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이 갑자기 계정을 삭제하고 사라진 뒤로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녀석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매일같이 싸우던 상대가 하루아침에 사라졌는데 당연한 거 아닌가. 눈만 마주치면 싸웠지만 어쨌든 그것도 교류는 교류니까. 그리고 흔적이 나타나면서 지난 1년간 내 게임 인생이 참 즐거웠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더욱 이 상황이 불편하고 짜증 났다. 나와 싸우던 놈은 어디로 가고 사칭하는 놈들이 계속 나타나는 건지. 일휘일비야 내가 멋대로 오해한 거라 쳐도, ‘heunJeok’ 닉네임을 달고 나타난 놈은 사칭 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부길마까지 등에 업고 아주 제대로 사기를 치고 있어, 빡치게.’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괘씸했다. 명색에 부길마라는 놈이 저러면 좋은가? 가짜를 내세우면서까지 흔적이 돌아왔다고 시끄럽게 구는 이유가 뭔데? 망해 가는 길드를 살리려고?
흔적이 없다고 망할 길드면 차라리 쫄딱 망하는 게 나았다. 성질이 나서 잔을 닦는 손길이 자꾸만 거칠어졌다.
‘이 난리가 났는데 흔적, 이 망할 놈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부길마가 자기 뒤통수를 치고 남을 사칭으로 세워 놓은 걸 알기나 할지 모르겠다. 그도 아니면, 정말로… 아크로드를 접은 건가?
재미없어서 게임을 접거나 갈아타는 건 이해할 수 있지만, 그럼 그렇다고 한마디 설명이라도 하고 꺼졌어야지. 왜 하필 나한테 지고 나서 계삭 하고 튄 건데? 사람 찝찝하게!
“그, 음… 해준아? 잔 깨려고 그러는 건 아니지?”
격하게 설거지를 하는 내 곁을 힐끔거리던 사장님이 결국 걱정스러운 말을 건넸다. 겨우 정신을 차린 나는 깨끗하게 닦은 잔을 거치대에 올려놓으며 머쓱하게 웃었다.
“죄송해요. 다른 생각을 하다가.”
“안 깼으면 됐지.”
다행히 사장님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듯했다.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물을 끄고 젖은 손을 닦았다. 열불이 나서 새벽에 잠도 설쳤는데, 일하러 와서까지 이 난리라니. 좀 침착해질 필요가 있었다.
딸랑.
타이밍 좋게 종이 울리며 새 손님이 들어왔다.
오늘따라 손님이 적어서 잡생각도 그만큼 더 들었던 터라 손님의 존재가 제법 반가웠다. 급히 주방 밖으로 나가서 카운터 앞에 선 나는 웃는 얼굴 그대로 굳었다.
“안녕하세요.”
“…….”
단골손님이 마주 웃으며 인사를 보내왔다.
나한테 핸드폰 번호 달라고 말했다가 까인 게 바로 어제인데, 참 뻔뻔하기도 하다. 얼굴이 잘생겼을뿐만 아니라 두껍기까지 했구나.
“어서 오세요. 주문하시겠습니까?”
“아이스 아메리카노랑, 음…….”
잠시 뜸을 들이던 남자가 나와 시선을 맞췄다.
“복숭아 아이스티요.”
커피뿐만 아니라 음료까지? 오늘은 케이크를 안 먹는 건가?
궁금했지만 굳이 아는 척하고 싶진 않아서 조용히 포스기만 두드렸다. 카드로 계산을 마친 후에 진동 벨과 함께 돌려주자, 그걸 건네받으며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도해준 씨.”
“네?”
이 자식은 나랑 친구라도 먹었나. 이름을 막 부르네. 단골손님이니까 뭐라고 할 수도 없고.
“지금 바쁘세요?”
바쁘냐고? 본능적으로 불길함을 느낀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바쁘죠.”
“그래요? 매장에 손님이 한 명도 없는데.”
“아까까지 많았어요. 그래서 설거지도 쌓여 있고, 청소도 해야 합니다.”
“그거 다 지금 해야 하나요?”
“…왜 그러시는데요.”
“괜찮으면 잠깐 시간 좀 내 줬으면 해서요.”
“…….”
이 사람이 정말 미쳤나 보다. 짜게 식은 눈으로 쳐다보자 남자가 미소 띤 얼굴을 살짝 기울였다.
“다시 말하지만 저 게이 아니에요.”
“압니다.”
“또 의심하시는 것 같아서.”
그건 맞긴 하지만, 솔직히 남자가 자꾸 핸드폰 번호 달라고 하고 시간 좀 내 달라고 하는데 어떻게 오해를 안 할 수가 있나.
아무튼 남자와 대화하고 싶은 마음이 없으니 재차 거절하려던 그때였다.
“해준아, 해준아.”
주방 쪽에서 고개를 빼꼼 내민 사장님이 내게 손짓했다. 뭔가 싶어서 사장님께 다가가자 그녀가 소리 낮춰 속삭였다.
“그러지 말고 다녀와.”
“네?”
“계속 찾아오잖아. 차라리 제대로 자리 만들어서 확실하게 거절하는 게 편하지 않겠어?”
아무래도 사장님은 저 남자가 게이고, 내게 치근덕거리는 거로 완벽하게 오해한 모양이다. 생판 남이니 오해받든 말든 나랑 상관없었지만, 사장님의 제안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그래, 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싶어서 저러는 건지 듣고 나서 거절하는 게 확실히 낫겠다. 고민 끝에 결정을 내린 나는 사장님께 양해를 구했다.
“그럼 10분 정도만 다녀오겠습니다. 죄송해요.”
“네가 고생이 많다.”
사장님이 쿨한 성격이라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한숨을 내쉬며 로스터기 앞으로 갔다. 일단 주문 들어온 커피부터 만들자.
***
남자가 주문한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복숭아 아이스티를 트레이에 담고 테이블로 향했다.
오늘은 노트북을 가져오지 않았는지, 자리에 앉은 채로 통창 너머 매장 밖을 바라보던 남자가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주문한 커피와 음료입니다.”
다소 거칠게 트레이를 내려놓으며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눈을 깜빡이며 나와 테이블 위를 번갈아 보던 남자가 빙긋 미소 지었다.
“대화해 주시는 건가요?”
“두 번은 없으니까 할 말 있으면 지금 다 하고 가세요.”
마음 같아선 ‘꺼지세요’ 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손님이니 참았다. 남자는 트레이 위에 올려진 커피잔을 들어 자신의 앞에 놓고 복숭아 아이스티는 내 앞에 놔 주었다.
“도해준 씨 음료예요. 어제 보니까 커피보단 티를 선호하는 것 같던데.”
“제 이름도 어제 들은 겁니까?”
“맞아요. 그 부분도 설명하려고 했는데 눈치채셨네요.”
역시 그렇군. 남자가 놔 준 복숭아 아이스티를 한 모금 마셨다. 사 준 사람은 짜증 나지만 음식에는 죄가 없으니까. 내가 만들기도 했고.
“그래서, 하려는 말이 뭐죠?”
“음…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저도 감이 잘 오지 않네요. 일단 제 이름부터 말할까요? 저만 도해준 씨 이름을 알고 있는 건 불공평하니까.”
“네, 뭐.”
관심 없다는 티가 팍팍 담겨 있는 대꾸에도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기색으로 말했다.
“내 이름은 서정연이에요. 마음대로 편하게 부르세요.”
부를 일 없을 텐데.
“이미 짐작하겠지만, 사실 어제 도해준 씨가 지인분과 대화하는 걸 들었어요. 들으려고 들은 건 아니고, 자리가 가깝다 보니 어쩔 수 없었네요.”
그거까진 나도 이해한다. 먼저 자리에 앉아 있던 건 서정연이었고, 나와 임소희가 뒤늦게 뒷자리에 앉은 거였으니까.
“그래서 결론만 말하자면… 도해준 씨.”
“네.”
“아크로드 하죠?”
“네… 네?”
서정연의 말을 심드렁히 듣던 나는 한 박자 늦게 화들짝 놀랐다.
내가 지금 잘 못 들은 거 아니지? 워낙 건성으로 듣고 있던 탓에 확신이 들지 않았다.
“요일 길드의 길마고?”
“아니, 그걸 왜 묻…….”
“닉네임은 혹시 ‘오늘은일요일’?”
“……잠깐만.”
당황한 와중에도 무언가 이상한 걸 깨달았다.
‘어제 임소희랑 대화하면서 내가… 닉네임을 말한 적이 있던가? 길드 이름만 말했을 텐데?’
가슴속이 순식간에 차갑게 식으면서 몸에 소름이 끼쳤다. 설마 이 사람…….
“흐음.”
내 반응을 조용히 지켜보던 서정연이 팔짱을 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사락, 결 좋은 검은색 머리카락이 그 몸짓에 따라 부드럽게 흔들렸다.
“맞나 보네요. 현실성이 하도 없어서 저도 쉽게 믿진 못했거든요.”
“이 얘기를 하려고 부른 겁니까? 내가 하는 게임과 닉네임을 알고 있다고?”
“그렇긴 한데, 다른 용건도 있어요. 정확히는 어제부로 용건이 생긴 거죠.”
다른 용건이라니. 아크로드를 괜히 언급했을 리 없으니 용건도 게임과 관련된 것일 텐데. 서정연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어서 눈가를 찌푸렸다.
“그 용건이 뭔데요.”
“요즘 게임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유저 한 명이랑 친해지지 않았어요?”
“…그렇다면?”
“제가 그 유저예요. 일휘일비.”
“…….”
충격으로 딱딱하게 굳은 나를 두고 서정연이 눈꼬리를 길게 접으며 이어 말했다.
“그리고 흔적도 나고.”
나는 입을 다문 채 웃고 있는 서정연의 얼굴을 응시했다. 귓가에 방금 들은 말이 계속해서 메아리쳤다.
흔적도 나고, 나고, 나고…….
‘이 남자가… 흔적이라고?’
그리고 일휘일비도 흔적이고?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경악할 이야기에 머리가 녹슨 것처럼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건 말이 안 된다. 어떻게 내가 알바하는 카페의 단골손님이 흔적이고, 그 흔적이 내가 게임하는 걸 우연히 들어서 이렇게…….
“…….”
차갑게 식은 가슴속에서 뜨거운 감정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힘이 들어간 주먹이 새하얗게 질려서 덜덜 떨렸다.
“이…….”
“알아요, 많이 놀란 거. 저도 그랬거든요. 웬만하면 천천히 설명하고 싶었는데 어제 사칭… 컥!”
“이 개자식아!”
나는 결국 해일처럼 들이닥치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서정연의 멱살을 거칠게 잡아 버렸다. 덜컹, 우리 사이에 낀 테이블과 잔이 크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