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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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연의 채팅이 머릿속에 박혀 왔다.
이성적으로 판단하면 여여랑이 말한 것처럼 당장 이 캐릭터를 버리고 새로 키우는 게 맞았다. 하지만… 서정연의 저 자신감 넘치는 태도가 마음에 걸렸다.
‘정말 믿어도 되는 건가?’
우리 중에서 어나더 길드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당연히 서정연이었지만, 사고를 쳐놓고 저 계획을 말하니까 신뢰성이 좀 떨어졌다.
이 자식, 혹시 새로 키우기 귀찮아서 말을 막 던지는 거 아냐?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서정연을 믿고 이대로 진행해도 괜찮을지 의심스러웠다.
이마를 짚은 채로 한참을 고민하다가 옆에 던져둔 핸드폰을 들었다.
 
[파티] Z10N: 기다려봐
 
아무래도 서정연한테 얘기를 더 자세히 들어 봐야 결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채팅으로 대화하기엔 너무 답답해 결국 서정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내가 연락할 걸 예상했는지 전화는 곧장 연결됐다. 나는 인사 대신 이를 갈며 물었다.
“좀 더 제대로 설명해 봐. 가능성 있는 계획이야?”
[그럼요. 그러니까 제안했죠.]
“단기간에 길드를 키우려면 어그로를 담당하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건 나도 잘 알아.”
요일 길드의 경우, 그 대표는 나였고 마하와 좋은날씨도 부족한 어그로를 어느 정도 채워 줬다.
“하지만 부캐 가능성이 큰 네 명을 길드에 가입시킬 정도로 중요한 건 절대 아니야.”
[단순히 ‘어그로’ 인력으로만 따지면 그렇죠.]
“무슨 뜻이야?”
[우리 때를 떠올려 봐요.]
우리 때? 혹시 1년 동안 길드 전쟁했을 때를 말하는 건가?
[어그로가 서버 전체 규모로 가면 그 효과도 커지잖아요. 개인이 가끔씩 사고 치는 것도 물론 좋은 어그로지만, 도해준 씨네 길드랑 우리 길드가 지난 1년간 수십 번 해 온 길드 전쟁이 길드 몸집을 키우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고 봐요.]
“그건…….”
확실히 그렇긴 했다.
어나더 길드와 전쟁을 한두 번 했을 때는 별다른 차이가 없었지만, 그 전쟁이 다섯 번이 넘어가면서부터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PVP를 좋아하는 유저들이 우리 길드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PVP 같은 대전류를 좋아하는 사람은 대부분 호전적이고 그만큼 경험이 많아서, 전쟁에 도움이 되는 실력 좋은 길드원이 많이 들어온 시기도 저 때였다.
[지금 어나더 길드는 그런 ‘대규모’ 어그로를 끌어 줄 인력이 절실해요. 정확히 말하면 노퓨쳐가 그런 유저를 찾고 있어요.]
“그걸 어떻게 확신해?”
[내가 직접 겪었으니까.]
단호하게 대답한 서정연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설명을 이었다.
[제가 애초에 어나더 길드에 들어간 이유도 노퓨쳐의 제안을 받아서 들어간 거예요. 그전에는 원래 노퓨쳐가 길마였는데, 몰랐죠?]
노퓨쳐가 원래 길마였다고? 내 기억으로는 흔적이 처음부터 어나더 길드의 길마였는데, 그렇다는 건 흔적이 나타나기 전에는 노퓨쳐가 길마였다는 거구나.
‘어나더 길드를 세운 건 노퓨쳐일지도 모르겠네.’
왜 당연하게 흔적이 길드를 세웠다고 생각했을까. 지금 와서 보면 서정연의 성격상 그런 번거로운 일을 벌였을 것 같진 않다.
“그럼… 노퓨쳐는 너보고 어그로 끌라고 길마 자리에 앉혀 둔 건가?”
[겸사겸사요. 노퓨쳐가 게임을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잘하지도 않잖아요. 어그로 오래 끌려면 게임 실력도 필요한 거 도해준 씨도 잘 알죠?]
남이랑 싸우는 모습을 보여 주는 건 가장 쉽고 강한 어그로였다. 하지만 그 방법으로 인기를 끌려면 게임 실력이 좋아야 했다. 매번 싸울 때마다 지면 그건 더 이상 어그로 인력이 될 수 없었으니까.
[저도 원래 이런 계획은 고려하지 않았는데, 도해준 씨가 저번에 해 준 얘기 듣고 마음을 바꿨어요. 어나더 길드원이랑 충돌했을 때, 그 자리에 노퓨쳐랑 가짜 흔적이 없었다고 했잖아요.]
“그랬지.”
[만약 제가 노퓨쳐고, 길드를 다시 키울 목적으로 가짜를 데려다 앉혔으면… 그 자리에 가짜를 데려갔을 거예요.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는 건 가짜한테 뭔가 문제가 있다는 거죠.]
차분하게 서정연의 설명을 들은 나는 녀석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바로 알아챘다.
“사칭범의 실력이 그리 좋은 건 아니라는 거네.”
[맞아요. 실력을 선보일 최적의 상황에서 나타나지 않았다면 어그로를 끌어갈 실력이 아니라는 거예요. 기껏 흔적이 복귀했다고 소문 다 내놨는데 거기서 도해준 씨한테 힘도 못 쓰고 지는 모습을 보여 주면 자기들 계획이 다 망할 테니까.]
“안 그래도 닉네임이 대소문자가 달라서 가짜일 거라는 말이 많은데 실력까지 보여 주면 더 난리 나겠네.”
[어나더 길드는 어그로 인력이 필요하고, 우리는 길드에 들어가야 하죠. 그러니까 그 부분을 노려보자고요. 솔직히 말해서 도해준 씨, 조용하게 게임하는 것보다 이번처럼 속 시원하게 싸우는 게 더 적성에 맞잖아요.]
“뭔데 재수 없게 아는 척이야.”
대꾸는 이렇게 했지만 사실 그렇긴 했다.
끼익,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천장을 올려다봤다. 순순히 동의하고 싶지 않아서 시간을 끌고 있긴 하지만, 서정연의 설득에 넘어갔다는 사실을 부정하긴 어려웠다.
“…알겠어.”
나는 결국 서정연의 계획을 받아들였다. 더는 반박할 거리가 없기도 했고. 하지만 아직 걱정할 만한 부분이 남아 있었다.
“근데 사사게에 이미 부캐 얘기도 몇 번 나왔고, 내가 보기에도 우리 파티는 너무 부캐 냄새가 나서. 이건 상관없는 건가?”
[음… 아마 괜찮을 거예요. 이건 제가 내일쯤이면 더 제대로 된 답을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내일? 왜 하필 내일인데?”
[도해준 씨도 저절로 알게 될걸요.]
뭐라는 거야. 제대로 설명하라고 따질까 하다가 그냥 고개를 저었다. 내일이면 알게 된다니까 그냥 이쯤에서 적당히 물러나야지.
일단 서정연과 이 이상 통화를 이어 가긴엔 내 정신력이 슬슬 한계였다.
“그럼 애들한테도 새 캐릭터 키우지 말고 일단 계속 해 보자고 말할게.”
[네. 부탁할게요.]
서정연과 대화한 내용을 어떻게 정리해서 채팅으로 설명해야 할지, 벌써부터 머리가 아팠다. 전화를 끊은 나는 핸드폰을 든 채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서정연이 내세운 ‘어그로 인력’ 계획을 들은 좋은날씨와 여여랑은 순순히 동의했다.
어차피 이 둘은 이 계획이 성공하든 말든 큰 의미를 두고 있지 않았으니 나와 서정연처럼 크게 고민하지 않는 것도 이해가 된다.
‘오히려 마음껏 날뛸 수 있어서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우리가 부캐 파티라는 부분만 적당히 해결되면 서정연의 계획도 해 볼 만하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하루를 보낸 다음 날.
“…….”
나는 복잡한 심경으로 모니터를 바라봤다. 앞길을 막아선 유저들을 본 좋은날씨와 여여랑도 나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파티] 빚과송금: 와 뭐지..?
[파티] 쥐안에든독: ㄷㄷ
 
어제, 수집 퀘스트를 방해하던 비매너 유저인 충치왕김건치는 우리한테 잘못 걸려서 신나게 얻어맞고 도망쳤다.
아크로드를 2년 넘게 하면서 충치왕김건치 같은 유저는 종종 봐 왔던 터라, 난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보다는 우리 상황이 더 복잡해서 처맞고 도망친 비매너 유저 따위는 신경 쓸 겨를이 없기도 했고.
그래서 지금 이 상황이 더 어이없었다.
 
[전체] 동파방지: ㅋ찐뉴비들이네
[전체] 동파방지: 장비꼴보셈
[전체] 밍나고멘: ㅋㅋㅋㅋㅋㅋㅋㅋ
[전체] 밍나고멘: 이거 현타오네ㅎ
[전체] 채단비: 10분컷가능할듯ㄱㄱㄱ
 
우리를 막아선 유저들은 모두 ‘티거’ 길드 소속이었다. 심지어 ‘채단비’는 부길마 마크까지 달고 있었다.
저 길드는 나도 잘 알았다. 모를 수가 없지. 어제 우리가 죽였던 충치왕김건치가 소속된 길드였으니까.
 
[파티] haewo1: 예상하긴 했는데
[파티] haewo1: 제법 본격적으로 찾아왔네요
 
상대를 확인한 서정연도 팀원들을 따라 느긋하게 채팅을 쳤다. 그 모습에 어제 서정연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일이 되면 저절로 알게 될 거라는 게 설마…….’
지금 이 상황을 뜻하는 거야? 하지만 길드원의 복수를 하겠다며 뉴비들을 찾아온 저 찌질한 놈들이 무슨 해결책이 된다는 거지?
 
[파티] 쥐안에든독: 어우 왜 내가 쪽팔리냐
[파티] 빚과송금: 아니....
[파티] 빚과송금: 뉴비팟을 여러명이서 찾아온것도 웃기긴한데
[파티] 빚과송금: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저러는거임?
[파티] 쥐안에든독: ㄱㄴㄲ;
[파티] 쥐안에든독: 애초에 비매짓한것도 저쪽 길드 **인데
[파티] haewo1: 그런거 구분할 정신머리가 있으면
[파티] haewo1: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음
[파티] haewo1: 오일님
 
서정연이 나를 부른 동시에 내게로 공격 스킬이 날아왔다. 재빨리 반격기를 사용하지 않았으면 꼼짝없이 스킬을 맞고 바닥을 뒹굴었을 거다.

মই প্ৰতিদ্বন্দ্বী হোৱা বন্ধ কৰি দিম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