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연이 왜 이런 제안을 했는지는 이해한다.
확실히 흔적은 자신의 길드를 관리하거나 길드원들과 교류하면서 지내 온 게 아닌 모양이다. 그러니 지금 같은 상황에서 정보를 얻어 낼 곳이 없는 거겠지.
친한 사람이 없는 흔적과 다른 길드인 난 정보를 얻는 데에 한계가 있었다. 그러니 직접 어나더 길드로 들어가서 사칭범이 어떤 놈인지, 무슨 목적으로 이런 짓을 벌인 건지 알아내자는 거다.
서정연의 계획은 단순하고 간단했지만 그만큼 확실했다. 부캐를 만들어야 하는 번거로움과 어나더 길드에 무사히 가입할 수 있을지에 대한 불확실성을 배제하면 제일 쉬운 방법이고.
다 안다, 알겠는데.
“안 해.”
난 그런 쓸데없는 일에 시간 낭비할 생각이 없었다. 엄연히 따지면 흔적이 없는 어나더 길드는 나와 아무 관련이 없었으니까.
물론 우리가 예상하는 대로 어나더 길드가 먼저 도발해 온다면 그때는 이 제안도 고려해 볼 만하지만… 아직 그놈들과 아무런 마찰이 없는 상태이니 굳이 나서서 판에 낄 필요도 없었다.
설마 내가 거절할 줄은 몰랐는지, 서정연이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 이번에는 내가 녀석을 비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할 얘기가 이거뿐이라면 먼저 일어난다. 알바하다가 중간에 잠깐 나온 거라서.”
“정말 안 할 거예요? 제대로 된 정보를 얻으려면 이 방법밖엔 없을 텐데요.”
“들어가려면 부캐가 필요한데, 부캐 키우는 건 별로 취향이 아니야. 그리고…….”
이어서 말하려던 나는 멈칫했다.
사실 흔적과 하고 싶은 대화 주제는 따로 있었다. 갑자기 계정 삭제하고 사라진 이유나, 왜 한 달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았는가… 이런 것들 말이다.
하지만 막상 진짜 흔적과 마주해 보니 저 얘기를 꺼내기가 애매했다. 한 달이나 사라졌다가 일휘일비 캐릭터로 나타난 걸 보면 딱히 묻지 않아도 대충 무슨 상황인지 짐작은 가지만.
‘그럼 어나더 길드가 사칭하더라도 무시할 만하지 않나?’
왜 부캐로 길드에 들어가면서까지 정보를 얻어 내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
고작 게임에 왜 저런 정성을 들이냐, 이렇게 따져 봤자 나도 게임에 과몰입해서 사는 처지였으니 웃기기만 하고.
“음, 그래요…….”
내 거절에 계획을 수정하는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입가를 매만지던 서정연이 테이블에 내려 둔 핸드폰을 다시 들었다.
“알겠어요. 그럼 혹시 모르니까 번호만 주고 가요.”
“너도 참 징하다.”
이 상황에도 내 번호를 물어 오는 태도에 두 손 두 발 다 들고 핸드폰을 받아 들었다. 번호를 찍고 통화 버튼을 누르자 내 핸드폰에도 서정연의 번호가 떴다.
“됐지?”
“네. 무슨 일 있으면 편하게 연락해요.”
내게 핸드폰을 돌려받은 서정연이 그림 같은 미소를 지었다. 기껏 생각해서 내건 제안을 거절당했는데도 그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과연 연락할 일이 있을까. 그보다 궁금한 건 따로 있었다.
‘허구한 날 내 뒤만 쫓아다니던 일휘일비랑 카페에 자주 찾아오는 단골손님인 주제에 앞으로 내 얼굴을 어떻게 보려고.’
뭐, 장난 아니게 뻔뻔한 성격이니 신경도 안 쓰고 평소처럼 행동하려나. 아무튼 내가 서정연에게 개인적으로 연락할 일은 없을 거다. 그렇게 결론을 짓고 등을 돌렸다.
***
흔적, 아니, 서정연은 그 후로 이틀간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카페는 물론이고 게임에도 접속하지 않았는지 내가 일휘일비에게 보낸 친추 요청이 계속 보류된 상태였다.
어나더 길드 쪽도 조용한 건 마찬가지였다. 하긴, 아무리 가짜라고 해도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누군가를 따라 해야 하는 처지라면 더더욱 말이다.
나는 나대로 바쁜 이틀을 보냈다. 임소희가 맡긴 디자인 일과 카페 알바를 병행하고 남는 시간에 아크까지 하려니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그렇게 사흘째 되는 날 밤이었다. 알바를 쉬는 날이라 디자인 작업에 열중하고 있던 나는 핸드폰 진동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으으…….”
몇 시간을 모니터만 집중해서 들여다봤더니 피로가 장난 아니었다. 뻐근한 몸을 스트레칭하며 잊고 있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왜 메시지를 안 보냐?]
받자마자 상기된 목소리로 대뜸 본론부터 던지는 말에 눈가를 찌푸렸다. 전화를 건 상대는 마하였다. 근데 갑자기 무슨 메시지?
“나 일하느라고 바빴어. 뭔데?”
[하… 당장 들어와.]
뚝. 전화가 끊겼다. 통화가 종료된 핸드폰 화면을 어이없이 쳐다보다가 메시지 어플을 켜 봤다. 확실히 메시지가 100개가 넘게 쌓여 있긴 한데.
길드원들이 게임 밖에서도 메시지 어플을 통해 자주 수다를 떨어서 길드 단톡방의 메시지가 쌓이는 건 종종 있던 터라 딱히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고 내용을 살피다가 표정을 굳혔다.
“뭐야.”
어나더 길드가 어쩌고 어째? 빠른 속도로 쌓인 메시지를 훑어본 나는 급히 프로그램을 끄고 아크로드에 접속했다.
낭만이 가득한 모험, 아크 로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길드] 류페: 오오
[길드] 여여랑: 오셨다ㅠㅠㅠㅠㅠ
[길드] 야옹이라옹: 왤케 늦엇쏘요 ㅇㅅ'ㅇ
나를 반기는 길드 채팅을 무시하고 세이브 포인트 이동부터 했다. 어차피 웬만한 놈들은 다 거기 가 있을 테니까.
화면이 전환되자 화사하고 밝은 도시 배경이 사라지고 어둡고 맵 곳곳에 새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는 기계들이 가득한 배경이 나타났다. 스팀펑크 컨셉인 자칸 도시의 레이드 입구 앞이었다.
유저들 사이로 우리 길드의 길드원과 어나더 길드의 길드원들이 보였다. 바닥에 쓰러져 죽어 있는 내 길드원들을 하나하나 살핀 나는 입매를 비틀었다.
‘이 좆같은 새끼들이…….’
마하가 전화까지 하면서 나를 부른 이유는 어나더 길드와의 충돌 때문이었다.
다만 예전처럼 인원수를 철저하게 맞춰서 정식으로 진행하는 길드 PVP가 아닌, 한쪽의 시비로 이뤄진 PK에 가까운 충돌이었다.
레이드를 클리어하고 나오는 우리 길드원들과 마주친 어나더 길드원들이 먼저 시비를 걸어왔다. 그걸 무시하고 다음 레이드를 가려는 우리 길드원들에게 대뜸 선 공격까지 했고. 마하가 보내 준 동영상에 모두 찍혀 있었다.
[전체] 영화별론가: 일욜님~ㅠㅠ
[전체] 좋은날씨: ㅠㅠㅠㅠㅠ
[전체] sky004: 서럽ㅠ
[전체] 아스타로트: 진짜 오ㅅ
[전체] 아스타로트: 아 **
[전체] 아스타로트: 채팅치는데 쳐때리고 **
[전체] 야옹이라옹: 저 **들이 우리 막 때림!ㅠ
나는 길드원들의 파티에 즉시 들어가서 상대편의 닉네임을 훑어봤다. 당연하게도 ‘heunJeok’은 없었다. 노퓨쳐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다 처음 보는 닉네임이었다. 1년간 어나더 길드와 싸워 온 만큼 그 길드의 멤버들을 나도 대충은 알고 있는데, 익숙한 닉네임이 하나도 없다면…….
‘이번에 새로 가입한 놈들인가.’
노퓨쳐와 가짜 흔적이 뽑은 놈들이 이렇게 대놓고 비매너 행동을 한다는 건 우리 요일 길드에 보내는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싸가지 없는 새끼들. 차갑게 웃으며 무기를 꺼내 들었다.
[파티] 오늘은일요일: 위치잡아
내 채팅을 본 길드원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각자의 위치로 갔다. 내가 오기를 기다리며 얌전히 죽어 있던 놈들도 재빨리 제자리 부활로 일어나서 포션을 빨며 제 위치로 갔다.
우리 쪽은 여섯 명. 상대는 아홉 명. 숫자가 부족하지만 상관없다. 그동안 맞춰 온 호흡은 고작 이 정도 차이로 흔들릴 리가 없으니까. 만약 흔들린다 해도 내가 부족한 세 명분의 대미지를 넣으면 된다.
[전체] Opokjs: 처맞고 길마 부른거임?ㅋ
[전체] 반숙올챙이: 안쪽팔리냨ㅋㅋㅋㅋㅋ
[전체] 인천구비둘기: ㄹㅈㄷ
[전체] 오늘은일요일: 먼저 시비털어놓고 뭐이리 불만이 많아...
[전체] 오늘은일요일: 왜? 길마 오니까 쫄았음?
[전체] 오늘은일요일: 그럼 니들도 복귀했다는 잘난 길마 부르세요
[전체] kumayoung: ㅋ
[전체] 미녀사냥꾼: 가오잡는거 무섭누ㅋ
[전체] zang2213: 시비턴 증거라도 있음?ㅋㅋㅋ 1위길드 횡폐 지리고
[전체] 오늘은일요일: 응 증거있어~
[전체] 오늘은일요일: 그러니까 이제 니들 두1지게 팰거야
더 말씨름하는 것도 귀찮았다. 버프 스킬을 켜고 빠르게 달려가 제일 선두에 선 놈에게 봉을 휘둘렀다. 빠각, 타격음과 함께 붉은 빛이 번쩍였다.
공격이 제대로 들어갔는지 상대의 체력이 훅 줄어들었다. 어림잡아 3분의 1이 줄어들었으니 이렇게 세 번 더 맞으면 죽을 거다. 본인의 생각보다 훨씬 강한 대미지였는지 처맞은 놈이 화들짝 놀라며 허겁지겁 뒤로 도망쳤다.
‘어딜.’
한 명을 죽이고 시작하면 그만큼 우리에게 이득이었다. 도망치는 상대를 쫓는 내 뒤로 길드원들도 빠르게 스킬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여러분들을 수호하겠습니다!】
【즐거운 사냥 시작이군.】
홀리나이트인 스카이의 방어력 버프 스킬에 이어서 인파이터인 아스타로트가 나를 막아서는 놈의 멱살을 붙잡아 바닥에 패대기쳤다. 옆에 있던 건슬링어인 영화별론가도 나를 도왔다.
홀리나이트의 버프로 높아진 방어력과 길을 터 주는 인파이터, 건슬링어 덕분에 막힘없이 목표를 따라잡은 나는 아예 돌진기로 거리를 완벽하게 좁히는 동시에 공격까지 성공했다. 앞으로 쏘아진 봉에 복부를 얻어맞은 적의 체력이 이젠 절반 아래로 뚝 떨어졌다.
더는 도망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상대도 차라리 공격을 선택했는지 들고 있던 검을 휘둘렀다. 그거까지 이미 예상한 나는 카운터 스킬로 공격을 흘려 내며 마지막 반격을 가했다.
[끄으윽!]
내 계산대로 완벽하게 세 번 맞은 적이 쓰러졌다. 채팅으로 나한테 가오 잡느니 어쨌느니 비꼬던 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