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나더 길드에서 우리를 감사하라고 라임나무를 보낸 지 이틀이 지났다. 라임나무는 이틀이 지나도 여전히 우리를 도와주며 열심히 쩔을 해 줬다.
그런 라임나무 덕분에 이득 본 일이 하나 더 있었다. 라임나무가 우리 파티에 찰싹 달라붙어 지내자 티거 길드가 얼씬도 하지 않게 된 것이다.
“뭐, 망했다고는 해도 예전 2위 길드 명성은 쓸 만하네.”
[어나더 길드가 일부러 탱커를 보낸 이유도 있고요.]
우리끼리 있을 때도 쉽게 죽이지 못했는데, 만렙 탱커가 붙어 다니니 노리기가 더 어려울 거다.
심지어 그 탱커 닉네임 위에는 ‘Another’ 길드 이름까지 붙어 있으니 그리 강하지 않은 티거 길드 입장에서는 건드리기 애매해진 것이다.
“노퓨쳐의 생각인 건지, 그 사칭범이 떠올린 생각인 건진 모르지만 덕분에 편해지긴 했어.”
레벨링에 가장 큰 걸림돌이 바로 티거 길드였다.
뉴비 존에서 나대던 그 비매너 한 명 때문에 손해가 막심했으니까. 그놈이랑 티거 길드가 방해하지 않았으면 진작에 만렙을 찍고 어나더 길드에 들어갔을 텐데.
“오늘은 만렙 찍자.”
어제 180레벨까지 찍어 놨으니 이제 20레벨만 올리면 만렙이었다.
만렙을 찍지 않고 어나더 길드에 들어가는 건 가능했지만, 다른 유저들과 함께 즐길 수 있는 콘텐츠는 대부분 만렙이 되어야 가능했다. 단순히 길드에 들어가고 끝이 아니라 가짜 흔적에게 접근하는 게 진짜 목적인 만큼, 하루라도 빨리 만렙을 찍어야 했다.
‘뭐, 결과적으로 어나더 길드원인 라임나무의 도움을 받았으니 이젠 별 의미가 없는 거 같지만.’
라임나무를 기점으로 어나더 길드와 우리 파티가 엮였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여기서 어나더 길드원과 지나치게 친해지는 것만 조심하면 되는데…….
[전체] 나의라임나무: 레이드 공팟을 머하러 구해여?
[전체] 나의라임나무: 레이드도 제가 도와줄게여!
[전체] 나의라임나무: 파초 ㄱㄱ
바로 이게 문제였다.
우리 레벨이 높아지는 만큼 단순히 필드에서 몬스터를 잡는 사냥 퀘스트보다 레이드 퀘스트의 비중이 커지는데, 이러면 쩔해 주는 라임나무도 파티에 초대할 수밖에 없었다.
‘사냥 퀘를 도와줄 때부터 이 상황을 예상하긴 했지.’
정말 초대해도 괜찮은 건가. 사실 이성적으로 따지면 처음부터 쩔해 주겠다는 라임나무의 제안을 거절했어야 하는데, 빠른 레벨링의 유혹을 버티지 못하고 그만.
파티에 초대하면 비밀을 지키기가 더 어려워진다. 그간 우리끼리 파티 채팅으로 얘기해 온 탓에 익숙해진 누군가가 실수할 수도 있으니까. 레이드도 마찬가지다. 레이드를 능숙하게 깨면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
“어떡하지?”
[거절할 핑계가 없네요. 그냥 데려가서 쩔받죠.]
“그래도 되나? 너무 위험한데.”
[우리가 부캐 파티라는 건 노퓨쳐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을 테니까 그 부분은 괜찮고. 파티 채팅으로 실수만 안 하도록 각자 신경 쓰면 될 것 같아요.]
하긴. 차라리 쩔받으면서 빠르게 만렙을 찍고 라임나무와 거리를 벌리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중에 어나더 길드에 들어가면 그쪽 길드원들과 몇 번이고 파티를 맺고 게임을 해야 할 텐데, 미리 연습하는 셈이나 마찬가지다.
[파티] Z10N: 라임나무 파초할거임
[파티] Z10N: 조심들 하셈
[파티] 빚과송금: 넵
[파티] 쥐안에든독: ㅇㅋㅇㅋ
혹시 모르니 파티원들에게 미리 경고를 한 다음에 라임나무에게 초대를 보냈다.
나의라임나무 님이 파티에 들어오셨습니다.
[파티] 나의라임나무: ㅎㅇ!
[파티] 나의라임나무: 어디갈거에여?
[파티] 나의라임나무: 화산? 인형집? 어둠숲?
[파티] 나의라임나무: 어디든 ㄱㅊ!
[파티] Z10N: ㄴㄴ
[파티] Z10N: 수정동굴 갈거임
[파티] 나의라임나무: 수정동굴?
[파티] 나의라임나무: 화산이 더 무난하지 않나여
[파티] Z10N: 쉬운거부터 해보려구요
라임나무의 말처럼 지금 우리한테 제일 적당한 레이드는 ‘붉은 화산’ 레이드가 맞다. ‘인형의 집’이나 ‘어둠이 깔린 숲’도 나쁘지 않다.
좋은 레이드들 놔두고 굳이 수정동굴을 선택한 이유는 수정동굴이 제일 짧고 쉽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얻을 수 있는 경험치가 낮긴 하지만 라임나무를 의식해야 하니까 쉬운 난이도부터 해 보는 게 안전했다.
[파티] Z10N: 수정동굴은 짧아서 우리끼리 가도 괜찮음
[파티] 나의라임나무: 노노
[파티] 나의라임나무: 어차피 저 할거 없어요ㅠ~ㅠ
[파티] 나의라임나무: 가취가욥
쓸데없이 끈질기네. 어쩔 수 없지. 나는 일단 스킬 세팅을 레이드 전용으로 변경하고 레이드 입장 버튼을 눌렀다.
레이드에 진입하면서 화면이 잠시 새까맣게 물들었다가 새로운 맵이 나타났다. 보라색 자수정이 한가득 깔린 수정동굴 레이드는 중간마다 깔린 붉은 수정을 조심해서 보스가 있는 맵 끝까지 이동하면 된다.
붉은 수정은 건드리면 폭발하면서 CC기가 랜덤으로 발동하는데, 폭발 대미지를 입거나 충격, 기절 등 CC기 종류가 무척 다양했다. 이동하는 와중에 건드리는 건 괜찮지만 전투 중에 잘못 건드리면 본인이나 혹은 팀원에게 피해를 줄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했다.
“못하는 척하면서 깨야 하나?”
[연기에 자신 있어요?]
수정동굴 레이드는 이미 열 번도 넘게 와 본 장소였다. 내 말에 대답하는 서정연의 목소리가 어쩐지 놀리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눈가를 찌푸렸다.
“넌 자신 있냐?”
[실제 연기도 아니고 게임 정도는 자신 있죠. 못하는 척 정도야.]
“해 봐, 그럼.”
[내기 하자는 거예요? 제가 라임나무 속이면 도해준 씨는 뭐 해 줄 건데요?]
“뭔 또 내기야. 내기에 환장했냐?”
[그냥 하면 재미없잖아요. 할래요?]
쓸데없이 그런 내기를 왜 하냐고 무시하려던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무시하고 넘기기에는 서정연의 저 의기양양한 태도가 굉장히 거슬렸다.
“실패하면 너도 벌칙 받는 거지?”
[당연하죠. 그래야 공평하니까.]
“내가 시키는 거 다 할 수 있냐? 그런 거면 할래.”
[좋아요. 반대로 제가 이기면 도해준 씨가 시키는 거 다 해야 해요.]
“그러든가. 아,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고의트롤 같은 거 하면 안 된다. 요즘은 아무리 뉴비라고 해도 게임 아예 못하는 사람은 드문 거 알지? 선 잘 타서 하라고.”
[흠, 기준이 좀 애매한 것 같은데…….]
“깐깐하게 안 굴 테니까 일단 해 봐.”
[알겠어요.]
명확한 기준을 세우지도 않았는데 서정연은 순순히 내기를 받아들였다. 심지어 의기양양한 태도도 달라지지 않았다.
분명 유리한 건 내 쪽인 것 같은데 저 자신감은 대체 뭐냐고. 어쩐지 좀 불안해졌다.
그사이에 첫 번째 몬스터 무리가 나타났다. 앞장선 라임나무가 등에 메고 있던 대검을 꺼내서 바닥에 내리꽂았다.
【내가 있는 한, 적들은 나아가지 못합니다!】
팔라딘이 광역 도발 스킬을 사용했다는 신호였다. 새하얀 빛이 번쩍 터져 나오자 우리를 향해 달려오던 몬스터가 즉시 방향을 틀어서 라임나무에게로 달려갔다.
붉은 수정을 건드리지 않도록 위치를 조절하며 근접 스킬로 몬스터를 죽였다. 이런 구도에서는 대미지가 약한 원거리 스킬을 꺼낼 필요가 없었다.
【Power Up! 응원의 노래를 들려드릴게요!】
제일 뒤에 빠져 있던 좋은날씨가 버프를 넣어 줬다. 소울스타의 버프에 팔라딘의 광역 도발까지. 앞에서 탱커가 막아 주고 뒤에서 버프를 넣어 주는 서포트 덕분에 우리는 빠른 속도로 몬스터 웨이브를 처리할 수 있었다.
처음 등장한 20마리를 모두 죽이자마자 숨 돌릴 틈 없이 두 번째 몬스터가 몰려들었지만 우리는 어렵지 않게 버텼다.
괜히 레이드 파티에 탱커와 서포터가 귀족 직업인 게 아니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라임나무 없이 우리끼리 왔으면 첫 번째 몬스터 웨이브를 절대 이 속도로 처리할 수 없었을 거다.
이쯤 되자 궁금해졌다. 아무리 길마가 부탁했다고 해도 이렇게 진심으로 도와줄 필요는 없을 텐데.
[파티] 빚과송금: 라임님
[파티] 빚과송금: 원래 뉴비팟 도와주는거 좋아하세요?
나처럼 궁금해졌는지 좋은날씨가 타이밍 좋게 질문을 건넸다.
[파티] 나의라임나무: 아녀
[파티] 나의라임나무 뉴비팟 첨 도와줌!
[파티] 빚과송금: 귀찮지 않아요?
[파티] 쥐안에든독: 길마 부탁을 너무 잘 들어주시네ㅋㅋㅋㅋ
[파티] 쥐안에든독: 걍 적당히 해도 괜찮을텐데
[파티] 나의라임나무: 글킨한데
[파티] 나의라임나무: 제가 억지부려서 들어간 길드라
[파티] 나의라임나무: 저 여기 길드 붙어있어야 되거든여8ㅅ8
[파티] 빚과송금: 왜요?
[파티] 나의라임나무: 어나더 길드가 요일 길드랑 길전하는거로 유명하잖아여
[파티] 나의라임나무: 이번에 흔적도 돌아왔으니까 요일이랑 또 길전할거같아서
[파티] 나의라임나무: 그거만 기다리고 있어여ㅋㅋ
‘…응? 요일? 우리 길드랑 전쟁하는 걸 기다리고 있다고?’
관심 없는 척 채팅을 지켜보던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여기서 갑자기 우리 길드 이름이 왜 나와?
[파티] 빚과송금: 길전 좋아하시나봐요
[파티] 나의라임나무: ㄴㄴ
[파티] 나의라임나무: 길전은 관심없어여
[파티] 나의라임나무: 요일 길마만 죽이면 됨
[파티] 나의라임나무: 그 사람 싫어해서^~^
“……?”
연달아 올라온 라임나무의 채팅에 입이 절로 벌어졌다.
예? 나요? 나를 싫어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