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은 내친김에 종탑까지 데려다줄 작정인지 말을 멈추지 않고 계속 움직였다.
어차피 목적지는 똑같았으니 나야 나쁠 건 없었다. 말에서 내리지 않고 화면을 돌리며 주변 상황을 살펴봤다.
‘이 마을은 유저가 꽤 많네.’
아무래도 세 번째 줄에 적힌 ‘개가 늑대로 보이는 시간으로’ 부분 때문이겠지.
첫 번째와 두 번째 힌트를 해석하지 못하더라도, 세 번째 힌트가 해 질 녘과 관련이 있다는 건 쉽게 알 수 있으니까. 노을이 진 마을은 두 군데밖에 없으니 사람이 몰릴 만했다. 같은 이유로 종탑 근처에도 유저들이 우글우글했다.
[파티] 오늘은일요일: 야
[파티] 오늘은일요일: 정말 여기 맞는거야?
[파티] heunjeok: 아마?
[파티] heunjeok: 저도 여기까지 온건 지금이 처음이라서요
[파티] heunjeok: 근데 야라니...
[파티] heunjeok: 호칭이 너무 정없는거 아니에요?
[파티] 오늘은일요일: 욕 안한걸 고마워해라
나 참. 있는 대로 잘난 척을 하더니 본인도 제대로 모르는 거였잖아.
그사이에 종탑에 도착한 우리는 말에서 내렸다. 역시나 탑 입구 앞은 보물을 찾기 위해 모인 유저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불안한데.’
이만한 사람들이 몰렸으면 보물은 진작 털리고도 남았을… 어?
“뭐야, 이거.”
종탑에 들어가기 위해 문을 클릭한 나는 화면 중앙에 뜬 메시지 창을 발견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들어가기 위해서는 암호를 입력하시오…라고? 미친. 이럴 줄 알았다.
[파티] heunjeok: 문제 있어요?
[파티] 오늘은일요일: 암호를 입력하래
[파티] 오늘은일요일: 암호가 뭔지 알아?
내 뒤를 따라 종탑 문 가까이로 걸어온 흔적도 메시지 창을 발견했는지 난감한 기색으로 말했다.
[파티] heunjeok: 암호라
[파티] heunjeok: 글쎄요?
[파티] heunjeok: 모르겠는데요?
[파티] 오늘은일요일: ㅡㅡ
[파티] heunjeok: 어쩔 수 없죠 저도 여긴 첨 와본거니까
이래서 유저들이 종탑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던 건가. 아마 다른 마을의 높은 건물도 다 이런 식으로 비슷하게 막아 놨을 것이다. 일이 복잡하게 됐다.
우선 암호 창에 아무거나 써 넣었다. 숫자와 한글은 입력되지 않았다. 유일하게 입력이 되는 건 영어뿐이었다.
‘그럼 암호 답도 영어 중에 하나라는 거네.’
힌트에는 암호와 관련된 이야기는 하나도 없었다.
그건 즉, 앞서 나온 힌트를 보면 암호도 알 수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힌트 창을 열어서 내용을 다시 한번 읽어 봤다.
「12, 3, 6, 9
ㄱ
개가 늑대로 보이는 시간으로
가장 높은 곳에」
첫 번째 줄의 숫자는 시계를 의미하는 거였고. ㄱ은 섬의 지도를 시계에 맞춰서 돌려서…….
‘잠깐, 시계를 돌려?’
입가를 매만지며 열심히 고민하던 그때였다. 머릿속에 빛이 번쩍하더니, 암호의 답으로 추정되는 단어가 떠올랐다.
‘…그래서 영어밖에 입력이 안 되는 거였어.’
내가 생각한 답이 맞다면 영어만으로도 충분하니까.
[파티] heunjeok: 알아냈어요?
내 곁에 얌전히 서 있던 흔적이 기다렸다는 듯이 물어 왔다. 하여간 눈치는 빠르다니까.
[파티] 오늘은일요일: 그래
[파티] heunjeok: 뭔데요?
[파티] 오늘은일요일: 시계를 생각하면 쉬워
[파티] 오늘은일요일: 근데 이번에는 로마 숫자가 아니라
[파티] 오늘은일요일: 아라비아 숫자로
나는 내가 떠올린 답을 암호 창에 적었다.
그 후에 엔터 키를 누르자 철컥, 잠금이 풀리는 소리와 함께 화면이 까맣게 암전됐다. 종탑 안으로 들어가면서 로딩 창으로 전환된 것이다.
로딩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자 까맣게 물들었던 화면이 천천히 밝아졌다. 새하얀 대리석 벽과 위로 올라가는 계단, 꼭대기에 달린 종과 연결된 기계 장치가 보였다. 무사히 종탑 안으로 들어온 걸 확인한 그 순간, 하늘색 캐릭터가 종탑 안으로 들어섰다.
[파티] heunjeok: 오
[파티] 오늘은일요일: ?
[파티] 오늘은일요일: 어떻게 들왔냐
[파티] heunjeok: 쉽던데요?
일부러 답을 알려 주지 않은 건데, 별 소용이 없었구만.
암호의 답은 바로 영어 ‘b’였다. 숫자 9를 오른쪽으로 돌리면 영어 b가 되고, 그 위치가 바로 여기 종탑이 있는 마을이었으니까. 힌트에 적혀 있는 시계를 해석하지 못하면 여기 암호도 풀 수 없는 거다.
‘그보다 흔적이 이렇게 빨리 암호를 누르고 들어올 줄은 몰랐어.’
아무리 내가 시계와 관련 있다고 말해 줬다고는 해도 이렇게 빨리 답을 떠올리다니. 애초에 그 거지 같은 힌트를 금방 풀어 낸 것도 그렇고… 만만치 않은 놈이라니까.
에휴, 한숨을 내쉬며 먼저 계단으로 올라갔다. 보물은 가장 높은 곳에 있다고 했으니 탑 꼭대기까지 올라가야 할 거다.
[파티] heunjeok: 근데 일욜님
[파티] heunjeok: 펫 일욜님이 가질거죠?
[파티] 오늘은일요일: ?
나를 쫄래쫄래 쫓아오던 흔적이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당연한 거 아닌가? 이 자식이, 설마 이제 와서 마음이 변한 건 아니겠지?
[파티] 오늘은일요일: 나 가지라며?
[파티] heunjeok: 그치만요
[파티] heunjeok: 제가 이만큼 도와줬는데
[파티] heunjeok: 머 아무것도 없나해서요ㅎ
[파티] 오늘은일요일: ㅇ없어
[파티] heunjeok: 그러지 말구요
[파티] heunjeok: 펫 이름을 저랑 관련된거로 해주는건 어때요?
[파티] 오늘은일요일: 너처럼 재수없는 놈 이름을?
[파티] 오늘은일요일: 귀여운 펫한테 미안하지도 않냐?
[파티] heunjeok: 너무해요ㅠ
흔적과 쓸데없는 채팅을 주고받으며 오르다 보니 금세 꼭대기에 도착했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황금색 커다란 종 아래에 낡은 종이 상자가 놓여 있었다.
상자에 가까이 다가간 내가 그걸 열기 직전, 시스템 메시지가 띠링 떴다.
파티원 heunjeok 님이 파티를 나가셨습니다.
상자를 발견했을 때부터 내게서 거리를 벌리고 있던 흔적이 아예 파티까지 나갔다. 이 거리에서 상자를 선수 치는 건 불가능하고. 녀석의 의도를 바로 알아채고 물었다.
[전체] 오늘은일요일: 무슨 펫인지 보지도 않고 가려고?
[전체] heunjeok: 보물이 있는걸 봤으니 충분해요
[전체] heunjeok: 제 이름이 들어갈 펫은 다음번 전쟁때 볼게요
[전체] 오늘은일요일: 안한다니까;
[전체] heunjeok: ㅋㅋㅋㅋㅋㅋ
흔적이 종탑 난간 가까이에 붙어 섰다. 길게 내려온 하늘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부드럽게 흐트러졌다.
[전체] heunjeok: 그럼 먼저 갈게요
[전체] heunjeok: 펫 잘 얻으시고
‘이거 고맙다고 인사를… 해야 하나?’
어쨌든 흔적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텐데. 갈등하는 나를 두고 흔적은 미련 없이 훌쩍 떠나갔다.
[전체] heunjeok: 이따가 너무 화내지는 말고요^^
[전체] 오늘은일요일: 뭐?
의미를 알 수 없는 말 한마디를 남겨 두고.
녀석은 도시 세이브 포인트로 이동했는지 깔끔하게 사라졌다. 텅 빈 종탑을 둘러보다가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나타나는 것도, 사라지는 것도 아주 제멋대로네.
찝찝한 마음을 뒤로하고 상자를 열어 봤다. 파앗, 노란빛이 퍼지며 상자가 열리더니 그 안에서 작은 동물이 뿅 튀어나왔다.
먀아옹!
서버마다 딱 한 명만 얻을 수 있다던 펫은 다름 아닌 작은 고양이었다. 상점 페이지에서 살 수 있는 갈색의 고양이가 아닌, 검은색과 흰색이 적절하게 섞인 턱시도 고양이에 목에는 나비넥타이까지 매고 있었다.
‘얼씨구. 무슨 탐정이냐?’
헛웃음을 흘리며 고양이를 쓰다듬는 모션을 눌렀다. 그러자 빠방, 어딘가에서 팡파르 터지는 경쾌한 소리가 울리며 화면 상단에 전 서버에 알리는 공지가 떠올랐다.
[축하드립니다! 세크레타 서버에서 보물이 발견되었습니다!]
[길드] 류페: ??????
[길드] 마하: 뭐야 우리 서버?
[길드] 저6천원있어요: 헤엑 벌써 찾았다고?
[길드] 불좀켜줄래: ㄹㅇ대박이다
[길드] sky004: 힌트 하나도 모르겟던데 어케 찾은거지?
[길드] 아스타로트: 이거 위치 서버 통합이져?
[길드] 아스타로트: 1빠로 찾은 사람이 위치 알려주면 다른 서버 난리나겟네ㄷㄷ
[길드] 마하: 전쟁날듯ㅋㅋㅋㅋㅋ
[길드] 여여랑: 근데 진짜 어디지?
[길드] 좋은날씨: 뭐 노을이랑 관련된 장소 같긴 하던데
아주 요란한 축하 인사였다. 커다랗게 띄워진 붉은 글씨의 서버 메시지와 길드 채팅창을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찾았다는 걸 들키면 귀찮아지겠는데.’
아무한테도 알리지 말고 조용히 있어야겠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다른 서버에서도 발견한 사람이 나올 테니까.
아옭, 앵!
새로 얻게 된 고양이가 내 캐릭터 앞에 발라당 누워서 애교를 피워 댔다. 뭐, 귀엽긴 하네.
그래도 공짜로 펫을 얻게 된 건 좋았다. 어디서도 살 수 없는, 서버마다 딱 한 명만 얻을 수 있는 펫이라니. 흔적이랑 돌아다닌 보람이 있다. 그렇게 생각하며 뿌듯하게 웃던 그때였다.
[서버] heunjeok: 님들 보물 찾은 사람 요일 길드 길마래요! ^▽^
[서버] heunjeok: 일욜님 다음 전쟁때 오늘 얻은 펫 꼭 보여줄거죠? 무슨 펫인지 넘 궁금^^
[서버] heunjeok: 그럼 좋은 하루♡
“뭐, 무슨……!”
기겁한 내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메시지가 미친 듯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친구 추가 요청 메시지와 파티 요청, 길드 채팅, 귓속말로 화면이 단번에 난리가 났다.
[길드] 마하: ??????
[길드] 좋은날씨: 뭐야??
[길드] 저6천원있어요: 일욜님 ㄹㅇ이에요?
[길드] 불좀켜줄래: 진짜얻음???
[길드] 여여랑: 헐헐헐 대박ㅠㅠ
[길드] 여여랑: 펫 뭐에요????
[길드] 여여랑: 저도 볼래요!!!!
[길드] 울팀인성봐조인성: 와씨 일욜님 완전 배신이야
[길드] 아스타로트: 펫 머임?
[길드] 마하: 아니근데..
[길드] 마하: 저걸 왜 흔적이 알고 잇는..?
“이 미친놈이!”
시발! 나는 그제야 흔적이 사라지기 직전에 했던 화내지 말라는 채팅의 의미를 깨닫고서 이를 뿌득 갈며 확성기를 사용했다.
[서버] 오늘은일요일: ***가 너 진짜 ***싶냐?
[서버] heunjeok: ㅋㅋㅋㅋㅋㅋㅋ ^.^
흔적에게 보기 좋게 당하자 주먹이 절로 부들부들 떨렸다. 아까 도망가는 꼴을 봤을 때 눈치챘어야 했는데!
먀앙!
화면이 꽉 찰 정도로 밀려드는 메시지 창 사이로 턱시도 고양이가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흘렸다.
***
딸랑, 문을 열자 발랄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좋은 아침.”
“안녕하세요.”
마침 카운터에 있던 사장님이 내게 인사를 건네 왔다.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참았던 하품이 터져 나왔다. 그런 나를 본 사장님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잠을 못 잤어? 엄청 피곤해 보이네.”
“음, 조금요.”
뻐근한 눈을 손으로 꾹 누르며 대답했다.
어제, 새벽 늦게까지 레이드를 한 데다 꿈도 이상한 걸 꿔서 그런지 영 피곤했다.
‘이제는 꿈에서도 아크를 하냐고.’
하필 예전에 흔적과 같이 보물을 찾았던 때가 꿈으로 나와서 더 어이없었다. 왜 갑자기 흔적이 나오는 꿈을 꾼 거지? 그 뉴비 때문인가.
“참, 해준아. 혹시 이따가 단골손님 오시면 서비스로 이 쿠키 좀 전해 줄래?”
“단골손님이요?”
“왜, 그 있잖아. 얼굴 조막만 하고 엄청 예쁘게 생긴 남자 손님.”
아아. 이어지는 설명에 단골손님이 누군지 바로 떠올렸다. 새까만 머리카락 아래로 보이던 하얀 얼굴. 확실히… 이틀 동안 오지 않았으니 오늘은 올 가능성이 컸다.
어려운 일도 아니었으니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