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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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지도 못한 부탁에 나는 당황하며 물었다.
“굳이 그때 따로 전화할 필요가 있냐? 지금처럼 바로 알려 주면 되잖아.”
[음…….]
서정연이 난감한 기색으로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사실 제가 지금 가 봐야 해요.]
“가 봐야 된다고?”
[일이 좀 있어서요.]
당연히 같이 새벽까지 게임할 줄 알았던 나는 재차 당황했다. 반사적으로 시간을 확인하자 자연스럽게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밤 10시가 다 되어 가는데 일을 한다고? 설마 이 시간에 밖에 나간다는 건 아니겠지?’
일이 뭐냐고, 뭔데 이 밤에 해야 하는 거냐고, 턱 끝까지 차오른 질문을 힘겹게 삼켜 냈다.
“…….”
같이 게임하기로 약속한 사이니 저 정도 질문은 가볍게 물어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째서인지 아무리 입을 벙긋거려도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갑자기 기분이 묘해졌다. 상대가 서정연이 아니라 유진호였으면 별생각 없이 곧장 물어봤을 텐데. 유진호까지 안 가더라도 좋은날씨나 여여랑이었어도 당연히 물어봤을 거다. 근데 왜 지금은 그럴 수가 없는 걸까.
“…그래, 일이 바쁘면 어쩔 수 없지. 알겠어. 부길마랑 얘기해 보고 따로 연락 줄게.”
[네. 늦은 시간도 상관없으니까 꼭 전화해요.]
그 말을 끝으로 서정연은 정말로 디코와 아크 모두 나가 버렸다. 순식간에 홀로 남게 된 나는 한참 동안 눈을 깜빡이다가 가슴을 슥슥 문질렀다.
 
***
 
[모른다니까.]
“네가 모르면 누가 알아?”
[내가 알 바야?]
무심한 대꾸에 욕설을 힘겹게 삼켜 냈다.
유진호의 가장 큰 문제점이었다. 이 자식은 남들이 이래도 시큰둥, 저래도 시큰둥한 성격이라 협조를 이끌어 내기가 어려웠다. 이번에 도와준 것도 자기가 나름 부길마라서 해 준 거지, 일반 길드원이었으면 얄짤없었을 거다.
“아무래도 이상하잖아. 저 정도로 널 반긴다는 게.”
[그럼 2년 전에 만난 게 맞나 보지. 굳이 기억을 해야 하나. 2년 전에 레이드에서 만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별일 없었으면 라임나무도 굳이 우릴 기억하지 않았겠지. 너 반기는 꼴을 보면 네가 뭔가 잘해 줬거나 도움을 줬거나 했을 가능성이 커. 머리 좀 굴려 봐.”
[아, 귀찮게…….]
성가시다는 것처럼 투덜거린 유진호가 얼마간 침묵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어제 말한 비슷한 닉네임이 라임나무가 맞는 것 같긴 한데. 단편적으로 떠오르는 기억도 평범하게 레이드 도는 것밖에 없어서 그 이상으로는 모르겠다.]
“망했네.”
[어나더 길드 들어가서 라임나무랑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떠보라고 하면… 지랄할 거지?]
“되겠냐? 노퓨쳐랑 가짜 흔적 일로도 머리 아파 죽겠는데 라임나무 일까지 어떻게 알아봐?”
[역시.]
“나한테 넘기지 말고 라임나무는 네가 좀 맡아라. 상식적으로 난 싫어하고 넌 좋아하는데 네가 나서는 게 더 알아낼 확률이 높잖아.”
[어나더 길드에 박혀 있는 사람을 내가 무슨 수로 맡아?]
“……그 방법을 지금부터 고민해 보자.”
[꺼져.]
내 제안을 가차 없이 쳐 낸 유진호가 전화를 뚝 끊었다.
어제는 서정연과 친해지라는 잔소리를 듣고 내가 먼저 끊었는데, 오늘은 유진호가 먼저 끊었다. 과연 나와 10년을 지내 온 이유가 있었다.
통화가 끝나서 검게 물든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손가락을 움직였다. 화면을 몇 번 터치하자 예전에 저장해 둔 서정연의 번호가 화면에 떠올랐다.
유진호와 얘기가 끝나면 전화해 달라고 했으니 하긴 해야 하는데. 유진호한테 전화 걸 때는 참 쉽게 움직이던 손가락이 지금은 밀랍처럼 딱딱하게 굳어서 움직이지 않았다.
‘유진호랑 대화해서 알아낸 게 딱히 없는데, 전화해도 되는 건가?’
추가로 얻어 낸 정보가 없다고, 그냥 메시지 한 줄 보내 놓는 편이 서로 번거롭지 않고 낫지 않나?
하지만 굳이 전화해 달라고 한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일한다고 했으니 메시지는 빠른 확인이 어려울 거고. 잠깐, 근데 빠른 확인이 필요할 만한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
“…모르겠다. 일단 하자.”
자꾸만 생각이 길어지는 내 자신이 낯설었다. 용건만 전하고 끊을 작정으로 통화 연결 버튼을 눌렀다.
[네, 도해준 씨.]
연결음이 몇 번 울리더니 이내 서정연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괜히 헛기침을 한 번 한 다음에 말문을 열었다.
“일하고 있었어?”
[그렇죠. 도해준 씨는 부길마랑 얘기 잘했어요?]
일하고 있다는 게 정말인지, 아까 게임할 때 디코로 들은 목소리와 지금의 목소리가 확연히 달랐다. 지금은 숨길 수 없는 피로가 느껴졌다.
“해 봤는데 2년 전에 라임나무를 만난 건 확실해. 근데 그 외에 떠오르는 건 딱히 없다고 하네. 새로 얻은 정보가 있지는 않아.”
[예상했지만 아쉽긴 하네요. 이러면 도해준 씨가 라임나무를 조심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겠어요.]
“어쩔 수 없지. 시간이 좀 더 흐르면 떠오르는 게 생길 수도 있고.”
[그럼 좋겠지만요.]
서정연의 대답을 마지막으로 어딘가 불편한 정적이 찾아왔다. 어쩐지 몸을 가만두지 못하게 만드는 어색한 정적이라 나는 급히 말했다.
“일 많이 바쁘냐?”
[조금요. 흠…….]
핸드폰 너머에서 달그락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잔을 내려놓는 소리 같았다.
[사실 저도 이 정도로 일이 밀린 건 지금이 처음이거든요. 그래서 정신이 좀 없네요.]
“진짜 일을 하긴 하나 보네.”
[하하, 백수인 줄 알았어요? 하긴, 하루가 멀다 하고 카페에서 노트북만 두들기는데 의심이 들 만하네요. 차라리 백수가 나았을지도 모르고.]
“그것도 그렇고. 너 내가 무슨 일하냐고 물어봤을 때 대놓고 말 돌렸잖아.”
[아, 그거. 혹시 기분 나빴어요? 도해준 씨 놀리려다 보니 의도치 않게 대답 못 한 거지, 다른 뜻은 없었어요.]
“…그 설명 들으니까 나빠진다.”
이 자식이, 남은 기껏 걱정해 줬더니 하는 말이 뭐 저따구야?
‘뭐? 날 놀리려고 그런 거고, 다른 뜻은 없어? 그게 그거잖아!’
하여튼 심각하게 생각해 봤자 나만 손해인 걸 매번 겪었는데도 또 실수했다. 몇 번이고 반복해 온 후회를 다시 하는데, 서정연이 아까보다 훨씬 편안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대단한 건 아니고, 번역을 좀 해 주고 있는 거예요.]
웬일이지? 순순히 알려 주는 모습에 조금 놀랐지만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재빨리 물어봤다.
“번역? 소설이나 그런 거?”
[보통은 소설이죠. 제가 옛날에 해외에서 잠깐 살았어서 외국어는 조금 할 줄 알거든요. 언어 쪽으로 공부도 좀 했고.]
“외국어면 영어를 할 줄 아는 거야? 아니면 일본어?”
[영어, 일본어, 프랑스어, 독일어요.]
외국어를 한다고 하면 보통은 영어나 일본어, 중국어였으니 별생각 없이 물어본 건데, 어마어마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 그걸 다 할 줄 안다고?”
[번역이 아니라 의사소통 수준으로 가면 더 많죠.]
“미쳤, 아니, 그런 놈이 대체 왜 아크를 하는 거야?”
진심으로 경악하는 내가 웃긴지 서정연이 짧게 웃었다.
[할 줄 알 뿐이지, 번역 일을 할 때 빼고는 별 쓸모 없어요. 저보다 도해준 씨가 몇 배는 바쁠걸요? 카페 알바에 대학 선배한테 디자인 일까지 받아서 하고 있잖아요.]
“너도 바쁘다며.”
[전 일이 밀려서 그렇고요. 마감일이 내일이라서요. 그간 도해준 씨랑 노느라 일을 뒷전으로 밀어 놨더니 결국 이 꼴이 됐네요.]
나랑 노느라 일이 밀렸다는 말에 나도 더 참지 못하고 서정연을 따라 웃었다.
통화 초반에 느낀 불편한 정적은 어느새 말끔하게 사라져 있었다. 나도 한결 편안한 기분으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나보다 나이 많다고 뻐길 땐 언제고, 노느라고 일도 안 하냐?”
[그러게 말이에요. 다음 일은 좀 적게 받거나 기간을 넉넉하게 늘려야겠네요.]
“내가 언제까지 놀아 줄 줄 알고? 일 열심히 해서 돈 벌 생각이나 해라.”
[너무 매정한 거 아니에요? 근데 생각해 보니까 돈은 벌긴 해야겠네요. 도해준 씨가 카페 가서 주문해야만 만나 주니까.]
“버는 돈 우리 카페에 다 쓰는 거 아니지?”
[아슬아슬한데, 다행히 저금할 돈은 남네요. 도해준 씨는 어때요. 디자인 일이요.]
“기한은 맞출 것 같다. 이렇게 보니까 너나 나나 하는 일이 마감에 쫓기는 거네.”
[이제 제가 좀 불쌍해 보이고 이해도 되고 그러나요?]
“웃기지 마.”
능청스러운 말에 입꼬리가 절로 위로 올라갔다.
나와 서정연의 전화는 그 뒤로도 한참이나 계속됐다. 바빠서 게임도 끈 놈이 적당히 상대해 주고 끊어도 될 텐데, 녀석은 내가 그만하자고 할 때까지 전화를 이어 갔다.
나는 나대로 이번 일을 위해서 본업까지 뒤로 밀었다는 서정연의 말을 듣고 기분이 좋아서 전화를 끊어 줘야 한다는 사실을 깜빡하고 말았다. 겨우 이성을 붙잡고 시간을 확인했을 때는 자정이 훌쩍 넘어 새벽 1시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 미안. 시간 확인을 못 했다.”
낭패 어린 심정에 눈가를 손으로 가리며 사과하자 서정연이 상관없다는 태도로 웃었다.
[뭘 이런 거로 사과까지 해요. 시간이 늦긴 했네요. 전 어차피 일해야 하니까 괜찮지만 도해준 씨는 알바 가려면 자야죠.]
“그래야지. 이만 끊을게.”
[네.]
답지 않게 이 시간까지 전화를 하느라 상대에게 민폐를 끼친 게 쪽팔렸다. 속으로 한탄하며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려는데, 마지막 인사가 들려왔다.
[잘 자요, 도해준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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