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연의 계획에 협력하겠다는 결정은 내렸지만, 그렇다고 모든 게 정리된 건 아니었다.
현재 나는 부캐를 만들어서 어나더 길드에 들어가겠다는 계획만 알 뿐이었다. 들어간 이후로는 어떻게 행동할지, 가짜 흔적으로부터 사칭 증거를 어떻게 잡을지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 듣지 못했다.
서정연도 그 부분을 이미 알고 있는지 웃는 걸 멈추고 말을 이었다.
“만렙을 찍고 길드에 무사히 들어가는 게 기본이고, 그다음부터가 중요하겠네요. 사칭범에 대한 정보가 너무 없으니까 그거부터 얻는 게 급하고. 그다음은 어나더 길드를 망하게 할 기회를 잡을 생각이에요.”
“뭐? 잠깐, 망하게 한다니? 아예 어나더 길드 자체를 건드리게?”
“그래야죠. 그거 아니면 답이 없는데? 설마 사칭범이 사과하고 사라지는 그런 멍청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죠?”
“…….”
그거참 멍청해서 미안하네.
하지만… 저런 경우 없는 놈들 때문에 1년 동안 키운 길드를 버리는 건 너무하지 않나. 심지어 우리 길드랑 서버 1위, 2위를 앞다투던 길드였는데.
“음, 제 말은요.”
나를 잠시간 바라보던 서정연이 방금보다 훨씬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얘기했다.
“아마 길드를 살리는 건 어려울 거예요. 제 캐릭터의 의상부터 장비, 말투까지 따라 할 정도로 그쪽도 준비를 단단히 해 뒀을 테니까.”
“알아, 무슨 뜻인지.”
“어디까지나 제 예상이에요. 실제로는 달라질 수도 있어요. 사칭범이 어떤 놈인지 직접 만나 보면 좀 확실해질 것 같기도 하고.”
“길드에 들어가고 나서는 어떻게 할 건데?”
“거기 길드원들과 적당히 친해져야겠죠?”
“길마였을 때도 안 그런 놈이 이번에 퍽이나 하겠다.”
“그래서 말인데요, 도해준 씨.”
빙긋 웃은 서정연이 상체를 좀 더 내 쪽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혹시 믿을 만한 사람 있어요?”
“갑자기 왜.”
“저야 도해준 씨 말처럼 사교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도해준 씨도 그렇게 사근사근한 타입은 아니니까. 어나더 길드원들이랑 친해질 만한 사람 한 명 정도 더 데려가면 좋잖아요.”
“…어째 비꼬는 거 같다?”
“그럴 리가요.”
찝찝한데. 아무튼 서정연의 제안은 나쁘지 않았다. 어쨌든 길드에 무사히 들어가서 그쪽 애들과 어느 정도 섞어야 정보도 그만큼 얻을 수 있을 테니까.
‘적당히 능청스러우면서 분위기를 띄울 줄 알고 믿을 만한 사람이어야겠지.’
마하는 나를 대신해서 길드를 맡아 줘야 하니까 넘어가고. 그렇다면…….
‘좋은날씨나 여여랑 정도가 적당하겠네. 그 두 사람이 하겠다고 대답할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길드원들도 괜찮긴 하지만, 그래도 저 두 사람이 마하 다음으로 길드에 오래 있었고 나와도 교류가 잦은 길드원이라 믿을 만했다.
“찾아볼게.”
“좋아요. 그럼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까 여기까지 하고… 내일 바빠요?”
“내일도 만나자고?”
“나머지는 내일 만나서 더 얘기해 보는 게 낫지 않아요? 도해준 씨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거고. 무엇보다…….”
나와 시선을 맞춘 서정연이 눈꼬리를 부드럽게 휘었다.
“제가 정말로 그 흔적인지 직접 확인해 보고 싶잖아요.”
“…그렇다고 하면, 확인시켜 줄 수는 있고?”
“물론이죠.”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대답이 나왔다. 피시방이라도 같이 가서 보여 주려는 건가?
“그럼 내일 밤 8시 넘어서 내가 알바하는 카페로 와. 8시 30분에 알바 끝나니까.”
“알겠어요.”
서정연이 순순히 대답했다. 내 일정에 맞추겠다는 그 태도에 문득 궁금해졌다.
그러고 보니 이 자식, 무슨 일을 하는 거지? 평소 카페 오는 시간도 대낮이고… 프리랜서인가? 백수라기에는 노트북을 꼬박꼬박 들고 와서 뭔가를 하곤 했으니까.
‘대학생인 것 같진 않고.’
나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긴 하지만 분위기가 학생과는 거리가 멀었다.
근데 나 왜 이런 걸 궁금해하고 있는 거야? 쓸데없는 생각을 떨쳐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얘기 끝났으면 간다. 내일 카페로 와.”
“혼자 집에 가기 무서우면 데려다줄까요?”
“미친놈…….”
질색하며 등을 돌리자 뒤에서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짜 존나 재수 없다.
***
딸랑, 종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카페 안으로 새 손님이 들어섰다. 언제나처럼 단정하고 깔끔하게 입은 서정연은 카운터로 곧장 다가왔다.
“저 시간 맞춰서 왔죠?”
그 말에 시간을 확인했다. 7시 50분. 맞춰 오긴 무슨, 왜 벌써 온 거지?
“주문하시겠습니까?”
심드렁히 묻자 눈을 깜빡인 서정연이 고개를 기울였다.
“존댓말?”
“지금은 손님이니까.”
저번에 온 임소희처럼 사장님께 미리 양해를 구해 둔 상태면 모를까, 남들 앞에서 서정연과 약속했다는 티를 내고 싶지 않았다.
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던 서정연이 메뉴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시간이 많이 남아서 뭐 하나 시키긴 해야겠네요. 도해준 씨.”
“왜요.”
“만들 때 제일 까다로운 메뉴가 뭐예요?”
제일 까다로운 거? 뜬금없는 질문에 나도 모르게 입이 움직였다.
“당연히 슈크림 망고 프라푸치노… 잠깐만. 설마…….”
경악하는 날 두고 화사하게 웃은 서정연이 말했다.
“슈크림 망고 프라푸치노 주세요.”
“개소리하지 마. 너 단 거 싫어하잖아!”
기가 막혀서 소리 낮춰 따지자 서정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반말하시는 거예요? 나 손님인데?”
이 개자식이…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힘겹게 올린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알겠습니다. 슈크림 망고 프라푸치노 하나.”
“진동벨 안 주나요?”
“제가 직. 접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서정연이 그러든가, 하는 표정으로 즐겨 앉는 자리로 갔다. 멀어지는 녀석의 등을 몰래 노려보다가 냉동고에서 얼음을 꺼냈다.
‘다시는 여기로 안 불러야지.’
그냥 다른 데서 만나자고 할걸. 저 자식의 꼬인 성격을 잠시 깜빡했다. 1년간 게임에서 지겹도록 당했는데 이제는 현실에서 당하고 있으려니 속에서 분노가 절로 치솟았다.
짜증 섞인 손놀림이 점점 거세졌다. 팍팍, 완성된 프라푸치노 위에 망고와 슈크림을 대충 올렸다. 내가 보기에도 성의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모양새였다. 나는 사장님이 잠깐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완성된 음료를 들고 서정연에게 가져갔다.
타악!
테이블에 잔을 거칠게 내려놓자 테이블이 살짝 흔들렸다.
“주문하신 음료 나왔습니다, 손님.”
“이렇게 직접 갖다 주기까지 하고. 수고가 많네요.”
“제가 서비스 정신이 투철한 편이라.”
적당히 대꾸하고 나서 허리를 숙여 서정연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야, 나 알바 끝날 때쯤에 먼저 나가. 건물 옆 골목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옷 갈아입고 바로 갈 테니까.”
“왜요? 그냥 같이 나가면 되는데.”
“단골손님이랑 사이좋게 손잡고 나갔다가 귀찮은 일 만들 생각 없어. 내 말 이해했냐?”
“저도 손까지 잡을 생각은 없었는데… 알았어요, 알았어.”
작작 하라는 마음으로 쳐다보자 서정연이 냉큼 한발 물러섰다. 하여간 눈치는 귀신같은 놈이다.
때마침 종소리가 들려오며 새로운 손님이 매장 안으로 들어왔다. 서정연이 제발 내 말을 따라 주기를 바라며 급히 카운터로 돌아갔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8시 20분이 되자 자리를 정리한 서정연이 잔을 돌려주러 왔다.
“남은 시간도 힘내요.”
10분 뒤에 퇴근하는 걸 뻔히 알면서 얄미운 인사를 남긴 서정연이 먼저 카페를 떠나갔다. 나는 뒤늦게 녀석이 돌려준 잔을 보고 놀랐다.
‘다 마셨잖아?’
잔이 작은 편도 아니라서 그 잠깐 사이에 다 마시기 힘들었을 텐데. 게다가 슈크림에 망고까지 올라가서 제법 달았을 거고. 케이크보다 맛있기라도 했나?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는 놈이었다. 빈 잔을 닦고 나서 시간 맞춰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해준이 오늘도 고생 많았어.”
“아니에요.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뒷정리는 언제나 직접 하는 사장님을 남겨 두고 먼저 카페에서 나왔다.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하자 30분까지 3분을 남겨 두고 있었다.
‘어디 있지?’
카페 건물 주변 골목길을 두리번거리던 그때, 어딘가에서 담배 냄새가 옅게 맡아졌다.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담배를 입에 물고 핸드폰을 보고 있는 서정연이 보였다.
뒤늦게 나를 발견한 서정연이 절반 정도 남은 담배를 끄며 말했다.
“빨리 끝났네요. 30분 넘어서 올 줄 알았는데.”
“담배도 피울 줄 아냐?”
담배는커녕 술도 잘 못 마실 줄 알았다. 의외의 모습에 묻자 서정연이 불이 꺼진 담배꽁초를 휴대용 재떨이에 넣으며 대답했다.
“필 줄은 당연히 알죠. 성인이니까. 그럼 도해준 씨는 담배 안 피워요?”
“그딴 걸 왜 펴. 건강에도 안 좋은데.”
“아하…….”
영혼 없는 감탄사를 뱉어 낸 서정연이 또다시 묘한 눈빛으로 날 응시했다.
“신기하네요. 당연히 담배를 피울 줄 알았어요. 생긴 게 좀…….”
“내 생긴 게 뭐가 어때서?”
“아니에요. 그보다 여기서 더 할 거 없으면 이제 출발할까요?”
자기 할 말만 하고 주제를 돌려 버리냐. 하지만 나도 더 얘기하고 싶은 건 아니라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