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웅, 스킬이 내리꽂히는 소리와 함께 화면이 뒤흔들렸다. 가까스로 공격을 피한 라임나무가 급히 일정 시간 동안 방어력을 올려 주는 버프 스킬을 사용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요일 길마는 어디 갔지?’
그새 도망친 건지 아무리 시점을 돌려 봐도 뒤엉켜 싸우는 유저들만 보일 뿐, 요일 길마의 붉은 머리카락은 보이지 않았다.
[전체] 마하: 뭐찾음?
라임나무가 전투에 집중 못 하는 걸 귀신같이 알아챈 마하가 새로운 스킬을 사용했다. 콰르릉, 하늘 저편에서 샛노란 벼락이 라임나무가 서 있는 자리로 정확히 내리꽂혔다.
요일 길마를 찾다가 미처 반응하지 못한 라임나무가 이번 공격은 피하지 못하고 고스란히 받아 냈다. 다행히 방어 버프 스킬을 켜 놔서 대미지가 크게 뜨진 않았지만, 경직에 걸려서 0.5초 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틈이 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좋은날씨에게는 최적의 공격 타이밍이었다. 창술사가 가진 돌진기로 시원하게 날아온 좋은날씨의 창과 라임나무의 대검이 교차하며 부딪혔다.
하필 방어 버프 스킬이 끝나면서 좋은날씨가 종결 무기를 휘두를 때마다 체력이 훅훅 깎였다. 보통 딜러보다는 체력이 많긴 했지만, 순수 탱커가 아닌 딜탱인 터라 오래 버티긴 어려웠다.
라임나무의 예상보다 좋은날씨와 마하가 더 강하기도 했다. 어쨌든 그는 이번에 처음으로 요일 길드를 상대로 전쟁에 참여한 유저였다. 요일 길드원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실제로 부딪혀 본 지금에서야 알 수밖에 없었다.
‘설마 요일 길마는 이 상황을 다 예상하고 있었던 건가?’
왜 하고많은 길드원 중에서 하필 마하를 보낸 건지 라임나무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것도 실력 좋은 근딜까지 붙여서 보낸 걸 보면 애초에 세워 둔 계획이라는 건데.
‘그저 우연인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엔 마음 한구석이 자꾸만 찝찝했다.
자신이 요일 길마 앞을 가로막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마하와 좋은날씨가 대신 바톤을 이어받고 요일 길마는 다른 곳으로 가 버린 그 일련의 과정이 너무 자연스럽게 진행되지 않았나.
마치… 그래, 마치 자신이 요일 길마와 싸우기 위해 찾아올 거라는 것을 알고 있던 것처럼.
[전체] 좋은날씨: ^^>
싸움에 집중을 못 하는 라임나무를 좋은날씨가 숨 돌릴 틈 없이 계속해서 몰아붙였다. 스킬 콤보를 이어 가는 와중에 여유롭게 채팅으로 도발까지 해 왔다.
착실하게 줄어들던 라임나무의 체력은 어느새 30%밖에 남지 않았다. 카운터 스킬로 좋은날씨의 공격을 쳐 낸 라임나무가 가까스로 거리를 벌렸다.
당장은 창술사를 떼어 놓긴 했지만, 여기서 도망치거나 이기는 건 불가능했다. 사기 직업 중 하나인 창술사는 돌진기 스킬 쿨타임이 워낙 짧아서 팔라딘 정도야 금방 따라올 거고, 먼 거리에서도 공격이 가능한 배틀 메이지까지 있으니 라임나무가 죽는 건 확정된 거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라임나무는 쓸데없이 스킬을 누르거나 회피하는 대신에 채팅을 쳤다.
[전체] 나의라임나무: 허접한 딜탱한테 너무 과한 투자하는거 아님?
[전체] 나의라임나무: 길마가 그러라고 시켯어여?
라임나무의 채팅에 모니터를 바라보던 마하가 눈가를 좁혔다.
예상은 했지만 진짜로 눈치가 꽤 빠르네. 그렇다고 달라지는 건 없지만.
[귓속말] 좋은날씨: 죽여요?
[귓속말] 마하: ㄱ
좋은날씨가 나서기도 전에 마하가 먼저 스킬을 차징했다.
푸른 불꽃과 번개가 합쳐진 배틀 메이지의 궁극기 스킬이 화려하게 빛나며 라임나무의 머리 위로 내리쳤다. 콰광! 새파란 불꽃과 전류가 타오르며 남아 있던 라임나무의 체력을 모조리 깎아 내렸다.
털썩, 바닥으로 쓰러진 라임나무의 캐릭터가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마하는 시선을 올려 화면 상단을 확인했다. 어느새 킬 포인트 게이지는 50%를 넘어가고 있었다.
“뭘 하려는 건진 모르지만 할 거면 빨리해라.”
마하의 말을 들은 도해준이 차분한 음성으로 물었다.
[라임나무는?]
“방금 죽었어. 다시 살아나면 여기 안 오고 네가 있는 쪽으로 갈 거니까 하던 거 빨리 마무리 지어.”
[아, 오케이.]
대답은 쉽게 나왔지만 듣는 마하는 여전히 불안했다. 마하와 좋은날씨를 한 팀으로 묶어 둔 도해준이 부탁한 일은 어디까지나 라임나무를 한 번만 막아 달라는 것뿐이었다.
그 외에 계획은 도해준이 설명해 주지 않았으니 당연히 몰랐다. 따지듯 물어봐도 ‘내가 어련히 잘하겠다니까. 길마 못 믿어?’ 따위의 개소리만 늘어놓는 꼴이 짜증 나서 네 마음대로 해라, 포기한 상태였다.
굳이 설명을 안 해 주고 말을 빙빙 돌리는 건, 분명 흔적이랑 관련된 뭔가가 있다는 거겠지. 둘이 이만큼이나 짝짜꿍이 잘 맞으면서 친해졌냐고 물으면 왜 기를 쓰고 아니라고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새롭게 밀려오는 적을 상대하며 마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골치 아파질 바엔 차라리 한 명이라도 더 빨리 죽여서 킬 포인트 게이지를 채우는 게 낫겠다.
***
라임나무를 유진호와 좋은날씨에게 맡긴 나는 계속해서 목적지로 향하는 동시에 길드 상황을 살폈다.
[길드] 류페: 저 사망ㅠ
[길드] 아스타로트: 아 개허접ㅡㅡ
[길드] 류페: ㅠㅠㅠㅠㅠ
“류페님 대기 시간 동안 자리 채워 줄 사람 있어요?”
[길드] 불좀켜줄래: 제가 ㄱㄱ
[길드] rxrx78: 저도 가능
“아니, B팀은 웬만하면 포지션 바꾸지 마세요.”
오더를 하며 날아오는 스킬을 피했다.
내게 공격한 유저를 향해 공격력 버프 스킬을 켠 다음 평타를 몇 번 후려치자 상대가 금방 죽어 버렸다. 뭔 날벌레 같은 놈이 수준 차이도 모르고 막 덤비네. 노퓨쳐가 사람을 진짜 대충 뽑긴 했구나.
“그리고 B팀은 사망 즉시 무조건 브리핑하세요. 부활한 다음에는 최대한 빨리 본 위치로 가시고.”
[길드] rxrx78: ㅇㅋ
[길드] 아스타로트: 확인
[길드] sky004: ㅎㅇ요
[길드] 울팀인성봐조인성: 확인
[길드] 야옹이라옹: ㅇㅅㅇ~
[길드] 야옹이라옹: 일욜님 우리한테 모 잼는거 시키려나부다ㅋㅋ
[길드] sky004: ㅋㅋ
[길드] sky004: 저 벌써 설레요
하여간 속일 수가 없다니까. 픽 웃으며 말했다.
“그 재밌는 일에 직접 참여하고 싶으면 적당히 죽으세요. 그리고 별론가님.”
[네엡.]
“저 대신해서 B팀 좀 잘 봐 줘요. 급한 일 있으면 부르고. 마하, 너도. 저 잠깐만 집중 좀 합니다.”
그걸 끝으로 마이크를 음소거 했다. 동시에 나는 오른편에 스쳐 지나가듯 보이는 연하늘색을 발견했다.
종결이 아닌 밋밋한 검을 들고 서 있는 연하늘색 장발 머리 캐릭터. 그 위에 박혀 있는 닉네임은 ‘heunJeok’이었다. 흔적 사칭범이 바로 저기에 있었다.
내가 녀석을 발견하듯 상대도 나를 발견했다는 게 느껴졌다. 내가 보란 듯이 가던 길을 멈추자 흔적 사칭범이 스킬을 사용했는지 검 끝을 위로 들어 올렸다.
‘미끼 역할 한번 제대로 하는군.’
노퓨쳐는 지금 나를 낚기 위해 가짜 흔적을 미끼로 걸고 열심히 흔들고 있었다.
이 거리에서 보면 저 가짜는 마치 옛날의 그 흔적과 놀랄 만큼 닮아 있어서, 만약 저 녀석이 가짜라는 확신이 없었다면 혹할 만했다.
하지만 난 누가 진짜인지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저런 뻔한 미끼에 낚일 이유도 없었다.
일부러 보란 듯이 돌진기를 써서 목적지를 향해 다시 나아갔다. 내가 자신을 상대하지 않고 그대로 스쳐 지나가자 흔적 사칭범이 당황했는지 캐릭터가 버벅거리는 게 보였다.
앞을 막는 날파리 같은 놈들 몇 명을 죽이고 흔적 사칭범도 지나친 후에야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난 맞은편에 보이는 낯익은 캐릭터를 보며 입을 열었다.
“처맞을 준비는 됐어?”
모니터에 비친 서정연의 부캐, ‘haewo1’을 보며 묻자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요. 안 그래도 너무 늦어서 걱정하던 참이었어요.”
대놓고 던진 도발에도 농담이 절반 섞인 대답이 돌아왔다. 서정연의 뻔뻔한 반응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내가 여기까지 오면서 몇 명을 죽였는지 알기나 해? 개고생하면서 왔다고.”
“원래 공주님 만나러 오는 길은 험난하잖아요.”
“켁, 콜록……!”
대뜸 튀어나온 공주님 소리에 놀라서 침을 잘 못 삼키고 말았다. 어이가 없어서 기침하며 옆을 돌아보자 서정연이 입가를 손에 가린 채로 새침하게 투덜거렸다.
“그리고 상대했다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수준 이하인 놈들만 덤비던데요? 그게 뭐가 개고생이에요.”
“뭐야. 너 내 모니터 봤어?”
“한참을 기다려도 안 오니까 심심해서 훔쳐봤죠.”
잘나셨다, 아주. 훔쳐봤다는 걸 당당하게 말하는 꼴이 기가 막혔다. 서정연 집이고 서정연 컴퓨터니까 뭐라 할 수도 없고.
‘어쩔 수 없지… 죽여야겠다.’
그래도 저렇게 놀리는 걸 놔두기엔 얄밉고 재수 없으니까 게임에서라도 패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무기를 들어 올렸다.
“공주님 때리려고 무기 든 거예요?”
“닥쳐, 좀.”
끝까지 이상한 장난을 치는 서정연의 모습에 질색하자 녀석이 킥킥거리며 키보드를 가볍게 두어 번 두드렸다. 그러자 모니터에 보이는 서정연의 캐릭터도 나를 따라서 무기를 꺼내 들었다.
“……?”
당연히 어제까지 같이 부캐를 키우면서 봤던 그 무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나는 녀석이 든 단검에서 흘러나오는 새파란 빛을 발견하고 입을 천천히 벌렸다.
뭐야. 잠깐만. 저거 무기 왜 저래. 저 빛 뭐냐고. 대체 왜, 어째서…….
“무기에 공속 풀강이 박혀 있는 건데!”
경악스러운 심정을 숨기지 못하고 버럭 외치자 서정연이 수줍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아까 도해준 씨 마중 가기 전에 잠깐 켰는데 경매장에 종결 무기 올라와 있길래 바로 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