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저 길드 새끼들은 왜 자꾸 나한테 선공을 날리는 거지?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이나?
[파티] 빚과송금: 오우 반응속도 굿
[파티] 쥐안에든독: 어떡해요 일욜님?
[파티] Z10N: 싸워야지
하지만 나조차도 이번 PVP는 자신이 없었다. 어제 그 일이 있던 후로 피로를 참아 가며 꾸역꾸역 80레벨을 찍어 두긴 했지만, 지금으로선 아무 소용이 없었다.
우리는 100레벨도 찍지 못한 뉴비 네 명. 상대는 만렙 세 명. 충치왕김건치 한 명도 겨우 이겼는데, 세 명을 이기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파티] haewo1: 이왕 싸우는거 이겨야죠
[파티] haewo1: 그리고 이겨야 제가 말한 계획도 통하구요
[파티] Z10N: 그걸 지금 몰라서
나는 채팅을 끝까지 치지 못하고 급히 옆으로 몸을 날렸다. 저 자식들이 자꾸 나한테 스킬을 날려 댄 탓이었다.
‘일단 내가 제일 미운털이 박힌 건 확실하네.’
그러고 보니까 어제 충치왕김건치 막타를 내가 쳤던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저러나?
[파티] 쥐안에든독: 아오
[파티] 쥐안에든독: 이젠 도망못치니까 걍 ㄱㄱ
[파티] 빚과송금: ㅇㅋ;
【Power Up! 응원의 노래를 들려드릴게요!】
소울 스타의 활기찬 음성과 함께 버프 효과가 들어왔다.
그나마 어제 레벨을 올려놓은 덕분에 좋은날씨가 새로 배우게 된 버프 스킬이었다. 나 또한 원거리 스킬을 배웠으니 이걸 어떻게든 활용해야 할 텐데.
[파티] haewo1: 창엘홀
그사이에 상대의 직업을 파악한 서정연이 간략하게 브리핑을 해 왔다. 왼쪽부터 순서대로 창술사, 엘레멘탈 마법사, 홀리나이트 라는 뜻이었다.
근딜 하나, 원딜 하나, 탱 하나? 저 새끼들 아주 제대로 작정하고 왔네.
나는 우선 활을 꺼내서 상대를 향해 조준했다. 끼긱, 한계까지 당겨진 활시위를 놓자 빛으로 만들어진 세 개의 화살이 빠른 속도로 날아가 상대 캐릭터가 모여 있는 중심부에 정확히 꽂혔다.
세이버 전용 스킬인 광역 디버프 화살이었다. 공격력과 공격 속도를 감소시키는 디버프 스킬로, 지금은 레벨이 낮은 탓에 감소시키는 퍼센티지가 적어서 아쉽지만 나중에는 제법 쓸 만한 스킬이었다.
[파티] Z10N: 여여랑님이 뒤로
[파티] haewo1: 제가 오일님이랑 갈게요
나와 서정연이 똑같은 타이밍에 같은 채팅을 꺼냈다. 서정연도 나처럼 봉술가인 여여랑이 뒤로 빠져서 서포터 좋은날씨를 지키는 편이 나을 거라고 판단한 모양이다.
어제와는 상황이 달라서 어쩔 수 없었다. 어제의 경우, 충치왕김건치가 방어력이 낮은 원거리 딜러였기 때문에 그나마 대미지가 받쳐 주는 세이버인 나와 봉술가인 여여랑이 앞장섰다. 하지만 지금은 적팀에 홀리나이트가 있으니 딜보다는 거리를 벌린 채로 천천히 싸워야 한다.
홀리나이트는 팀원들의 방어력을 높여 주는 버퍼형 탱커 직업이었다. 우리는 가뜩이나 레벨도 낮고 장비 상태도 좋지 않은데, 거기에 홀리나이트 버프까지 뚫어야 하니… 사실상 좋은 대미지가 나올 거라는 기대 자체를 버려야 했다.
그러니 우리 중에서 그나마 체력이 높은 봉술가가 가장 중요한 서포터를 지키도록 위치를 조정하는 게 나았다. 브리핑을 들은 여여랑이 재빨리 좋은날씨 곁으로 이동하고, 내 옆자리는 서정연이 채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서정연이 윈드 헌터 고를 때 더 열심히 막을 걸 그랬다. 다 좋은데, 등을 맞대고 함께 싸울 팀원이 하필 윈드 헌터라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이기긴 어려울 거고, 최대한 한 명이라도 죽이는 방향으로 해야겠는데.’
우리가 할 만한 포지션이 별로 없는 데다 상대 팀도 우리가 불리하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는 탓에 역전은 어려웠다. 마른침을 삼키며 활을 집어넣고 장검을 들었다.
채앵! 검을 들자마자 창술사가 내게 곧장 달려들었다. 역시 나부터 노리는구만. 이 정도면 너무 투명해서 웃길 지경이었다.
강화 스킬로 대미지가 더욱 강해진 창술사의 평타를 방어로 막자마자 발밑으로 마법 스킬이 날아왔다. 회피기를 써야 할지, 아니면 한 대 맞고 회피기를 아낄지 갈등하던 나는 회피기를 아끼기로 했다.
【크윽!】
커다란 바늘 형태의 얼음 결정이 내 캐릭터에 적중하자 체력의 절반 이상이 확 깎였다. 스킬 한 번에 체력이 40%만 남은 걸 확인하고 마른침을 삼켰다.
창술사를 상대하려면 회피기는 필수였다. 그래서 내린 결정이었는데, 리스크가 너무 컸다.
낮은 확률로 걸리는 슬로우 CC기는 피했지만, 체력이 너무 낮아서 스치기만 해도 죽을 상태였다. 뒤에서 버프를 넣어 주며 상황을 지켜보던 좋은날씨도 영 불안했는지 결국 힐 스킬을 내게 썼다.
【제 노래에 귀를 기울이세요!】
덕분에 체력이 60%까지 오르긴 했지만, 운이 따르지 않는 이상 공격을 한 번 더 당하면 죽을 가능성이 큰 건 여전했다.
소울 스타의 힐 스킬 쿨타임이 돌아오려면 아마… 30초는 걸릴 텐데. 레벨이 낮은 만큼 스킬 랭크도 낮아서 쿨타임이 길었다.
‘피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는데.’
역시 창술사와 엘레멘탈 마법사를 둘 다 상대하는 건 무리였다. 한 명만 도와주면 좋겠는데. 그런 생각을 한 그때였다.
【한 줄기 바람이 우리를 도울 것이다.】
하는 사람이 없어서 다소 낯선 윈드 헌터의 대사 음성과 함께 새까만 단검이 빠른 속도로 날아와 새로운 스킬을 시전하던 마법사를 제대로 맞췄다. 동시에 자신이 상대하던 홀리나이트의 돌진기를 휙 날아올라 피했다.
서정연을 노렸던 홀리나이트는 공중으로 사라진 윈드 헌터 대신에 서포터를 지키던 봉술가를 새로운 상대로 인지했다. 그야말로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어그로 토스였다.
[파티] 쥐안에든독: ?;;
졸지에 서포터를 지키며 제일 튼튼한 홀리나이트를 상대하게 된 여여랑이 당혹스럽다는 반응을 보여 왔지만 지금 그거에 신경 쓸 수가 없었다. 이로써 창술사는 내가, 엘레멘탈 마법사는 서정연이, 홀리나이트는 여여랑과 좋은날씨가 맡게 됐다.
‘나쁘지 않은데?’
봉술가를 소울 스타에게 붙여 주고 나랑 서정연이 선두로 나서서 최대한 버텨 보자는 계획을 손바닥 뒤집듯 잽싸게 바꿨다.
역시 이론과 실전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창술사 한 명 상대하는 것도 빡센데 세 명을 어떻게 상대하냐고. 아마 서정연도 내게 들어간 대미지를 보고 빠르게 계획을 바꾼 것 같다. 그야말로 ‘될 대로 돼라’ 작전이다.
창술사와 1대1로 맞붙게 된 나는 아까보다 훨씬 쉬워진 난이도에 짙게 웃으며 스킬을 사용했다. 엘마가 옆에서 스킬을 날리는 것도 아니었으니 공격을 피하는 게 굉장히 쉬웠고, 쉬운 만큼 틈이 많아서 내가 공격할 타이밍도 늘어났다.
【아악!】
두 번 휘두르는 평타 강화 스킬에 크리티컬 타격 효과가 터졌다.
조금씩 줄어들던 창술사의 체력이 처음으로 크게 줄어들자 비명을 내질렀다. 아까 맞은 뒤로 그대로 체력을 유지하고 있는 나보다 창술사의 체력이 더 적어졌다.
[전체] 밍나고멘: 아**
80레벨의 뉴비에게서 나올 거라고 생각 못 한 대미지였는지 창술사가 욕설을 내뱉었다. 컨트롤이 더럽게 딸려서 남을 때리진 못하고 자기만 얻어맞는데 레벨이 더 이상 무슨 소용이 있겠냐고.
어제보다 레벨 업을 좀 해 놔서 그나마 이 정도 대미지가 나온 거긴 하지만, 어제 상대했었어도 이 창술사 한 명 정도는 내가 반드시 이겼을 거다. 실력을 보면 결과가 보였다.
패배를 예감한 창술사가 마지막 발악을 해 왔다. 창술사가 ‘이판사판’ 강화 스킬을 몸에 두른 채로 돌진해 왔다. 상대에게 확정적으로 공격하는 대신에 일정 퍼센티지의 대미지를 자신 또한 받게 되는 양날의 검 같은 스킬이었다.
어차피 피할 수 없으니 운에 맡기고 버텨야 했다. 방어 스킬로 들어오는 대미지를 최대한 감소시키며 창술사의 마지막 공격을 받아 내자 내 캐릭터와 창술사의 캐릭터가 동시에 비명을 내질렀다.
【크헉!】
【윽!】
먼저 쓰러진 건 다행히 창술사였다.
모든 체력을 잃고 풀썩 쓰러진 창술사와 달리 내 캐릭터는 10% 정도의 체력을 남기고 살아남았다. 워낙 방어력과 체력이 낮아서 방어 스킬로 공격을 맞는데도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안도의 숨을 내쉬며 파티원의 상태를 확인했다. 서정연은 내 예상대로 엘레멘탈 마법사를 상대하면서 체력적으로나 실력으로나 우위에 있었지만, 홀리나이트를 상대하는 여여랑과 좋은날씨 쪽은 상황이 나빴다.
어떻게든 홀리나이트를 막으려고 여여랑이 노력하고 있었지만 홀리나이트의 돌진과 도발 스킬에 휘말린 탓에 서포터인 좋은날씨의 체력이 벌써 절반보다 적게 남아 있었다. 역시 봉술가 한 명으로는 탱커를 막는 건 불가능하구나.
내가 끼어든다고 해도 판도를 뒤집긴 어렵고, 최소한 서정연이 엘마를 죽이고 올 때까지 버틸 수 있게 도와야 했다. 황급히 홀리나이트에게 달려가던 나는 오른편에서 날아오는 투사체를 알아채고 회피기를 사용했다.
쿠웅, 내게 날아온 건 엘마의 마법 스킬이었다. 서정연에게 얻어맞는 와중에도 내가 홀리나이트에게 간다는 걸 알아채고 막은 것이다. 컨트롤은 몰라도, 셋 중에서 가장 게임 센스가 뛰어난 사람은 엘마가 확실했다.
【아아…….】
내가 엘마 스킬을 피하느라 한턴 늦춰진 사이에 홀리나이트의 돌진기를 얻어맞은 좋은날씨가 결국 버티지 못하고 죽어 버렸다. 서포터를 잃자 버프가 모두 사라지며 간당간당한 체력으로 서포터를 지키던 여여랑도 허무하게 죽어 버렸다.
[파티] 쥐안에든독: 쪼렙이라 탱커 딜도 감당을 못하네;
[파티] 빚과송금: ㅈㅅ해요ㅠ
사태를 파악한 서정연이 우선 체력이 낮은 엘마부터 마저 처리했다. 바람을 휘감아 순식간에 엘마 앞으로 날아간 윈드 헌터가 쥐고 있는 검을 휘둘러 상대를 무사히 죽였다.
아윽, 풀썩 쓰러지는 엘마를 뒤로하고 즉시 다시 위로 떠 오른 서정연이 이번에는 회오리를 소환해서 홀리나이트를 휘감았다. 상대를 속박시키는 CC 스킬이었다. 하지만 탱커라서 CC가 오래가진 못할 거다.
CC기가 유지되는 사이 할 수 있는 모든 대미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서정연도 그걸 아는지, 엘마를 상대하면서 계속 아껴 놨던 그나마 제일 대미지가 가장 강한 스킬을 꺼내 들었다.
휘이잉, 강한 바람과 함께 수십 개의 단검이 홀리나이트를 향해 날아갔다. 그걸 확인하면서 나도 돌진기를 써서 공격력을 강화한 채로 검을 휘둘렀다. 채앵, 무기가 부딪치는 날카로운 효과음이 울려 퍼지며 홀리나이트의 체력이 깎였다.
CC기로 묶어 놓고 갖고 있는 스킬 중에서 제일 강한 걸 골라 공격했는데도 체력을 절반도 깎지 못했다. 홀리나이트의 체력이 60% 정도가 남은 걸 본 나는 혀를 찼다.
‘망했네.’
이젠 이길 수 없었다. 내가 좀 더 빠르게 움직였다면, 그래서 여여랑이나 좋은날씨 둘 중에 한 명을 살렸다면 우리가 이겼을 텐데. 깊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CC기에서 풀려나서 그대로 달려오는 홀리나이트를 바라보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
처음 보는 닉네임의 인파이터 유저였다. 홀리나이트를 마주한 인파이터가 빠른 몸놀림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끄으윽! 탱커 상대로 특히 좋은 인파이터가 연속해서 스킬을 쓰자 홀리나이트가 맥을 못 추고 체력이 훅훅 줄어들었다.
[파티] 빚과송금: 엥 누구지?
[파티] 쥐안에든독: 저도 모름
[파티] haewo1: 구경하던 다른 유저인거 같네요
구경하던 유저라고? 그제야 주위에 이 전투를 구경하는 유저들이 여러 명 있다는 걸 알아챘다. 뭐야. 그럼 저 인파이터가 지금 우리 도와준 건가?
[전체] 동파방지: 아 ***
[전체] 동파방지: ****인가 시.발아
인파이터에게 제대로 된 반항 한번 못 해 보고 죽어 버린 홀리나이트가 있는 대로 욕을 했다. 아무리 사납게 난리를 쳐도 죽어 있는 상태이니 하나도 위협적이진 않았지만.
“하아…….”
의외의 상황으로 마무리됐지만, 어쨌든 이번 위기도 나름 잘 버티고 넘긴 것 같다. 긴장이 풀어지며 한숨이 절로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