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해준 씨, 제가 물어봤어요.]
“알아… 나도 눈이 있어.”
저 당당한 태도를 보건대, 서정연은 지금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 게 분명했다.
“제발 이런 짓은 하기 전에 나한테 설명 좀 해 주면 안 되냐? 어?”
[설명요? 굳이 이걸요?]
이 자식, 바로 옆에 있었으면 멱살이라도 잡았을 텐데. 주먹을 꾹 쥐며 분노를 최대한 억누르고 말했다.
“그냥 다 해…….”
[그럴까요?]
내 목소리가 심상치 않은 것을 알아챈 서정연이 냉큼 대답을 해 왔다. 대답만 잘할 뿐 달라지는 건 없을 것 같지만, 일단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었다.
나는 채팅 창에 정신을 집중했다. 이왕 이렇게 됐으니, 가짜 흔적이 계속 조용하다면 한 번 더 불러 보라고 시키려고 했는데, 의외로 가짜 흔적이 반응을 해 왔다.
[길드] heunJeok: ?
[길드] haewo1: 안녕하세요
[길드] heunJeok: ?
[길드] heunJeok: ㅎㅇ?
[길드] haewo1: 제가 신입이라서ㅎㅎ
[길드] haewo1: 길마님한테 인사 함 하고 싶었어요^^
[길드] heunJeok: ㅇㅎ;
가짜 흔적은 성의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채팅을 보내왔다. 설마 이 정도 간단한 대화도 노퓨쳐가 일일이 알려 주면서 간섭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럼 좀 소름인데.
[이제 어떡할까요?]
“어?”
[다 말하라면서요. 이제 뭐라고 할까요? 도해준 씨가 정해 주는 대로 채팅 칠게요.]
내가 하라는 대로 채팅 치겠다고? 이러면 나는 노퓨쳐를 욕할 처지가 아니게 되는 건가? 아무튼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길드 전쟁에 참여할 거냐고 물어봐 봐.”
[네.]
당연히 참여하겠지만, 그래도 확인해서 나쁠 건 없었다.
무엇보다 가짜 흔적과 채팅을 나눌 기회가 지금 아니면 또 언제 올지 알 수 없으니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 나가야 했다.
[길드] haewo1: 길마님도 길전 참여하세요?
[길드] heunJeok: 예
[길드] 노퓨쳐: ㅎㅎ;
[길드] 노퓨쳐: 당연히 하죠~
노퓨쳐 자식은 이번에도 끼어드네. 가짜 흔적의 엄마라도 되는 것처럼 구는 저 태도가 엄청 거슬렸다.
‘길드에 들어오면 가짜 흔적하고 대화할 수 있는 상황이 자주 나올 줄 알았는데…….’
설마 길드에서도 이렇게까지 커버 칠 줄이야. 길드 내에도 믿을 놈은 없다 이건가. 길드 몸집을 키우기 위해서 아무 유저나 가입시킨 건 본인이면서.
[길드] 나의라임나무: 길마님
[길드] 나의라임나무: 그럼 이번 길전도 전처럼 요일 길마랑 싸우실거?
우리가 다음 채팅을 치기 직전에 라임나무가 끼어들어서 먼저 질문을 해 왔다. 이게 오히려 좋았다. 우리가 하려던 질문을 라임나무가 좀 더 자연스럽게 대신 해 준 셈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길드] heunJeok: ㅇㅇ
[길드] heunJeok: 그래야죠
“오.”
나랑 싸우겠다고? 네가? 나는 무심코 웃었다.
“질 텐데?”
서정연보다 게임을 못 하는 게 분명한 가짜 흔적이 나랑 싸우겠다고 당당하게 밝히는 꼴이 너무 웃겼다.
서정연 정도의 실력은 돼야 나랑 치고받고 싸우면서 승리를 나눠 갖는 거지, 노퓨쳐 뒤에 숨어서 가짜 행세나 하는 놈이 그만한 실력이 있을 리가 없었다.
[오히려 저렇게 나오니까 더 기대되네요.]
“그러게.”
하긴, 막상 길드 전쟁 때 뒤에 숨을 거라고 해도 길드원들이 다 보는 길드 채팅에서 솔직하게 대답할 수는 없겠지. 저런 근거 없는 자신감을 내비치는 마음이 이해는 됐다.
[길드] 노퓨쳐: 예전 길전 떠올리는 분들 많은거같은데
[길드] 노퓨쳐: 그때랑 비슷하게 진행할겁니다~
[길드] 노퓨쳐: 요일 길드도 마찬가지일거구용ㅎㅎ
[길드] 성하연: ㅇ.ㅇ!!
[길드] 미녀사냥꾼: 굿굿
[길드] 노퓨쳐: 근데 예전에는
[길드] 노퓨쳐: 흔적님이랑 요일 길마가 싸우는걸 걍 피해줬는데
[길드] 노퓨쳐: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져서요~
[길드] 노퓨쳐: 그니까 신청하신 길원분들 중에서 직업보고 몇분 뽑아서
[길드] 노퓨쳐: 길마님 주변에 자리 잡아드릴겁니다~
[길드] kumayoung: 헐 좋다
[길드] 반숙올챙이: 캬
[길드] 인천구비둘기: ㅋㅋ요일 길마 왔다가 개처맞고 바로 뒤지겠는데?
아, 그런 계획이야?
턱을 괴고서 노퓨쳐의 채팅을 즐겁게 읽던 나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가짜 흔적을 이용해서 어그로를 끌어 보겠다 이건가? 내가 예전처럼 흔적한테 신나서 달려들 줄 아나 보지?
‘노퓨쳐 저 멍청한 놈은 지금 뭐가 문제인지 아예 하나도 파악 못하고 있네.’
내가 흔적이 진짜가 맞는지 의심하지 않을 거라고 착각하고 있는 게 어이가 없었다. 아무래도 노퓨쳐는 자신이 데려온 가짜 흔적이 진짜를 완벽하게 흉내 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실상은 정반대인데 말이다.
[길드] 나의라임나무: 그럼 탱커 필요하겠네여?
[길드] 나의라임나무: 팔라딘 어떠세요 ^~^
[길드] 노퓨쳐: 팔라딘 좋져ㅎㅎ 참여하실거면 헷갈리지 않게 저한테 갠쪽 보내주세요
[길드] 나의라임나무: ㅇㅋㅇㅋ요
나를 싫어해서 죽이고 싶다던 라임나무가 노퓨쳐의 계획에 반색하며 제 직업을 어필해 왔다.
노력이 가상하긴 한데, 노퓨쳐의 계획을 알았으니 순순히 따라 줄 마음이 없었다. 아니, 계획을 몰랐다고 해도 길드 전쟁에서 내가 가짜 흔적한테 뛰어들 일은 절대 없었겠지만.
“노퓨쳐의 생각을 우리가 이용할 방법이 있을까?”
그래도 얻어 낸 정보를 안 써먹으면 아쉽지.
입가를 매만지며 서정연에게 물어봤다. 그러자 머릿속을 정리하는 것처럼 잠시 뜸을 들이던 녀석이 대답을 했다.
[아마 노퓨쳐는 사칭범의 실력이 진짜 저와 비슷하다는 소문을 내고 싶은 것 같네요. 저 계획대로 도해준 씨가 사칭범한테 달려들었다가 인원수에 밀려서 죽었으면 어나더 길드가 이길 가능성이 커지니까.]
“단순히 어나더가 이긴다고 사칭범 실력이 좋다는 소문이 퍼지긴 쉽지 않을 텐데.”
[말은 전해질수록 실제와 달라지고 간결해지니까요. 초반에는 어나더가 함정을 파서 이겼다는 걸 알겠지만, 나중에는 어나더가 이기고 요일이 졌다는 결과만 남겠죠. 그 결과가 곧 길마인 사칭범의 실력과 직결될 거고요.]
이어지는 설명에 나는 진심으로 질색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노퓨쳐가 거기까지 노리고 있다는 거냐? 진짜 할 일도 없는 놈이다. 길드 평판에 인생이라도 건 거야, 뭐야.”
[집착 수준이긴 하죠. 그러니까 사람 구해서 길마 자리에 앉혀 놓은 거고. 아무튼 저 계획은 괜히 건드리지 말고 그냥 무시하는 게 좋겠어요.]
“이용하는 게 아니라 무시하자고? 그건 너무 아까운데.”
[노퓨쳐가 원하는 건 도해준 씨가 예전처럼 저한테 집중하는 그 상황 자체예요. 노퓨쳐의 계획을 무너뜨릴 방법은 많지만… 신경 쓰면 쓸수록 노퓨쳐가 원하는 대로 사칭범이랑 도해준 씨가 엮일 뿐이라는 거죠.]
“나랑 가짜 흔적이? 으으.”
아, 진짜 싫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 반응이 재밌는지 서정연이 부드럽게 웃었다.
[거봐요. 도해준 씨도 싫잖아요.]
“하… 근데 막상 길전 중에 가짜 흔적을 보면 재수 없어서 몇 대 치고 싶을 것 같은데.”
그 욕구를 참아야 하는 건가. 참아야겠지. 내가 ‘길드 전쟁’이라는 미끼를 걸었다면, 노퓨쳐는 ‘흔적’이라는 미끼를 내건 거나 다름없었다. 먹잇감이 달려들도록 미끼를 아주 이리저리 흔들겠지. 그거에 넘어가면 안 될 텐데.
[도해준 씨는 할 일이 있잖아요.]
“뭐?”
[저랑 데이트해야죠.]
“데…….”
이트? 차마 끝까지 뱉지 못한 말이 가슴 속을 맴돌았다. 이 자식이 갑자기 뭐라는 거야. 데이트를 하자고? 나랑?
혼란에 빠진 나를 두고 서정연이 웃음기가 감도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칭범을 구경할 여유 같은 건 없을 거예요.]
“…….”
[딴 데 시선 팔다가 저한테 지면 어떡해요. 저 이거 부캐인데.]
“허…….”
그제야 ‘데이트’가 무슨 의미인지 깨달은 나는 허탈한 숨을 내쉬었다. 세상천지에 이런 도발이 어디 있어. 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대답했다.
“설마 내가 지겠냐? 심지어 다른 직업도 아니고 윈드 헌터한테?”
[윈드 헌터가 얼마나 강한지 이번 기회에 제대로 보여 줄게요.]
“퍽이나 그러겠다. 한 대 맞고 울지나 마라, 응?”
[저 울리게요? 도해준 씨, 그렇게 안 봤는데 변태 같은 구석이 있네.]
“개소리하지 마.”
나는 서정연에게 욕하면서 가슴 부근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서정연에게 데이트 소리를 들은 순간부터 쿵쾅거리기 시작한 심장이 도무지 진정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미치겠네, 정말…….’
서정연 몰래 심호흡을 해 보고, 애써 어나더 길드 채팅에 집중을 해 봐도 한번 뛰기 시작한 심장은 소리를 높이며 그 뒤로 한참이나 나를 괴롭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