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훅 올라온 열기에 뻐근해진 목덜미를 부여잡았다.
“이, 미친…….”
종결 무기가 올라와 있어서 샀다고? 아니, 그럼 저게 공속만 풀강 찍힌 게 아니라 아예 종결 무기라는 거잖아? 현기증이 아찔하게 몰려왔다.
종결 무기가 왜 종결 무기인가. 그 직업에서 가장 뛰어나고 완벽한 스펙을 가진 무기라는 뜻이다.
종결 무기를 가질 방법은 게임이 업데이트돼서 새로운 강화 단계가 풀리거나 기존의 종결 무기를 가진 유저가 접으면서 파는 걸 사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러니 어느 직업이든 종결 무기는 어마어마하게 비싼 게 당연했다. 차마 얼마 주고 샀냐고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은 나는 대신 다른 걸 물었다.
“야… 너 본캐 멀쩡히 살아 있잖아.”
“네에.”
“일휘일비도 있고.”
“그렇죠.”
“근데 씨… 윈드 헌터 종결 무기를 왜 쳐 사!”
쾅, 책상을 내리치며 따지자 서정연이 가뜩이나 큰 눈을 더 크고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기울였다.
“도해준 씨 상대가 되려면 무기라도 종결을 꺼야죠. 다른 장비는 스펙이 딸려서 무기라도 맞추지 않으면 안 될 텐데.”
“뭐가 안 돼, 대체? 애초에 우린 적당히 싸우는 척하다가 계획대로 하면 되는 건데 거기서 무기가 무슨 상관이냐고?”
답답해서 가슴을 퍽퍽 때리자 서정연이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선 눈꼬리를 아래로 축 내렸다.
“저 지금 혼내는 거예요? 돈 막 썼다고?”
“혼…내는 건 아니지만!”
“솔직히 도해준 씨는 제 마음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했어요. 우리 이렇게 전쟁에서 만난 거 정말 오랜만이잖아요.”
“뭐? 아니, 그건…….”
“저도 모르게 너무 신나서 최대한 도해준 씨 스펙에 맞추고 싶었을 뿐인데… 이미 사 버려서 되돌릴 수도 없고… 도해준 씨는 그거 다 알면서 나 막 혼내네…….”
“…….”
기다란 속눈썹을 아래로 내리며 씁쓸한 미소를 짓는 서정연의 얼굴에 식은땀이 절로 흘렀다.
속지 말자. 저건 다 연기다. 연기라고. 연기…….
“…얼마 주고 샀는데.”
다 알면서도 결국 먼저 굽히고 들어갈 수밖에 없는 나 자신이 참 한심했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묻자 서정연이 별다른 고민 없이 곧장 대답했다.
“얼마 안 했어요. 인기 없는 직업이라서 그런지 가격이 나름 괜찮더라고요.”
저 ‘나름 괜찮다’의 기준이 과연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돈 많은 사람들은 소비 습관이 다르다더니, 진짜인가 보네.’
그래, 냉정하게 따지면 서정연이 자기 돈으로 자기가 사고 싶은 거 산 거였으니 내가 나서서 왈가왈부할 문제는 아니었다. 비록 엄청난 돈지랄에, 쓸데없는 헛짓거리였지만 아무튼 자기 돈을 쓴 거였으니까. 본인만 만족한다면 되는 거겠지.
혀를 차며 서정연 쪽으로 기울였던 몸을 다시 정면으로 돌렸다. 잡담에 시간을 너무 써 버렸다.
“시작하자.”
한쪽으로 내렸던 헤드셋을 다시 제대로 쓰며 말하자 서정연도 마우스에 손을 올렸다.
나는 우선 서정연의 캐릭터 근처를 살폈다. 전쟁이 벌어진 이 초원은 주변을 커다란 산이 둘러싸고 있었고 서정연의 뒤에는 가파른 절벽이 세워져 있었다.
뒤는 막혀 있으니 갈 수 있는 곳은 내가 서 있는 정면과 왼쪽, 오른쪽뿐. 하지만 오른쪽은 이미 마하와 좋은날씨가 속해 있는 A팀이 어나더 길드원들을 잡아먹으며 자리를 완벽하게 차지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아크로드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뉴비인 ‘haewo1’ 유저가 갈 만한 곳은 정면도 아니고 오른쪽도 아닌, 왼쪽밖에 없었다.
‘저 녀석이 사실은 진짜 흔적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왼쪽으로 도망갈 거라고 여기겠지.’
그리고 그게 우리가 바라는 거고.
공격력 강화 버프 스킬을 사용하자 내 캐릭터가 봉을 크게 한번 휘두른 뒤에 자세를 잡았다.
때마침 산 저편에서 불어온 바람에 내 앞에 서 있던 서정연의 캐릭터의 회색빛 로브 자락과 내 캐릭터의 붉은 머리카락이 흔들거렸다.
탓, 돌진기를 쓰며 단번에 거리를 확 좁힌 나는 서정연을 노리며 샛노란 장식이 달린 봉 끝을 거침없이 앞으로 휘둘렀다. 휘잉, 저편에서 불어온 바람을 자연스럽게 몸에 휘감은 서정연의 캐릭터가 내 공격을 피해 하늘을 훌쩍 뛰어올랐다.
일견 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저건 어디까지나 높이 뛰어오른 것에 불과했다. 윈드 헌터의 여러 단점 중 하나였다. 체력이 적고 공격력도 약한데, 가장 유리하다고 볼 수 있는 공중에도 오래 있지 못한다.
그러니 공격 범위를 벗어난 윈드 헌터가 다시금 떨어질 때까지 잠깐만 버티면 된다. 저 높이 올라간 서정연이 양손 가득 단검을 꺼내 날렸다.
파바바박, 단검 수십 개가 빠른 속도로 떨어져 땅에 내리꽂혔다. 윈드 헌트의 대표적인 스킬인 비도술을 절반은 무빙으로 피하고, 남은 절반은 패링으로 정확히 쳐 냈다.
그 사이에 아래로 내려온 서정연이 바닥에 발이 닿자마자 다시 바람을 휘감고 내 쪽으로 쏜살같이 날아왔다. 이번에는 서정연이 먼저 윈드 헌터의 돌진기를 사용한 것이다.
채앵!
새파랗게 빛나는 서정연의 단검과 붉게 빛나는 내 봉이 중간에서 맞부딪치며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일정 확률로 치명타 대미지가 뜨는 윈드 헌터의 스킬을 막아 낸 나는 숨 돌릴 틈 없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서정연의 공격을 막아 냈으니 이번에는 내 턴이었다. 미리 생각해 둔 스킬 연계를 입력하자 내 캐릭터가 단검을 쳐내고 봉 중앙으로 서정연의 캐릭터를 가차 없이 후려쳤다.
쿠웅! 그 공격을 피하거나 막지 못하고 속절없이 받아 낸 서정연의 캐릭터가 붕 떠올라 땅바닥에 처박혔다. 봉술가와 비등하게 좋은 직업이자 서정연의 본캐 직업인 블레이드였으면 모를까, 윈드 헌터로는 이런 근접 공격을 피하기 어려웠다.
“아…….”
나한테 제대로 한대 얻어맞고 바닥을 뒹군 서정연의 체력이 순식간에 절반으로 감소했다. 대미지 차이를 실감한 서정연이 살짝 당황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잠깐, 잠깐만요, 도해준 씨.”
“뭘 잠깐이야.”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아파요!”
“그러게 종결 무기 살 돈으로 방어 장비를 샀어야지.”
봐주지 않을 생각으로 공격력 버프 스킬을 다시 재가동하며 성큼성큼 다가가자 서정연이 벌떡 일어나서 허겁지겁 도망가기 시작했다.
“뭐야? 벌써 이동하면 어떡하라고!”
“그치만 무서운 걸 어떡해요…!”
서정연이 옆에서 흑흑, 가증스러운 울음소리를 내며 진심으로 내게서 도망쳤다. 멀어지는 서정연의 캐릭터를 황망하게 바라보던 나도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그 뒤를 쫓아갔다.
“아오, 이러면 애들도 바로 불러야 하잖아!”
“괜찮아요. 오히려 지금이 적당할 수도 있어요. 남은 시간이 별로 없어 보이거든요.”
갑자기 계획이 당겨지면서 다급해진 나와 달리 서정연은 시종일관 능청스러웠다. 웃으면서 뒤따라오는 내 공격을 요리조리 쇽쇽 잘도 피하는 서정연의 옆모습을 노려보다가 음소거 해 놨던 마이크를 다시 켰다.
“야, 마하.”
[오, 일욜님! 우리 벌써 게이지 다 채워 가요!]
[왜.]
잔뜩 신난 영화별론가의 말에 나도 뒤늦게 게이지를 확인했다. 83%. 확실히 예상보다 게이지 차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서정연이 계획을 앞당긴 이유가 이건가?
서정연의 캐릭터 위치를 확인한 나는 다급히 말을 이었다. 이제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다.
“A팀 최대한 흩어져서 B팀 위치까지 맡아요. 마하가 알아서 오더 내리고. 그리고 B팀, 제 캐 어딨는지 보여요?”
[넵. 보입니다.]
[길드] 울팀인성봐조인성: 네
[길드] sky004: ㅔ
“B팀 전원 내 뒤 따라와요. 지금 당장. 빈자리는 A팀이 대신 맡아 줄 테니까.”
[길드] sky004: 확인
[길드] 야옹이라옹: ㄱㄱㄱㄱ
[길드] 아스타로트: ㅔ
[길드[ rxrx78: 확인
길드 채팅에 오더를 들었다는 채팅이 주르륵 올라오는 것을 내버려 둔 채로 서정연의 위치를 다시 한번 파악했다.
또 다른 절벽 앞, 거대한 바위가 곳곳에 세워진 장소. 그걸 알아채자마자 나는 일부러 돌진기를 사용했다.
마치 궁지에 몰린 뉴비를 승리에 눈이 멀어서 죽이려고 하는 사람처럼, 그렇게 거침없이 앞으로 돌진기를 쓰며 서정연에게 달려들었다. 내가 어떻게 나올지 설명을 듣지 않아도 알고 있는 서정연은 기다렸다는 듯이 높이 뛰어올랐다.
아까 썼던 그 스킬을 또 사용한 것이다. 돌진기까지 쓴 내 캐릭터가 애꿎은 허공을 봉으로 휘두른 그때였다. 바위 뒤에서 여러 명의 캐릭터가 확 튀어나왔다.
역시 내 짐작대로 숨어 있던 어나더 길드원이었다. 날 노리고 쏘아진 속박용 CC기 공격을 피해 내며 총 몇 명인지 확인했다.
‘일곱, 여덟… 총 열한 명?’
열한 명 속에는 흔적 사칭범인 ‘heunJeok’과 노퓨쳐, 내가 보내 놓은 여여랑의 부캐 ‘쥐안에든독’도 함께 있었다. 그 외에는 부캐를 키우며 나도 익히 본 ‘Rahm’, ‘Iilliliilil’, ‘방벽’ 같은 유저도 있었고 나한테 특히 반감을 품은 ‘성하연’과 ‘미녀사냥꾼’ 무리도 보였다.
“아, 정말…….”
나를 둘러싼 어나더 길드원들을 보자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이렇게 멍청하면 어떡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