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년 동안 어나더 길드와 하도 많이 주고받아서 그런지, 신청서는 눈감고도 쓸 수 있을 만큼 익숙했다. 마음먹으면 1분도 안 걸릴 만큼 빠르게 채울 수 있었지만 유진호가 길드 채팅을 진정시킬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일부러 느긋하게 작성했다.
설렁설렁 신청서를 채워서 접수하고 게임 화면으로 돌아오자 내 예상대로 어느 정도 진정되어 있는 길드 채팅 창과 서정연이 따로 보낸 개인 메시지가 와 있었다.
일휘일비: ㅋㅋㅋㅋㅋㅋㅋㅋ
일휘일비: 착한 부길마 둬서 좋겠네요^^
귀찮고 번거로운 일은 유진호에게 은근슬쩍 떠넘기는 내 기술이 꽤 인상적이었는지 서정연은 드물게 ‘ㅋ’을 길게 써 가면서까지 감상을 남겼다.
오늘은일요일: 이게 연륜이야
오늘은일요일: 너같은 바지사장한테는 없는거지
일휘일비: 하ㅋㅋㅋ
일휘일비: 솔직히 이건 인정할게요 실력이 기가막히네
일휘일비: 부길마가 욕 엄청 하던데 봤어요?
오늘은일요일: 욕만 한줄 알아?
오늘은일요일: 핸드폰 터지는줄 알았다
일휘일비: ㅋㅋㅋㅋㅋㅋㅋ
내 말에 서정연이 또 신나게 웃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기분 좋아 보이는 건지 모르겠다.
[길드] 불좀켜줄래: 그니까 정리하자면
[길드] 불좀켜줄래: 어나더 길드 요즘 *같아서 기강 함 씨게 잡으려고 하는거다
[길드] 불좀켜줄래: 이거 맞음?
[길드] 오늘은일요일: ..?
[길드] 마하: ㅇ
[길드] 오늘은일요일: 어? 그게 그렇게 되는거임?
[길드] rxrx78: 아니야?
[길드] 아스타로트: 뭐가 맞는거야
[길드] 오늘은일요일: 아냐
[길드] 오늘은일요일: 맞는거같아
다만 이 방법에는 한 가지 단점이 있었다.
유진호가 설명해 주기 귀찮아서 대충하거나 지나치게 축약하면 그게 진짜가 된다는 거였다. 그래도 성하연처럼 이상한 헛소문을 퍼뜨리는 건 아니었으니 그러려니 넘어가야겠다.
[길드] sky004: 하;;;
[길드] sky004: 드디어 이날이 왔구나
[길드] sky004: 다뒤졌다 어나더
[길드] 류페: 레이드 공팟에서 쫓겨난 설움을 이제서야 갚아주는구나
[길드] 저6천원있어요: 이기는쪽이 정의다 ㅇㅈ?
[길드] 영화별론가: 다뒤져따
[길드] 야옹이라옹: 나도 저번에 공팟 드갔는데 어나더 잇다구 쫓겨남ㅠㅡㅜ...
[길드] 야옹이라옹: 다주겨버려 ㅇ"ㅅ"ㅇ
[길드] rxrx78: 슬슬 한대 줘팰때 됐지ㅋㅋ
[길드] 류페: 근데 님드라 지금 어나더 길마 가짜라고 하지 않았어여?
[길드] 류페: 길전 거절하면 어캄?
[길드] 아스타로트: 헐 거절하려나
[길드] 울팀인성봐조인성: 에이 가오가 있지 이걸 거절하면ㄷㄷ
[길드] sky004: 제발 가오챙겨 제발제발
[길드] 영화별론가: 복수 악귀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오늘은일요일: ㄴㄴ거절안할거임
때마침 내가 넣은 신청서가 정상적으로 접수 처리되면서 화면 상단에 붉은 글씨로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요일 길드가 Another 길드를 상대로 길드 전쟁을 선포하였습니다!
오랜만에 보는 전쟁 선포 메시지였다.
이제 어나더 길마와 부길마에게 전쟁을 알리는 시스템 알림이 갔을 거다. 알림을 받은 길마와 부길마는 사흘 내로 협의를 끝내고 전쟁을 할지 말지 결정을 내려야 한다. 그 결정 또한 시스템 메시지로 공표된다.
[길드] 오늘은일요일: 머 쫄리는게 있어서 거절하면
[길드] 오늘은일요일: 받을 때까지 계속 날려야지ㅎㅎ
[길드] rxrx78: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오늘은일요일: 길전 신청 자체는 제한이 없으니까ㅎ
[길드] 영화별론가: 길전 악귀 그 자체ㅋㅋㅋㅋㅋㅋㅋ
[길드] sky004: 전 일욜님 응원합니다
[길드] sky004: 필드에서 마주치는 어나더마다 싸가지 ** 없어서 안그래도 길전하고 싶었음ㅡㅡ
[길드] 류페: 쩝
[길드] 류페: 시비 오지게 걸긴 하는데 이젠 걍 무시함
[길드] 저6천원있어요: ㄹㅇ상대하는것도 하루이틀이지 이젠 힘듬
[길드] 저6천원있어요: 지금 몇주째 우리만보면 거품무는데
[길드] 저6천원있어요: 솔직히 저 체력이 부러울 지경
[길드] rxrx78: 어나더가 진짜 만렙이기만하면 다 받아준다잖아요
[길드] rxrx78: 그거때매 연령층도 엄청 낮고 이상한애들 많다고 욕 겁나먹음
[길드] 영화별론가: ㄹㅇ웃긴게
[길드] 영화별론가: 우리 사사게에서 선시비 털었다고 욕먹을때 걍 가만히 있었더니
[길드] 영화별론가: 어느샌가 어나더 욕으로 바껴있음ㅋㅋ
[길드] 오늘은일요일: ?
[길드] 오늘은일요일: 그래요?
[길드] 아스타로트: ㅇㅇ저거 찐임
[길드] 아스타로트: 어나더가 워낙 전방위로 똥싸대서
[길드] 저6천원있어요: 걍 어그로 될만한 놈들 싹 긁어감
[길드] 저6천원있어요: 이번에 뭐냐 만렙 잡은 뉴비팟인가 걔네도 어나더 갔더만요
음. 우리 파티를 말하는 거군.
우리도 애초에 그런 노퓨쳐의 심리를 노려서 일부러 티거 길드의 시비를 무시하지 않고 받아 준 거지만, 이렇게 제3자의 시선으로 설명을 들으니까 기분이 묘해지긴 했다.
[길드] rxrx78: 난 사사게 욕먹는건 노상관임
[길드] rxrx78: 그 찐.따들이 암만 거기서 욕해봤자 직접적인 피해는 안와서ㅋㅋ
[길드] rxrx78: 근데 어나더는 아님.... 이 새.끼들은 직접 피해를 줌 **
[길드] 저6천원있어요: ㅇㅈ
[길드] 저6천원있어요: 근데 숫자가 많은만큼
[길드] 저6천원있어요: 모든 어나더 길원이 다 ㅄ은 아니더라
[길드] 저6천원있어요: 멀쩡한 애들도 있음
[길드] 불좀켜줄래: ㅁㅈ요 신기하게 있음ㅋㅋㅋㅋ
[길드] 불좀켜줄래: 비율로 따지면 한 6:4정도 되는듯 정상이 4
[길드] 야옹이라옹: 정상인데 왜 어나더 길드를 간거지..ㅇㅅㅜ
[길드] 야옹이라옹: 우리 길드를 오징..
[길드] 마하: 길원 모집 닫아둔지 한참이라서ㅋ
[길드] sky004: 우린 뉴페이스 언제 데려와요?
[길드] 마하: ㅁㄹ
새로운 길드원 모집이라. 나도 어나더 길드를 보면서 잠깐 혹하긴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지금은 어나더 길드로 대상이 옮겨 갔다지만 얼마 전까지 사사게에서 신나게 욕먹던 길드였다. 게다가 어나더가 필드든 레이드 공팟이든 우리 길드원을 만나기만 하면 시비를 걸어대는 지금 시점에서 새 길드원을 데려올 수는 없었다.
[길드] 오늘은일요일: 지금은 좀 그렇고
[길드] 오늘은일요일: 어나더 길드 망하면 그때나 열어볼까
[길드] 오늘은일요일: 어나더에 멀쩡한 애들 우리가 흡수하게ㅋㅋ
[길드] 아스타로트: ㅋㅋㅋㅋㅋㅋㅋ
[길드] 아스타로트: 좋은데?
[길드] sky004: 저 ㄱㅊ은 어나더길원 닉 외워놨음;;
[길드] sky004: 나중에 알려드림
[길드] 류페: 헐 저도ㅋㅋㅋㅋㅋㅋ
[길드] 류페: 레이드에서 은근 자주 만남ㅋㅋㅋㅋㅋㅋㅋ
[길드] 오늘은일요일: ㅇㅇ나중에 알려줘
정말 그렇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만약 가능성이 생긴다면 나도 데려오고 싶은 인물들이 몇 명 있었다.
우선 ‘나의라임나무’. 얘는 굳이 내가 데려가려고 안 해도 알아서 유진호를 쫓아서 들어오겠지만… 아무튼. 그리고 어제 같이 레이드를 간 ‘방벽’이나 ‘Rahm’ 유저는 게임 실력도 준수하고 뉴비가 계속 죽어도 이해해 주는 배려심까지 아주 마음에 들었다.
물론 겨우 한 번 같이 게임해 본 거라서 더 지켜봐야겠지만, 6천원이 말한 대로 어나더 길드원이라고 무조건 다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일이 잘못돼도 라임나무는 무조건 데려와야겠다.’
그만큼 실력 좋은 탱커는 데려오면 두고두고 쓸 만할 테니까. 라임나무도 우리 길드에 오고 싶어 했으니 서로 이득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놈이 지금은 어나더에 들어가 있어서 볼수록 한탄만 나오지만.
‘…잠깐, 그럼 이번 전쟁에서 라임나무도 참가하겠네. 애당초 길전에서 나를 죽이려고 어나더에 들어갔다고 했으니.’
오랜만에 서정연과 싸울 생각에 신나서 라임나무를 깜빡했다. 혹시라도 나와 서정연을 방해하면 안 될 텐데. 라임나무를 막아 줄 사람이 한 명 정도는 필요하겠는데.
곧 있을 길드 전쟁을 떠올리면서 열심히 머리를 굴리던 그때였다. 띠딩, 알림음과 함께 게임 화면 상단에 붉은 글씨로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Another 길드가 요일 길드의 전쟁 선포를 받아들였습니다!
[길드] sky004: 오?????
[길드] 류페: ㅁㅊ개빠르네?ㅋㅋㅋㅋㅋㅋ
[길드] 불좀켜줄래: 와 개쿨하게 받네
[길드] 저6천원있어요: 믿고 있었다고 어나더~
[길드] rxrx78: 와씨
적어도 하루 정도는 기다려야 할 줄 알았더니, 예상보다 훨씬 빠르네. 내가 기다리던 소식이 들려오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그래, 이렇게 나와야지.’
미끼를 정확히 물었구나. 나와 서정연이 계획한 대로 정확하게 움직여지는 노퓨쳐와 가짜 흔적에게 고마워서 박수라도 쳐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돌고 돌아 다시 시작된 어나더 길드와의 전쟁. 과연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웃으며 길드원들을 향해 채팅을 쳤다.
[길드] 오늘은일요일: 이번에도 이깁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