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테이블에 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서제현의 추궁에 마땅히 반박할 거리가 없어서 입술을 꾹 다물고 있자니 서정연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친구랑 반말하든 존댓말을 하든 너랑 상관없는 문제니까 관심 끄고. 윤 비서님 곧 오실 테니까 얌전히 집에 가.”
“뭐야? 언제 불렀어!”
“아까. 바로 오겠다고 하셨으니까 여러 사람 번거롭게 만들지 말고 차 타고 돌아가.”
“아씨…….”
머리를 짜증스럽게 긁은 서제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면 될 거 아냐! 형 진짜 너무해. 나 병문안 와 주지도 않고 여기까지 시간 내서 보러 왔더니 가라는 소리만 하고!”
많이 분한지, 눈가를 빨갛게 물들인 채로 씩씩거리며 소리치던 서제현이 붙잡을 틈도 없이 카페를 뛰쳐나갔다.
동생이 상처받고 가 버리거나 말거나 심드렁히 커피를 마시던 서정연은 서제현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잔을 내려놨다.
“미안해요, 도해준 씨. 갑자기 이런 일이 생겨서. 아까 많이 놀랐죠?”
서제현에게는 한 번도 들려주지 않은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그 차이를 느끼자 철없게도 기분이 좋아졌다. 이런 내가 스스로도 어이없었다. 머쓱함에 괜히 헛기침하며 대답했다.
“괜찮아. 너보다 한 시간이나 먼저 와서 기다리던데, 그런 상황이면 너도 당연히 모를 만하지.”
“보다시피 동생이 좀 제멋대로라서요. 애가 평소에 오냐오냐 자라서 버릇이 없기도 하고. 혹시 제가 오기 전에 도해준 씨한테 예의 없게 굴진 않았어요?”
그 말에 아까 내게 반말로 주문하던 서제현이 떠올랐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까 17살짜리한테 반말을 들은 거잖아? 기껏해야 대학생인 줄 알았는데.
“…그럴 리가. 별일 없었어.”
하지만 17살짜리가 한 짓을 냉큼 고자질하기에는 나도 양심이 좀 찔렸다. 모른 척 거짓말을 하자 흐음, 하며 묘한 소리를 흘린 서정연이 픽 웃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저…….”
속으로 물어볼까 말까 수십 번 갈등하다가 끝내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동생이랑… 사이가 안 좋냐? 분위기가 딱딱하네.”
“사이는 괜찮아요. 근데 나이 차가 있는 데다… 친해지면 안 되는 환경적 문제가 있어서요.”
환경적 문제. 설마 이복형제라서? 마른침이 절로 넘어갔다. 긴장한 내 표정을 본 서정연이 턱을 괴며 눈꼬리를 길게 접었다.
“아침 드라마 같은 데에 나올 정도의 막장은 아닌데, 그렇다고 정상적인 가정환경은 절대 아니고. 조금 복잡하긴 해요.”
“불편하면 굳이 설명 안 해 줘도 돼.”
“왜요?”
혹여 내 태도가 가벼워 보여서 서정연에게 상처를 줄까 봐 다급히 덧붙이자 서정연이 손가락으로 테이블 위에 올려진 내 손등을 톡 두드렸다.
“난 도해준 씨가 저에 대해서 궁금해하면 좋겠는데.”
“…나 곧 일하러 가 봐야 하잖아. 짧게 끝낼 얘기가 아닌 것 같은데.”
“아, 맞네요. 그럼 도해준 씨.”
내 손등을 두드리던 서정연의 손이 천천히 내 안쪽 손목을 쓸어 왔다. 손목을 간지럽히는 감각에 순간 아찔해졌다.
“이따 퇴근하고 나서 만날래요? 어차피 정이 산책시켜 줘야 하는데.”
“…….”
“저번에 나한테 산책시키는 거 도와준다고 약속했잖아요.”
마치 비밀스러운 대화를 하는 것처럼 속삭이듯 나온 제안에 순식간에 목덜미로 열기가 치솟았다. 그걸 들키기 싫어서 최대한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힘겹게 대답했다.
“그, 그래. 약속했으니까…….”
“네. 약속했으니까.”
“끝나고… 연락할게.”
“알겠어요. 전화해요.”
***
이복형제라는 설명을 들었을 때, 나는 당연하게 서정연이 본처의 아들인 줄 알았다. 서제현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기도 하고, 녀석이 그간 보여 준 모습들이 딱 봐도 곱게 자란 부잣집 도련님 같았으니까.
“서제현은 본처의 아들이에요. 저는 첩의 아들이고.”
“뭐?”
그래서 서정연이 이야기를 시작하자마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서제현이 본처의 아들이라고? 그 양아치 같은 놈이?
내가 왜 놀라는지 이해한다는 얼굴로 웃은 서정연이 신난 발걸음으로 앞서 걸어가는 정이를 보며 말을 이었다.
“서제현의 어머니가 아이를 늦게 가지셔서, 결혼 중간에 만난 제 어머니 사이에서 제가 먼저 태어났어요. 제 어머니는 회사 직원이었고.”
“아버님이 무슨 일을 하시길래…….”
“아, 제가 말 안 했었나요? 도해준 씨, ‘칼덴’이라는 회사 알아요? 의류 쪽인데.”
“칼덴? 잠깐, 설마 그 스포츠용품? 빨간색 로고 박힌?”
“네. 맞아요. 거기 대표이사예요.”
모를 수가 없다. 우리나라의 스포츠용품은 저 회사가 꽉 잡고 있었으니까.
운동복부터 신발, 모자, 등산복 등 트렌디하고 다양한 제품을 판매하는 대기업이었다. 근데 거기 대표이사가 서정연의 아버지라고? 나는 놀라운 심정을 숨기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부잣집 도련님인 줄은 알았는데 이 정도일 줄이야.”
“그래도 저 제법 소소하지 않았나요?”
“몰라. 나 살면서 만나 본 재벌은 너밖에 없어.”
“엄연히 따지자면 전 아니고, 서제현이랑 그 가족들이 재벌이에요.”
재밌는 농담을 하듯이 킥킥거리며 가볍게 던진 말에 나만 눈치가 보였다. 연달아 이어진 충격적인 설명에 지금 내 머릿속에는 재벌 관련 드라마가 5편 정도 상영되고 있었다.
“야, 정말 괜찮은 거야?”
첩의 아들로서 가족들에게 받는 핍박, 재벌가의 피도 눈물도 없는 매정함, 이복형제와의 차별까지 떠올린 내가 참지 못하고 묻자 서정연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뭐가요?”
“그런 힘든 이야기를… 이렇게 간단하게…….”
“힘든 이야기?”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어물거리는 내 모습에 고개를 기울인 서정연이 곧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도해준 씨, 제가 불쌍해요?”
“뭐?”
“저 불쌍해 보여요? 첩의 아들이라서?”
“뭔 소리야, 또. 그런 의미가 아니잖아.”
“아쉽네요. 전 도해준 씨가 저 좀 불쌍하고 안쓰럽게 봐 주면 좋겠는데.”
“…….”
이거 진심인가? 서정연의 의중을 파악할 수가 없어서 눈가만 좁히는데, 그가 갑자기 내 어깨를 붙잡아 제게로 끌어당겼다. 확 풍겨 오는 체향에 심장이 크게 뛰었다.
“잠깐만 이리 와 봐요.”
내 어깨를 끌어안은 채 대로변으로 나온 서정연이 차도 너머로 보이는 높다란 건물들을 가리켰다.
“저기 보여요? 8층짜리 사무실 건물이요.”
“어, 어.”
겨우 정신을 차린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서정연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제 거예요.”
“…어? 뭐라고?”
“저기 옆에 있는 건물도 제 거고.”
“…….”
“여기선 안 보이는데 도해준 씨가 일하고 있는 카페 뒤쪽에 있는 건물도 제 거예요.”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서정연 이 자식이 지금 나한테 본인 재력을 자랑하고 있다는 것을.
“회사 지분도 있고… 안 쓰고 놔둔 돈도 있으니까, 아마 회사가 망하지 않는 이상 죽을 때까지 흥청망청 살아도 충분할걸요.”
“…….”
“저 아직도 불쌍해요?”
“아니, 재수 없어.”
“하하.”
뭘 잘했다고 웃는지 모르겠다. 어쩐지 피곤해져서 한숨을 푹 내쉬자 어깨를 놔준 서정연이 기분 좋은 얼굴을 하고서 나를 바라봤다. 가로등 불빛에 비친 녀석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첩의 자식이라고 차별받거나 괴롭힘을 당한 건 없었어요. 서제현의 어머니는 저한테 잘해 주셨고 아버지도 나름 챙겨 준 덕분이에요. 서제현이 태어나서 어느 정도 자란 이후에는 외국으로 잠깐 나가야 하긴 했지만.”
“…몇 살에?”
“글쎄요. 몇 살이었더라. 서제현이 두 살이었을 때니까… 14살쯤? 한국은 성인 되고 나서 돌아왔어요. 그리고 외국에서도 부족한 거 없이 잘 살았으니까 별 상관은 없고.”
“친어머니랑 같이 나간 거야?”
“아뇨, 친어머니하고는 애초에 따로 살아서.”
또다시 할 말을 잃은 나는 입술을 다물고 시선을 내렸다. 우리 발아래에는 정이가 헥헥 소리를 내며 앉아 있었다.
아무리 부족한 거 없이 컸고 건물이 몇 채고 통장에 돈이 쌓여 있다고 해도… 그게 다가 아니지 않나. 서정연보다 어린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어이없겠지만 아닌 건 아닌 거였다.
14살. 어린 나이에 가족도 없이 혼자 외국으로 갔으니 아닌 척해도 분명 외로웠을 거다. 어쩌면 서정연을 아무런 조건 없이 순수하게 사랑해 주는 진정한 가족은 정이가 유일하지 않을까.
서정연의 과거를 알게 되자 녀석이 왜 나를 자꾸 집에 초대하고 같이 밥을 먹자고 조른 건지 이해가 됐다. 그렇구나. 집에 정이랑 단둘이 있으면서 얼마나 외롭고 쓸쓸했을까.
‘난 그것도 모르고…….’
자기 집에 놀러 와서 같이 밥을 먹자는 서정연의 부탁을 매정하게 쳐 낸 지난날의 내 모습이 떠오르자 양심이 어마어마하게 아파졌다. 눈물을 삼켜 내며 서정연의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서정연.”
“어, 네?”
내가 정색하고 이름을 부르자 눈을 살짝 크게 뜬 서정연이 내게 붙잡힌 제 손목을 힐끔거렸다.
“다음 주에 갈게.”
“네?”
“집. 놀러… 오라며?”
진지한 와중에도 집에 놀러 가겠다는 말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머쓱하게 헛기침하자 잠시 멍하니 서 있던 서정연이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환하게 웃었다. 분명 밤인데도 빛이 번쩍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놀러 와 줄 거예요?”
“그, 그래.”
“다음 주 언제요? 주말? 평일? 밤에 와서 하루 자고 가는 것도 괜찮아요.”
“아니, 그건 좀… 알바 쉴 때 갈게.”
내 예상보다 더 기뻐하는 서정연을 보고 있자니 또 안쓰러워졌다. 그 정도로 외로웠던 거냐고. 자주 가는 건 어렵더라도 종종 가서 같이 밥을 먹어 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