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이런 생각을 서정연에게 털어놓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나조차도 당혹스럽고 이해할 수 없는 이 감정을 서정연에게 말해 봤자 분위기만 개판 나겠지.
그렇다고 서정연이 납득할 만한 변명을 지금 당장 뱉어 낼 자신도 없었다. 내가 난감한 기색으로 입술만 깨물자 서정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집에 놀러 오라는 게 문제예요?”
“…어. 집만 아니면 괜찮아.”
“어제는 별 탈 없이 잘 놀고 갔잖아요.”
서정연이 의아해하는 것도 당연했다. 어젯밤에 게임을 끝내고 나서 서정연이 준비해 준 과자로 간단한 요기를 한 뒤에 정이랑 잠깐 놀아 주기까지 했으니까.
게임이 끝나자마자 바로 질색하면서 나갔으면 모를까, 잘 놀아 놓고 다음 날이 되자마자 부담스러워하면 나 같아도 미친놈 보듯이 쳐다볼 거다.
‘그렇지만 나도 어쩔 수 없다고!’
서정연의 입장은 알지만 나 또한 억울한 부분이 좀 있었다.
어제는 애초에 길드 전쟁을 수월하게 하기 위한 목적이었고, 마지막이었으니까 방 구경도 한 거였다.
딱히 서정연의 집에서 무언갈 해야 하는 것도 아닌데 그냥 찾아가는 건… 진짜로 놀러 가는 거잖아. 목적이 노는 거라고! 서정연이랑 내가 단둘이 뭐 하고 놀아? 그것도 ‘서정연의 집’에서!
아무리 시뮬레이션을 돌려 봐도 ‘서정연의 집에서 놀고 온다’를 잘 해낼 자신이 없었다. 중간에 게임 같은 걸 한다고 해도 그 외에는 서정연과 얼굴을 맞대고 다른 활동을 할 텐데, 시종일관 고장 난 기계처럼 뚝딱거리면서 헛소리를 해 댈 내 모습이 안 봐도 훤했다.
‘미친… 상상만 해도 쪽팔려.’
난 괜히 다른 곳에 시선을 보내며 더듬더듬 대답했다.
“어제는 길전을 하려고 간 거잖아.”
“그런 게 중요해요?”
“안 중요하냐?”
“그런 이유 없이 그냥 놀러 와도 되잖아요. 제가 도해준 씨한테 힘든 일을 시키는 것도 아닌데.”
대화가 계속 같은 내용으로 맴돌았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진작에 성가시다고 쳐 냈을 텐데, 서정연을 상대로는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그럴 마음이 들지도 않거니와, 어쩐지 내가 그렇게 반응하면 서정연이 진심으로 상처받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나는 결국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힘없이 설명했다.
“살면서 그래 본 적이 한 번도 없어서… 어색해서 그래.”
“네?”
“고딩 때 이후로 다른 사람 집에 놀러 가 본 적이 없다고.”
잠시 눈을 깜빡이던 서정연이 이내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서 고개를 기울였다.
“고등학생 때는 누구 집에 놀러 갔는데요?”
“유진호… 우리 길드 부길마. 오래 알고 지낸 놈이라서.”
“아아. 그럼 그 부길마 외에는 저밖에 없는 거예요? 집까지 가 본 상대가?”
“그래.”
“흠…….”
기울였던 고개를 다시 바로 세운 서정연이 성큼 걸어와 내 바로 옆에 나란히 섰다.
“알겠어요. 일단 정이 산책부터 마저 시키죠. 여기 꽤 넓으니까 한 바퀴 돌아 주면 충분할 거예요.”
“……?”
집에 놀러 오라는 얘기는 이제 끝난 건가? 일단 녀석의 말대로 멈췄던 걸음을 다시 움직였다. 우리가 멈춰 서서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근처 화단을 구경하던 정이가 꼬리를 살랑이며 앞장서서 걸어갔다. 정이가 걸을 때마다 둥근 뒤통수 위에 달린 귀가 팔락거렸다.
그 귀여운 광경에 나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긴 그때였다.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로 서정연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부담 주려고 그런 건 아니에요.”
서정연의 표정은 어딘가 복잡해 보였다.
“도해준 씨가 정이도 예뻐해 주고 저랑 게임이라는 취미도 같으니까 집이 편할 거라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차분하게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어딘가 기운이 없어 보였다. 그걸 느끼자 갑자기 가슴 속이 엄청나게 따끔거렸다.
목소리뿐만 아니라 가로등 불빛에 비친 옆얼굴도 아까보다 확연히 의기소침해져 있었다. 아래로 살짝 처진 서정연의 눈꼬리를 발견한 나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자, 잠깐. 나도 싫은 건 아니고, 그저…….”
“알아요. 도해준 씨가 우리 집에 놀러 오는 게 불편하다는데 당연히… 존중해 줘야죠.”
서정연이 쓸쓸하게 중얼거렸다.
미치겠네, 진짜. 안절부절못하다가 녀석을 달래는 심정으로 급히 입을 열었다.
“가면 되잖아, 가면. 대신 지금 말고 나중에.”
“나중에 언제요?”
“…한 달 뒤쯤?”
서정연의 눈치를 슬쩍 살피자 씁쓸한 표정은 여전했다. 나는 혹시나 해서 다시 물었다.
“3주일 뒤?”
“…….”
“다다음 주?”
“…….”
“…뭐, 설마 다음 주?”
서정연이 그제야 평소대로 웃었다.
“그럴래요?”
“때려치워!”
진지하게 상대한 내가 바보지. 짜증 나서 고개를 휙 돌리고 걸음 속도를 높이자 서정연이 아아, 왜요, 다음 주에 놀러 와요, 하고 앙탈을 부리며 재빨리 나를 쫓아왔다.
***
정이를 데리고 공원 한 바퀴를 돈 우리는 근처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씩 산 뒤에 외부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정이한테는 미리 가져 온 간식과 편의점에서 맥주를 살 때 같이 구매한 물을 챙겨 줬다. 우리가 주는 대로 냉큼 받아먹던 정이는 바닥에 배를 깔고 드러누웠다.
늘어지게 하품하고는 본격적으로 졸기 시작하는 정이를 놔두고 서정연은 태블릿PC를 테이블에 꺼냈다. 본래 우리가 오늘 만난 이유는 영상을 같이 보기 위해서였고, 핸드폰보다 더 큰 화면으로 보면 좋을 거 같다며 서정연이 태블릿PC를 따로 챙겨 왔다.
봐야 할 영상은 총 두 개였다. 어제 길드 전쟁하면서 서정연이 찍은 영상과 여여랑이 ‘쥐안에든독’ 캐릭터로 찍은 영상.
서정연의 영상에서는 어나더 길드의 브리핑을 들어 볼 수 있고 여여랑의 영상에서는 함정을 파 놓고 내가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어나더 길드원들이 뭘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뭐, 대단한 건 없겠지만.’
그래도 찍었으니 확인해 둘 필요가 있었다.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며 태블릿PC에서 재생되는 영상에 집중했다.
[크흠, 다 왔나요?]
[넵, 다 왔습니다!]
[안녕하세요~!]
서정연이 직접 녹화한 영상이라 화면에 보이는 캐릭터는 ‘haewo1’이었지만, 들려오는 목소리는 여러 가지였다. 이게 어나더 길드원들의 목소리인가.
“제일 처음 다 왔냐고 물어본 사람이 노퓨쳐예요.”
내 맞은편에서 함께 태블릿PC 화면을 보던 서정연이 설명을 덧붙였다.
노퓨쳐의 목소리라. 미묘한 저음에 지나치게 거칠어서 빈말로도 좋은 목소리는 아니었다. 바로 앞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하필 서정연이라 비교되는 것도 있고.
[다들 자기가 가야 할 위치가 어딘지 알고 있죠? 곧 전쟁 시작하니까 바로 움직여 주세요.]
턱을 괴고서 영상을 보던 나는 문득 떠오른 궁금증에 물었다.
“근데 노퓨쳐는 왜 라임나무를 사칭범 옆에 놔두지 않은 거지? 내가 봐도 어나더 길원 사이에서 제일 쓸 만한 딜탱이 라임나무인데.”
성격도 무난하고 스킬 활용도나 컨트롤 능력, 게임 센스까지. 누가 봐도 라임나무는 실력이 꽤 좋은 유저였다.
노퓨쳐가 도통 밖으로 돌아다니질 않아서 라임나무랑 레이드 한번 가 보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길드 내에서 누가 실력 있는 유저인지 관심 정도는 있을 텐데.
‘무엇보다 실력 좋은 애들을 미리 알아 둬야 사칭범 옆에 배치해 둘 수 있으니까.’
노퓨쳐가 어떤 애들을 배치했는지는 나와 서정연을 포함한 부캐 파티원 모두가 몰랐다. 명단을 만든 노퓨쳐가 포함된 길드원에게만 개별적으로 알린 탓에 여여랑이 포함됐다는 소식만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높은 확률로 라임나무가 그중 하나일 줄 알았는데… 물론 확실한 건 아니었으니 혹시 모를 불상사를 대비해서 유진호와 좋은날씨에게 도와 달라고 부탁한 거였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정말 다행이었다. 내가 라임나무한테 길이 막혔으면 우리 계획은 시작도 전에 무너졌을 거다.
“음, 이건 제 추측이긴 한데.”
입가를 매만지며 잠시 뜸을 들인 서정연이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노퓨쳐는 라임나무가 의심스러운 모양이에요.”
“뭐?”
“제 사칭범이 나타난 이후에 어나더는 많은 길드원을 새로 받았잖아요? 그 과정에서 요일 길드원과 친한 누군가가 들어왔을 거라고 의심하는 것 같아요.”
“미친, 노퓨쳐가?”
진심으로 놀라웠다. 서정연의 추측이 맞다면 노퓨쳐는 내 예상보다 조금은 덜 멍청하다는 건데.
“아닐 수도 있고요. 그냥 제가 보기엔 그래요.”
“근데 왜 하필 라임나무지?”
“그야… 라임나무가 도해준 씨 길드 부길마한테 죽고 못 살잖아요. 저번에 편 갈라서 견제할 때도 라임나무는 요일 길드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었고.”
“아.”
나와 서정연이 흥미진진하게 구경했던 그 채팅 말이구나. 그 직후에 얼마 안 가 노퓨쳐와 사칭범이 동시에 로그인하는 바람에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 깜빡 잊고 있었다.
내 기억으로 그때 분명 내 길드를 욕하던 무리가 나한테 처맞은 놈들이랑 그리고…….
‘성하연. 그놈도 있었어.’
내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을 서정연도 눈치채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 당시에 노퓨쳐는 접속해 있지 않았지만 성하연은 있었잖아요. 나중에 가서 노퓨쳐에게 그 일을 알려 준 거겠죠.”
라임나무는 유진호를 좋아하는 태도를 딱히 숨기지 않았다. 요일 길드와 사이가 나쁜 어나더 길드 내에서 요일 길드 부길마인 마하에게 호감이 있다는 걸 대놓고 표현했으니 노퓨쳐 입장에서는 의심이 갈 만했다.
완전히 잘못 짚은 거긴 하지만, 노퓨쳐가 저런 의심을 한다는 거 자체가 깜짝 놀랄 일이었다. 녀석도 나름대로 생각이라는 걸 하고 사는구나.
“그래서 의심스러운 라임나무를 전방으로 보내 버렸다는 건가.”
“네. 사칭범 옆에 두면 자기네 계획이랑 위치가 흘러 나갈 테니까. 결과적으로 보면 라임나무는 아무 문제 없는 유저였지만요.”
설명을 마친 서정연이 담백하게 웃었다.
때마침 영상에서 노퓨쳐 옆에 서 있는 여여랑이 보였다. 미안한데 첩자는 라임나무가 아니라 바로 옆에 있는 ‘쥐안에든독’인데. 노퓨쳐가 새삼 또 불쌍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