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시방…이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은 서정연이 이내 무언가 깨달은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설마 피시방 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피시방은 좀. 시끄럽고 냄새나잖아요. 청결하지 않기도 하고. 전 가기 싫어요.”
“아니, 그럼 네가 흔적이라는 걸 어떻게 보여 준다는 거야? 아크에 접속해서 보여 주려는 거 아니었어?”
당황스러운 건 오히려 내 쪽이었다. 당연히 피시방에 가서 아직 남아 있다는 흔적의 캐릭터를 보여 줄 거라 예상했는데.
“그거야 당연히 제 컴퓨터로 보여주려고 했죠.”
“뭐?”
“우리 집으로 가요. 여기서 10분 정도만 걸으면 나오니까.”
설마 또 놀리는 건가?
의심스럽게 바라봤지만, 서정연은 그 재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지 않았다. 녀석에게서 진심을 느낀 나는 기가 막혀서 미간을 찌푸렸다.
“말이 되냐… 네 집을 왜 가.”
“문제 있나요?”
“장난 아니게 많지. 애초에 날 얼마나 안다고 집에 데려가려고 해?”
머릿속이 얼마나 해맑으면 알게 된 지 얼마 안 된 사람을 집으로 초대하는 건지 모르겠다. 진지하게 한마디 하자 서정연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뭐 어때요. 혹시 무서워요? 내가 집으로 데려가서 때리기라도 할까 봐?”
“너야말로 안 무섭냐? 내가 집에서 뭔 짓을 할 줄 알고?”
“상관없으니까 가요.”
앞장서려는 듯이 나를 지나쳐 걸어가는 서정연의 팔을 기겁하며 붙잡았다.
“안 가. 피시방에서 흔적 계정만 확인하면 되는데 뭐 하러 집까지 가냐?”
“지금 이 시간이면 피시방에 한창 사람 많을 텐데. 그리고 불특정 다수가 만진 키보드에 손 올리기 싫어요.”
“안 만지면 되지. 옆자리에서 나한테 다 읊어. 내가 대신 게임 켜고 로그인해 줄 테니까.”
“그 정도면 그냥 제 집으로 가는 게 낫지 않아요? 피시방보다 먼 거리도 아니잖아요.”
“네가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집에 초대하냐고. 이름밖에 모르잖아. 내 나이는 알아?”
결국 신상 정보까지 언급됐다. 눈을 깜빡인 서정연이 몹시 흥미롭다는 듯이 물었다.
“그러고 보니 안 물어봤네. 몇 살인데요?”
“……25살.”
“저보다 4살 어리네요.”
4살? 저 얼굴로 29살이라는 건가? 많아 봤자 나보다 한두 살 많을 줄 알았더니.
“나이 알았으니까 이제 초대해도 되는 거죠?”
“되겠냐고.”
“까다롭네요, 도해준 씨.”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포옥 내쉬는 꼴에 목덜미가 절로 당겼다. 까다로운 게 누군데, 지금.
“그럼 이렇게 할까요? 어젯밤에 갔던 24시 카페로 가서 기다려요. 집에서 노트북 들고 갈 테니까.”
“네가 갖고 다니던 그 노트북?”
“아니, 그건 업무용이고. 게임용 하나 더 있어요.”
코앞에 피시방을 두고 집까지 가서 노트북을 가져오겠다는 소리를 하는 걸 봐선 피시방은 죽어도 가기 싫은 모양이다.
나도 녀석의 집에 가고 싶진 않았으니 나름 서로 한발씩 물러선 해결책이었다. 서정연이 내건 방법보다 더 좋은 방법을 떠올리지 못한 나는 결국 승낙했다.
“알겠어.”
***
먼저 카페에 가서 40분 정도 기다리자 서정연이 가방을 메고 돌아왔다.
그동안 샌드위치로 대충 허기를 채운 나는 서정연이 노트북을 켤 동안 새 음료를 주문하고 왔다.
“나 사 주는 거예요?”
“그래. 곱게 마셔라.”
본인 선택이라지만 노트북을 가지러 집에 다녀온 서정연에게 음료라도 사 줘야 내 마음이 편했다. 녀석에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넘겨 주고 나는 에이드를 마셨다.
“업데이트는 미리 해 놔서 금방 켜질 거예요.”
“어.”
“거기 말고 제 옆자리로 오라는 뜻이에요.”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테이블 중앙에 놓으면 어느 정도 보일 텐데. 하지만 더 따지기도 귀찮아서 자리를 옮겼다.
맞은편에 앉은 내가 옆자리로 옮겨 오자 노트북을 내 쪽으로 좀 더 밀어 준 서정연이 아크로드 런처를 켰다. 런처에서 로그인을 하고 게임을 켜자 내게도 익숙한 캐릭터가 화면에 나타났다.
“흔적…….”
대기 화면 중앙에 서 있는 연하늘색 장발에 동양풍 옷을 입고 있는 캐릭터. 허리춤에 매고 있는 검의 생김새와 그 주변으로 빛이 반짝이는 걸 보아 내가 아는 그 흔적이 확실했다.
“아예 접속도 해 볼까요?”
“그래도 돼?”
“네. 일부러 유저 없는 곳에 세워 두기도 했고, 뭐 누군가 본다 해도 가짜 흔적일 거라고 생각하겠죠.”
서정연이 시작 버튼을 누르자 로딩 화면이 떴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수풀이 가득한 들판 한가운데에 멀뚱히 서 있는 흔적이 보였다.
“클렛 섬 숲인가?”
“네.”
아크로드에는 꽤 많은 숫자의 섬이 있고, 각 섬은 세이브 포인트를 찍어 두거나 배로 직접 찾아가야 했다. 그렇다 보니 수집 퀘스트가 목적이 아닌 이상, 유저가 들리지 않는 섬이 제법 많았다.
클렛 섬도 그중 하나였다. 넓은 맵과 ‘요정들이 사는 숲’이라는 컨셉 때문에 길까지 복잡해서 아무도 찾지 않는 섬이었다.
“확실히 무기랑 장비는 다 그대로네.”
“친추랑 랭킹 점수는 날아갔어요.”
서정연이 정보 창을 열어서 랭킹 점수와 친구 목록을 띄웠다. 정말로 친구 목록은 한 명도 없이 텅 비었고 랭킹 점수는 0점 처리가 되어 있었다. 가입된 길드도 당연히 없었다.
그걸 보다 보니 자연스럽게 궁금해졌다. 대체 왜 이 지경까지 됐는가, 하는 궁금증 말이다.
“네가 직접 삭제했다가 복구한 건 아닐 테고. 해킹이라도 당했냐?”
“아니에요. 개인적인 일이…….”
서정연이 질문에 제대로 설명하는 대신에 키보드를 두드렸다. 뭘 하나 싶어서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리자 친구 추가 칸에 써진 닉네임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은일요일」
이 자식이 지금 나를 옆에 두고 내 캐릭터한테 친추 요청을 보내고 있었다.
“안 받을 거니까 보내지 마라.”
“왜요? 텅 빈 친추창에 도해준 씨만 딱 있으면 멋있잖아요.”
“뭐가 멋있는데, 대체.”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들은 서정연은 꿋꿋하게 친추 요청을 보내고 나서 게임을 껐다. 아예 계정까지 로그아웃한 녀석이 내 앞으로 노트북을 놔 주었다.
“확인은 여기까지 하고, 아예 여기서 부캐 만들고 갈래요? 여기서 만들고 친추해 두면 편할 것 같은데. 도해준 씨부터 먼저 만들어요.”
그런가? 하긴, 흔적 캐릭터를 확인하는 건 금방 끝났으니 부캐 만드는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았다.
이번에는 런처에 내 계정으로 로그인해서 아크로드를 켰다. 다만 대기 화면에서 ‘오늘은일요일’ 캐릭터로 접속하는 게 아니라 ‘새 캐릭터 생성’ 버튼을 눌렀다.
기본 외형과 함께 오른쪽에 직업을 선택하는 목록 창이 떴다. 아크로드는 10개가 넘는 직업이 있었고, 직업에 따라 플레이가 달라지기 때문에 직업 고르는 게 중요했다.
“무슨 직업으로 하지?”
본캐와 같은 봉술가를 또 키우고 싶진 않았다. 이왕 부캐 키우는 거 새롭고 신선한 직업을 고르고 싶은데.
“서포터나 탱커는 할 생각 없죠?”
“절대 없지. 무조건 근딜이야.”
아크로드의 직업은 크게 네 가지로 나뉜다.
레이드나 PVP에서 가장 선두에 서서 어그로를 끄는 역할인 탱커, 탱커 바로 뒤에서 부족한 대미지를 채워 주거나 몰래 적진에 파고들어서 핵심 유저를 죽이는 근거리 딜러, 멀리서 지속적인 대미지를 넣는 원거리 딜러, 팀원들의 체력을 채워 주고 버프를 걸어 주는 서포터.
그중에서 컨트롤 실력이 가장 중요하고 활동 범위가 넓은 직업이 근거리 딜러였다. 세부 직업에 따라 포지션이 달라지긴 하지만.
나와 서정연은 직업 선택 창에서 깊은 고민에 빠졌다.
“추적자는 어때요? 일휘일비로 해 보니까 적당히 재밌던데.”
“그럼 길드 단체 활동에 참여하기 어려워지잖아. 레이드 파티에서 추적자는 천민이니까.”
“저처럼 블레이드를 키워 보는 건?”
“미안한데 블레이드의 블 자만 들어도 재수 없어.”
“너무하네요.”
한참을 이 직업, 저 직업을 눌러 보다가 겨우 결단을 내렸다. 옆에 앉아서 팔짱을 낀 채로 내가 뭘 고르는지 지켜보던 서정연이 어딘가 실망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무 사기 직업 고르는 거 아니에요?”
“내가 개사기 직업 한다는데 네가 뭔 상관이야.”
봉술가만큼 사기 직업으로 알려진 세이버였다. 장검과 롱보우를 동시에 사용하며, 스킬 사용 시에 캐릭터에서 하얀빛과 함께 불투명한 날개가 생겨나는 화려한 직업이었다.
다만 무기가 두 개나 필요하고 스킬이 난해하고 어려워서 이 직업을 고르는 유저 수는 극히 적었다. 비슷하게 강한 데다 플레이가 훨씬 쉬운 직업들이 있어서 굳이 세이버를 고르지 않았다.
본캐로서 제대로 키우려면 돈이 많이 들고 익숙해지는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어차피 이건 부캐고 다른 목적이 있었으니 적당히 즐기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이참에 세이버로 컨트롤 연습이나 하지, 뭐.
직업은 고르고 나자 그다음은 일사천리였다. 커스터마이징에 딱히 노력을 들이지 않는 성격이라 적당한 거로 고르고 순서를 곧장 넘겼다.
“이제 닉네임만 정하면 되는데.”
직업에 이어서 두 번째 난관에 봉착했다. 아크로드는 출시한 지 시간이 좀 지난 게임이라 웬만한 닉네임은 이미 주인이 있을 거다.
새로운 고민에 빠진 내게 서정연이 제안했다.
“이왕 하는 거 저랑 맞출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