고 어깨에는 새파란 망토를 걸치고 있네. 거기에 날개 장식이 달린 대검을 등에 차고 있으니… 직업은 팔라딘인가.’
팔라딘은 홀리나이트와 비슷하게 인기 많은 탱커 직업이었다. 이름에서 오는 이미지와 새하얀 갑주 장비, 신의 기사라는 칭호까지. 많은 부분이 겹치는 직업인 만큼 팔라딘도 홀리나이트처럼 사기 직업으로 통한다.
홀리나이트와 차이점이 있다면 팔라딘은 버프형 탱커가 아닌 어느 정도 딜이 나오는 탱커였다. 타인의 방어력을 높여 주는 버프 스킬 대신 자신의 방어력과 공격력을 높여 주는 개인 버프 스킬이 있다. 어그로와 딜을 겸비해야 하는 직업이라서 다른 탱커 직업보다 컨트롤 실력이 더 필요했다.
“팔라딘은 까다로워서 보통 홀나를 키울 텐데, 실력이 좀 되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뭐, 실력이야 차차 알아보고. 그보단 여길 왜 왔는지가 더 궁금하네요.]
아, 맞다. 딴 길로 샐 뻔한 정신을 급히 다잡으며 채팅을 쳤다.
[전체] Z10N: 누구신지?
[전체] 나의라임나무: 여러분들의 수호천사! >.<)rS2
“…….”
[…….]
예상 범위를 훌쩍 뛰어넘는 대답에 차갑게 식은 눈으로 화면을 바라봤다. 서정연 또한 얼굴은 안 보여도 나와 같은 심정인지 침묵을 유지했다.
[전체] Z10N: 개1소리 하지 마시고요
[전체] 나의라임나무: ㅠㅠ
[전체] 나의라임나무: 길드에서 님들 도와주라고해서 왓서여
[전체] 나의라임나무: 님들 티거인지 티배깅인지 길드가 괴롭힌다면서여?
[전체] 나의라임나무: 제가 도와줄게여^~^
[전체] Z10N: 그걸 님이 왜 도와줘요;
[전체] 나의라임나무: 그러라고 시켜서?
[전체] Z10N: 누가요
[전체] Z10N: 길드에서요?
[전체] 나의라임나무: 넹
“미친.”
아무래도 서정연의 도발이 제대로 먹힌 모양이다. 노퓨쳐가 얼마나 안달이 났으면 제 길드원을 감시하라고 보냈겠냐고.
“근데 왜 하필 새로 들어온 사람을 보낸 거지? 감시 용도면 더 믿을 만한 길드원을 보내야 하는 거 아닌가?”
[믿을 만한 길드원 자체가 없을 거예요. 아니면 저 유저가 믿을 만한 길드원일 수도 있는 거고. 새로 들어온 거랑은 상관없이.]
“가짜 흔적처럼 어나더 길드 들어가기 전부터 노퓨쳐와 아는 사이일 수도 있다는 거지?”
[가능성 있죠.]
“흠…….”
나는 입가를 매만지며 고민했다.
채팅치는 걸 보면 그리 똑똑한 애는 아닌 것 같긴 한데, 게임 채팅이야 얼마든지 꾸며 낼 수 있는 거니까. 수호천사니 뭐니 하는 걸 보면 약간 컨셉러 같기도 하고.
‘어떻게든 쫓아내야 하나?’
우리의 목적이 어나더 길드의 가입인 만큼, 노퓨쳐가 우리를 신경 쓰고 있다는 증거는 반가웠지만… 그래도 이런 방식은 좋지 않았다.
숨겨야 하는 게 있는데 노퓨쳐의 지인일지도 모르는 어나더 길드원을 어떻게 데리고 다니냐고.
[전체] haewo1: 어제 노퓨쳐님 만났는데
[전체] haewo1: 혹시 노퓨쳐님이 보낸건가요?
[전체] 나의라임나무: ㄴㄴ
[전체] 나의라임나무: 길마님이 보낸거에여
[전체] 나의라임나무: 노퓨쳐님은 부길마! 길마님은 따로 있음^~^
“뭐?”
노퓨쳐가 아니라 가짜 흔적이 시킨 거라고? 생각지도 못한 대답을 들은 나는 쫓아내려던 계획을 급히 접으며 입을 열었다.
“야, 이거…….”
이어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서정연은 바로 알아챘다.
[네. 한번 데리고 다녀 볼까요?]
“역시 그래야겠지?”
노퓨쳐가 아니라 흔적 사칭하는 놈이 보냈다는데 이걸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
물론 가짜 흔적과 노퓨쳐 간에 이미 커넥션이 얽혀 있었으니 노퓨쳐가 시킨 거나 다름없을거다. 하지만 노퓨쳐가 아니라 가짜 흔적이 직접 보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파티] 쥐안에든독: 어떡해요?
[파티] 쥐안에든독: 꺼1지라고 해도 꺼질 타입이 아닌거같은데
[파티] Z10N: ㅇㅇ
[파티] Z10N: 일단 냅둬
[파티] Z10N: 흔적 사칭이 보냈다니까 쫓아내기엔 아까움
[파티] 빚과송금: 그럼..음..
[파티] 빚과송금: 따라오는거 무시하면 됨?
[파티] Z10N: 무시까지 할건없고
[파티] Z10N: 적당히 상대하면서 뭐하나 지켜보죠
[파티] 쥐안에든독: ㅇㅋ
[파티] 빚과송금: 저도 노상관요!
파티원들의 동의를 얻어 낸 뒤에 가짜 흔적이 손수 보냈다는 감시역에게 채팅을 보냈다.
[전체] Z10N: 지금은 티거 길드 안보이는데
[전체] Z10N: 그래도 계속 따라올건가요
[전체] 나의라임나무: 넹~
[전체] Z10N: ㅋㅋ
[전체] Z10N: 맘대로하세요
***
[전체] 나의라임나무: 님들 다 렙 맞춰서 키우는거에여?
[전체] Z10N: 네
[전체] 나의라임나무: 지온님은 지금 몇렙?
[전체] Z10N: 120요
[전체] 나의라임나무: 120이면 뭐잡더라
[전체] 나의라임나무: 혹시 국경지대 사냥퀘 있어여?
[전체] 나의라임나무: 제가 몹몰이 해줄까요?
[전체] Z10N: 그럼 ㄳ
[전체] 나의라임나무: ㅋㅋㅋㅋ
[전체] 나의라임나무: ㄱㄷ려바여
내가 그러라고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라임나무가 정말로 우리가 잡아야 할 몬스터를 끌고 돌아왔다.
덕분에 평소보다 두 배는 빠른 속도로 사냥 퀘스트를 클리어한 우리는 다음 사냥 퀘스트를 위해서 두 번째 맵으로 이동했다. 라임나무는 이번에도 역시 따라왔다.
[전체] 나의라임나무: 여기도 도와줄까여?
[전체] Z10N: 고스트라 인식 빨리 풀려서 어려울텐데
[전체] 나의라임나무: 저 팔라라 쌉가넝 ^~^
그야 탱커니까 도발 스킬이 있어서 다른 직업보다 쉽긴 하겠지만. 내가 미처 말리기도 전에 슝 튀어 나간 라임나무가 또다시 몬스터를 끌고 돌아왔다.
이런 상황이 세 번, 네 번 반복되자 나는 슬슬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얘 진짜로 도움 되잖아?’
정확히는 만렙 한 명이 각잡고 퀘스트를 도와주니까 그 효과가 꽤 괜찮았다. 퀘스트 클리어 속도에 탄력이 붙은 만큼 레벨도 빠르게 올랐다.
무엇보다 몬스터를 일일이 찾아가서 죽여야 하는 번거롭고 귀찮은 사냥 퀘스트를 손쉽게 끝낼 수 있어서 좋았다. 나와 함께 도움을 받은 파티원들도 아까보다 훨씬 유해진 태도로 수근거리기 시작했다.
[파티] 빚과송금: 생각보다 ㄱㅊ은 사람일지도?
[파티] 쥐안에든독: 날씨님 사람이 넘 쉬운거 아니에여?ㅠ
[파티] 빚과송금: 저만 그런게 아니라
[파티] 빚과송금: 일욜님도 지금 반쯤 넘어간거같은데ㅋㅋㅋㅋㅋ
[파티] Z10N: 솔직히 좀....좋다?
[파티] 빚과송금: 렙업 속도 개빠른거 실화임?
[파티] 쥐안에든독: 이래서 부캐 빨리 키울라면 쩔해주는 버스기사 한명 필요하긴함
[파티] 빚과송금: 근데 기분탓인가
[파티] 빚과송금: 특히 일욜님한테 잘해주는거 같음
[파티] 쥐안에든독: 저 사람도 제정신은 아닌걸봐서
[파티] 쥐안에든독: 또.라이 꼬이는 일욜님 특성이 발동한거 아닐지
[파티] Z10N: ㅡㅡ?
[파티] haewo1: ㅋㅋㅋㅋㅋ
[파티] haewo1: 나쁠거없죠
[파티] haewo1: 그럼 오일님이 맡아서 친해지기 ㄱㄱ?
[파티] Z10N: 이걸 이렇게 떠넘긴다고?
[파티] haewo1: 나서서 쩔해준다는데
[파티] haewo1: 친해지면 좋잖아요
“웃기네. 결국 친해져서 이용해 먹자는 거잖아.”
[눈치 빠르네요.]
비난하는 말에도 서정연은 능청스럽게 반응할 뿐이었다.
‘유진호도 부캐 키우는 동안 흔적이랑 친해지라고 시키더니… 이렇게 보니까 둘이 좀 닮았네.’
사람 이용하는 데에 아주 도가 튼 놈들이다. 무서워 죽겠다. 난 절대 이렇게 되지 말아야지.
‘그래도 쩔해 주는 건 이득이니까 이건 받아야겠다.’
괜히 라임나무가 감시고 나발이고 못하겠다며 때려치우면 이 개꿀 쩔 버스를 잃게 될 거다. 자칫하다간 어나더 길드와의 연결 고리까지 끊어질 수 있고.
그러니까 적당히 친절하게 대해 줄 필요는 있었다. 나는 어느 정도 진심을 담아서 채팅을 쳤다.
[전체] Z10N: 감사합니다^^
[전체] Z10N: 라임님 덕분에 렙업 엄청 빠르네요ㅎㅎ
[전체] 나의라임나무: 헤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