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주 수요일, 알바 쉬는 날에 맞춰서 서정연과 약속을 잡은 나는 오후 느지막이 집을 나섰다.
좀 더 일찍 만나서 같이 점심 먹고 해 지기 전에 돌아오려고 했는데, 서정연이 낮에는 일이 있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시간이 조금 밀렸다. 길가에 서서 서정연의 차를 기다리며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자 막 5시가 되어 가고 있었다.
시간을 확인하자마자 타이밍 좋게 서정연이 도착했다. 조수석 문을 여니 발랄하게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망! 왕!
오늘따라 유독 신나 보이는 정이가 뒷자리에서 나를 발견하고 꼬리를 파다닥 흔들었다.
앞발을 번갈아 딛으며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당장 내게 달려와 안기고 싶은데 조수석 의자가 막고 있어서 안달 난 듯했다.
“좋은 오후예요, 도해준 씨.”
“정이도 데려왔네.”
“산책하고 오는 길이거든요.”
그러고 보니 일 끝나자마자 정이 산책시킨다고 했었지. 조수석에 앉아서 안전벨트를 매자 차가 곧바로 출발했다.
거리가 멀지 않은 만큼 30분도 채 걸리지 않아서 서정연의 집에 도착했다. 그래도 이번이 세 번째 방문이라 그런지, 이 널따란 집이 조금은 익숙했다.
“참, 도해준 씨. 저 보여 줄 거 있어요.”
“뭐?”
정이 발이 더러워지지 않도록 품에 안고 거실로 들어온 서정연이 정이를 놔주며 내게 말했다. 정이에게 간식 하나를 입에 물려 준 서정연은 어리둥절한 나를 데리고 2층으로 향했다.
“어제 도해준 씨가 컴퓨터 끄고 나서 저는 잠깐 일을 했는데, 그사이에 저한테 디코 메시지가 왔더라고요.”
“디코 메시지?”
서정연이 안내한 곳은 저번에 함께 게임을 했던 그 방이었다. 두 개의 컴퓨터 중 하나를 켠 서정연이 부계정으로 접속해 있는 디코 메시지를 보여 줬다.
[성하연] 똑똑
[성하연] 해월님ㅇㅅㅇ
[haewo1] ?
[성하연] 앗ㅎㅎ
[성하연] 할말있는데 겜 끄셨길래
[성하연] 이거로 말 걸어봤어욥!!
[haewo1] 네 말씀하세요
[성하연] 별건 아니구엽!! ㅇㅅㅇ
[성하연] 저번부터 궁금했는데
[성하연] 해월님 지금 쓰는 무기 종결 맞아영?
[haewo1] 네
[성하연] 헛..!!
[성하연] 사신거에욧??
[haewo1] 당연하죠ㅎㅎ
[성하연] ㅇㅅㅇ
[성하연] 갑자기 물어봐서 ㅈㅅ해요
[성하연] 길전때부터 궁금했는뎋ㅎㅎㅎ
[성하연] 계속 물어볼 분위기가 아니여서ㅜ.ㅜ
[haewo1] ㄱㅊ요
[성하연] ㅎㅎㅎㅎㅎㅎ
[성하연] 해월님!!
[성하연] 주말에 바쁘세용ㅇ.ㅇ?
[haewo1] 왜요?
[성하연] 길원들이랑 레이드 가기로 했는데~
[성하연] 해월님도 오세용!^ㅡ^
[haewo1] 저 뉴비라 민폐일텐데요ㅎㅎ
[성하연] 노놉 무기도 좋은거 끼셨구
[성하연] 용암 지역 레이드는 패턴도 쉬우니까ㅠ갠찬아요!
[성하연] 오실거죠?? (울음을 참는 얼굴 이모지)
[haewo1] 몇자리 비었나요
[haewo1] 저 지온님이랑 같이 가도 됨?
[성하연] 아 지온님이요..??ㅋㅋ
[성하연] 넵~ 둘이 같이오세요그럼~
[성하연] 토욜 9시에용~^^
[haewo1] ㅇㅋ요
성하연과 서정연이 나눈 디코 채팅을 차분하게 살펴본 나는 질리는 기분으로 말했다.
“엄청 적극적이네…….”
“그렇죠. 종결 무기 효과가 제법 좋아요.”
태평한 서정연과 달리 나는 조금 위기감을 느꼈다.
설마 진짜로 여자인 건 아니겠지? 노퓨쳐가 여성 유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서정연의 증언과 내 헛소문을 악의적으로 퍼뜨리는 걸 봤을 때, 높은 확률로 남자이긴 하겠지만.
‘여자면 상황이 훨씬 복잡해지는데.’
지금 우리가 세운 계획 중에서 가장 불확실하고 운에 맡겨야 하는 게 바로 성하연의 정체를 밝히는 거라, 불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도해준 씨.”
“……!”
막막한 상황에 속으로 한숨을 내쉰 그때였다. 일어선 채로 책상을 손으로 짚고서 상체를 숙여 모니터를 보던 나는 등 뒤로 닿아 오는 체온에 어깨를 좁혔다.
“토요일에 같이 레이드 갈 거죠? 제가 도해준 씨 자리도 만들어 놨는데.”
그거뿐만 아니라 소리 낮춰 조곤조곤 말하는 서정연의 목소리도 지나치게 가깝게 들렸다. 미약한 소름이 오소소 끼쳐 올라서 황급히 서정연을 밀치며 몸을 뒤로 뺐다.
“엇, 뭐? 뭐라고?”
방금 서정연의 숨결이 닿았던 귀를 감싸며 겨우 대답하자 서정연이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말했다.
“토요일에 같이 레이드 가요.”
“그, 그래. 난 상관없어.”
“아마 성하연 쪽에서 다 같이 디코하자고 할 텐데, 도해준 씨도 저처럼 마이크 안 쓸 거죠? 디코 방에 들어간 다음에도 우리 둘이 대화하려면 여기서 같이 게임하는 게 좋겠어요.”
“여기? 또 오라고?”
“다른 방법이 없잖아요.”
그렇긴 한데… 왜 속은 기분이 드는 거지? 내가 혼란에 빠진 사이, 재빨리 컴퓨터를 종료시킨 서정연이 다가와서 팔을 잡아끌었다.
“저거 보여 주려고 한 거예요. 우리 이제 밥 먹어요.”
순식간에 바뀐 대화 주제에 따지지도 못한 나는 서정연이 잡아끄는 대로 터덜터덜 따라갔다.
***
시간이 늦었으니 우리는 점심이 아닌 저녁을 먹게 됐다. 냉장고를 둘러보던 서정연이 옆에 멀뚱히 서 있는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도해준 씨, 혹시 와인 좋아해요?”
“와인?”
“선물 들어온 게 있는데 저녁 먹으면서 곁들이면 어떨까 해서요.”
“음…….”
와인이라니. 갑작스럽게 나온 술 마시자는 제안에 조금 당황했다. 서정연의 집에서 술을? 심지어 맥주 같은 것도 아니고 와인을?
단숨에 높아진 난이도에 내가 대답을 못 하자 서정연이 씁쓸하게 웃으며 냉장고 문을 힘없이 닫았다.
“부담스러웠으면 미안해요. 선물 들어온 지 한참 됐는데 같이 마셔 줄 사람은 한 명도 없고, 저대로 계속 썩히기엔 아까워서 저도 모르게…….”
“…한 잔만 마시는 거라면…….”
기다란 속눈썹을 아래로 내리며 처연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젠장, 이게 아닌데.
“정말요? 같이 마셔 줄 거예요?”
“한 잔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단호하게 외치자 서정연이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기색으로 웃었다.
“바로 가져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저장고가 지하에 있어서.”
“…….”
와인 저장고도 있었냐. 역시 재벌가 자제가 사는 집이라 그런지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메뉴 선택 권한은 어디까지나 집주인인 서정연이 갖고 있으므로 와인이 추가되면서 저녁 식사 메뉴도 확 달라졌다. 나야 딱히 가리는 음식이 없었고, 긴장돼서 배가 별로 고프지 않았으니 상관없었다.
내친김에 식탁이 아닌 거실 소파 앞 테이블에 요리를 차린 서정연이 곧 와인과 와인 잔을 들고 왔다.
“제가 따라 줄게요.”
능숙하게 코르크 마개를 빼낸 서정연이 군더더기 없는 몸짓으로 잔에 와인을 따랐다. 진한 붉은색 와인에서는 의외로 옅은 민트향이 풍겼다.
신기하네. 와인에 대한 지식은 그리 없는 나는 뒤늦게 와인병을 살폈다. 입구 쪽에는 짙은 붉은색 포장지가 감겨 있었고, 아래로는 흑백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이름이… Chateau Lafite… 아, 역시 모르겠다.
서정연이 따라 준 와인을 한 모금 마시자 와인 향과 함께 떫고 쓴 맛이 입 안에 퍼졌다. 내가 반사적으로 미간을 찌푸리자 맞은편에 앉은 서정연이 손수 만든 카나페가 담긴 접시를 가까이 밀어 줬다.
“참, 저 도해준 씨한테 궁금한 거 있어요.”
“뭔데.”
“도해준 씨는 가족 관계가 어떻게 돼요? 형제 있어요?”
그러고 보니 저번에 서정연한테 얘기만 듣고 나는 하나도 안 알려 줬구나. 남의 집안 사정을 다 들어 놓고 모르는 체하는 건 공평하지 않았으니 순순히 대답했다.
“외동이야. 부모님은 대전 쪽에 사시고. 대학 다니려고 유진호랑 같이 서울로 올라왔어.”
솔직히 말해서 우리 집도 작은 공장 하나를 운영하는 터라 돈이 궁한 편은 아니었다. 생활비와 월세 정도는 스스로 벌어서 내고 있지만, 대학 등록금이라거나 자취방 보증금은 부모님께서 지원해 줬으니까.
“흠. 유진호가 부길마 친구랬죠? 뭐 둘이 같이 동거했었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요?”
“아니. 대학이 같아서 같은 건물에서 자취하긴 했는데 나 군대 갈 때쯤에 유진호는 이사 가서 이젠 거리가 좀 있어.”
“그래요?”
턱을 괴고서 날 보던 서정연이 그 말에 미소를 지으며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분명 같은 술인데, 쟤가 마시는 건 왜 이렇게 고급스럽고 맛있어 보이는 건지 모르겠다.
가족 이야기를 시작으로 나와 서정연 사이에 여러 대화가 오갔다. 라이벌로서 허구한 날 길전을 했던 얘기부터 일 얘기, 소파 위에 잠들어 있는 정이 얘기까지. 처음에는 떫기만 했던 와인 맛도 대화와 음식이 함께 어우러지자 꽤 먹을 만해졌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한 잔만 마시겠다고 외친 태도가 무색하게도 세 잔째 마시던 나는 맞은편에 앉아 있던 서정연이 어느새 옆자리로 와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뭐야, 언제 온 거지?’
와인을 세 잔째 마시자 어쩔 수 없이 머릿속이 조금 몽롱했다. 서정연이 자리를 옮기는 것도 모를 정도면 정상이 아닌 건 확실했으니 슬슬 멈추는 게 좋겠다.
“그만 마시게요?”
“어…….”
술기운에 열이 오른 목덜미를 손으로 꾹 누르며 대답하자 새하얀 손이 불쑥 다가와 내 손에 들린 와인 잔을 천천히 가져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미소를 지은 채로 날 응시하고 있는 서정연의 얼굴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