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이 있다며 카페를 떠나갔던 서정연은 정말로 내 퇴근 시간에 맞춰서 돌아왔다.
매장 안으로 들어오는 대신 옆 골목길에서 담배를 피웠는지, 문 밖에서 마주한 서정연에게는 옅은 담배 냄새가 풍겼다.
“고생했네요.”
“이걸 진짜 기다린 너도 참 제정신은 아니다.”
“어차피 집에 가는 길이니까 상관없어요.”
나랑 같이 어딜 갈 것도 아니고, 각자 집으로 가면 되는데 기다린 게 어이가 없었다.
뭔가 사고방식이 일반인 같지가 않단 말이지. 저번처럼 담배꽁초를 휴대용 재떨이에 챙기는 서정연을 노려보던 나는 담배 냄새와 뒤섞인 다른 냄새를 알아챘다.
‘여자 향수 냄새?’
남자가 쓰기에는 지나치게 고혹적인 향이었다. 약속 상대가 여자였나?
‘뭐, 얼굴이 저러니 여자야 당연히 있겠지.’
그래도 약속 간다면서 몰래 부캐 키우고 온 건 아니구나. 그런 거면 만나자마자 바로 따지려고 했는데.
“다음부터는 기다리지 말고 알아서 가.”
아무튼 내 눈앞에 계속 있을 거 아니면 굳이 알바 끝날 때까지 기다릴 필요 없었다. 앞서 걸어가며 말하자 뒤를 따라오던 서정연이 고개를 기울였다.
“왜요?”
“아니, 애초에 기다리는 이유가 나랑 부캐 키우는 시간 맞추려고 한 거잖아. 오늘처럼 이러면 의미가 있냐고.”
“꼭 의미가 있어야 하나요?”
“이 자식이 또 신박한 헛소리를 하네…….”
“중요한 건 저랑 도해준 씨가 같은 시간에 부캐를 키운다는 거니까요.”
“그건 그렇지.”
알바하는 동안 아무것도 안 먹었더니 굉장히 출출했다.
서정연의 말에 적당히 대꾸하며 가는 길에 컵라면이나 편의점 도시락이라도 사 갈까 고민하는데, 잠시간 말이 없던 서정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
“밥 먹고 갈래요?”
“갑자기 뭐야. 내가 너랑 밥을 왜 먹어.”
“일하는 동안 아무것도 못 먹은 거 아니에요? 저도 약속 갔다 오느라 먹은 게 없고. 어차피 먹어야 하는데, 같이 먹으면 좋잖아요.”
그렇긴 한데. 이 근처에서 식사할 만한 곳이라고는…….
나는 앞에 서 있는 서정연의 옷차림을 천천히 살펴봤다. 더운 날씨에 맞춰서 차림새가 가볍긴 하지만, 대충 검은 면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있는 나보다 몇 배는 깔끔하고 세련됐다.
당장 호텔 레스토랑에 들어가서 스테이크를 썰어도 이상하지 않을 저 차림으로 나랑 밥을 먹겠다고? 속으로 코웃음을 치며 녀석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래. 따라와.”
척척 앞장서는 나를 서정연이 웃으며 따라왔다. 저 웃음도 지금뿐일 거다.
어딜 갈지 이미 결정을 내린 나는 목적지를 향해 거침없이 걸어갔다. 카페에서 오른쪽으로 갔다가 한 번 꺾으면 도착하는 곳이라 5분도 걸리지 않았다.
“어서 오세요!”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힘찬 인사가 들림과 동시에 이미 식사 중인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테이블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구석진 자리에 앉아서 서정연을 의기양양하게 쳐다보며 물었다.
“뭐 먹을래?”
김밥 헤븐. 싸고 간단하게 한 끼 때울 수 있는 분식점. PC방이 비위생적이라며 질색하던 서정연에게 아주 좋은 장소였다.
“난 라면.”
웃으며 쐐기를 박듯 이어 말하자 잠자코 응시하던 서정연도 나를 따라 픽 웃으며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그럼 저도 라면 먹을게요.”
“네가 여기서 라면을 먹겠다고?”
“못 먹을 건 없죠.”
아, 그러셔? 난 보란 듯이 소리쳤다.
“여기 라면 두 개요!”
주문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갓 끓인 라면 두 개가 테이블에 놓였다. 이제 와서 도망치지 못하도록 일부러 수저통에서 젓가락과 숟가락을 꺼내 녀석에게 내밀었다.
“내가 살 테니까 꼭 다 먹어라.”
“와, 정말요? 고맙네요.”
남기기만 해 봐. 팔짱을 끼고 노려보는 나를 두고 서정연이 먼저 젓가락을 들었다.
곧게 뻗은 새하얀 손가락으로 젓가락을 쥐고 라면 면발을 짚어서 살짝 벌린 입 안으로 넣는다. 후루룩하는 소리도 들리지 않고 국물이 튀지도 않는, 그야말로 완벽한 젓가락질이었다.
무슨 귀족이 와서 파스타 먹는 줄 알겠다. 분식집에서 라면 먹는데 이렇게 우아할 일이냐고.
나를 포함해서 가게 안에 있는 다른 손님들과 라면을 갖다준 아주머니들까지 넋 놓고 서정연을 바라보는 것을 알아채고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짚어 주지 않아도 확실하게 알았다. 이번 도발도 내 패배였다.
***
집에 돌아온 나는 씻은 뒤에 컴퓨터에 앉아서 아크로드를 켰다.
원래라면 본캐인 ‘오늘은일요일’부터 접속해서 하루 간 별일 없었는지 확인했겠지만, 오늘은 서정연과 쓸데없이 시간을 보냈으니 곧장 부캐로 접속했다.
빚과송금: ㅎㅇㅎㅇ
빚과송금: 왤케 늦게 와여ㅜ
Z10N: ㅈㅅ
Z10N: 파티 ㄱㄱ
들어가자마자 좋은날씨가 기다렸다는 듯이 인사를 보내왔다. 친추 창을 보니 좋은날씨는 물론이고 여여랑과 서정연도 부캐로 접속해 있었다.
세명을 모두 파티에 초대한 나는 각자 어느 정도 진행했는지 확인했다.
[파티] Z10N: 렙 몇찍음?
[파티] 빚과송금: 전 방금 막 60 됐어요
[파티] 쥐안에든독: 저 55ㅇㅇ
[파티] haewo1: 나랑 오일님이 50이니까
[파티] haewo1: 다같이 엔셔숲 들렸다가 던전 들어가면 될듯
[파티] Z10N: ㅇㅇ
[파티] Z10N: 두사람은 정기수집퀘 다했음?
[파티] 쥐안에든독: 하긴했는데 또해도 노상관
[파티] 빚과송금: ㄱㄱ
엔셔 숲 몬스터를 죽이면 뜨는 정기 아이템은 상점에서 체력 포션과 교환할 수도 있고, 이후 종종 날아오는 수집 퀘스트에서 계속 필요하기 때문에 모아 둘수록 이득인 아이템이었다.
‘그러고보니 일휘일비를 처음 만난 곳도 여기였지.’
엔셔 숲으로 장소를 이동하며 새삼 예전 기억을 떠올렸다. 그땐 일휘일비를 보고 흔적에 버금가는 또라이가 나타난 줄 알았는데, 동일인이었다니. 진짜 짜증 나네.
[파티] 빚과송금: 아니 근뎈ㅋㅋㅋㅋ
[파티] 빚과송금: 꼭 이래야하나요?
[파티] 빚과송금: 이게 무슨 아버지를 아버지라 못부르는 홍길동도 아니고..
[파티] 빚과송금: 아는 사람을 옆에 두고 모른척 몹이나 잡는다는게
엔셔 숲에서 모인 우리는 파티를 맺은 상태로 서로 모르는 척 몬스터를 잡기 시작했다.
네 명이 같은 파티라는 걸 괜히 티 내고 다녔다가 나중에 길드 가입할 때 다 같이 떨어지면 큰일이었으니까. 이건 다 혹시 모를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였다.
[파티] Z10N: 어쩔수없음
[파티] Z10N: 길드 들어가는게 목적이니깐..
[파티] 쥐안에든독: 왜요
[파티] 쥐안에든독: 전 이러는거 개좋은데요
[파티] 쥐안에든독: 우리 목적은 부캐 키우는게 아니라 >잠입<이잔아요
[파티] 쥐안에든독: 캬~~~
[파티] 쥐안에든독: 간지 오진다ㅇㅇㅇ
[파티] 쥐안에든독: 마치 CA처럼!!
[파티] Z10N: CIA라고...
[파티] 쥐안에든독: 아마자ㅋ
[파티] haewo1: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서정연의 웃는 채팅을 보자 얼굴이 절로 화끈거렸다. 왜 부끄러움은 내 몫인가. 순백한 뇌가 들통난 건 여여랑인데 창피한 건 나였다.
여여랑의 머리가 우리 요일 길드 평균이라고 오해하면 안 되는데. 속으로 한탄을 하며 앞에 있는 나무 형태의 몬스터를 때리려던 그때였다.
퍽!
내가 미처 때리기도 전에 다른 유저가 먼저 몬스터를 죽여 버렸다. 우연히 겹쳤다고 생각하며 옆에 있는 다른 몬스터로 표적을 바꾸자마자 그 유저가 또 죽여 버렸다.
‘뭐야?’
의심을 품고 아예 거리가 좀 있는 몬스터에게로 달려가서 죽이려는데, 내 뒤를 쫓아온 그 유저가 이번 몬스터도 순식간에 죽여 버렸다.
“…….”
이건 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저 생판 처음 보는 놈이 내가 잡을 몬스터를 자기가 먼저 죽이고 있었다. 심지어 광역 스킬까지 써서 근처 뉴비들이 죽일 몬스터까지 모조리 죽였다.
나는 상대의 닉네임과 입고 있는 장비 상태를 살펴봤다. 닉네임은 충치왕김건치. 장비를 봐서는 만렙이고. 닉네임부터 하는 짓거리까지 다 제정신이 아니군.
‘비매너 새끼.’
저런 놈들을 처음 보는 건 아니다. 일부러 뉴비 존에 찾아와서 퀘스트 방해하고 양아치 짓을 하는 놈들이 있는 건 알았지만, 하필 지금 마주칠 줄이야.
본캐를 가져오거나 소란을 벌여도 상관없으면 모를까, 평범한 유저인 척 조용히 키워서 길드에 들어가야 하는 우리 입장에서는 피하는 게 답이었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운 좋은 새끼. 속으로 저 유저를 잘근잘근 씹으며 파티원들에게 채널 이동하자고 말하려던 그 순간이었다.
[전체] haewo1: 야
[전체] haewo1: 꺼/져
“콜록, 콜록, 켁!”
빠르게 올라온 서정연의 채팅에 너무 놀란 나머지 침을 잘못 삼켜 버렸다. 나는 켁켁거리면서 기침을 하는 와중에도 경악스러운 심정을 숨기지 못했다.
‘저 미친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